
[SOH]
6·4사건 24주년이 다가오는 가운데, 자오쯔양 전 중공 총서기의 비서 바오퉁(鲍彤)은 해외 웹사이트에 동영상을 공개하고, 6·4 당시 사망자가 2,000명이 넘는다고 말했습니다.
33분짜리로 대략 지난해 말 혹은 올해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영상에서 그는 6·4에 대해 중공의 무력진압은 ‘반인류죄’이며, 이를 두고 ‘반란을 평정’한 것으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당국이 자신을 지목해 학생들에게 군 계엄 비밀을 누설했다고 한 것은 ‘가장 억울한 사건’이라면서, 6·4 전 친청감옥에 감금돼 실명을 쓰지 못하고 번호 ‘8901’로만 불렸다고 말했습니다. 6·4사건 사망자 수에 대해 그는 당시 적십사가 이미 2,000명이 넘었다고 발표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작가 찐야오루(金尧如)는 잡지 ‘베이징의 봄’에서 6·4기간 바오퉁은 중공 고위 지도자임에도 공개적으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지지했다고 밝혔습니다. 바오퉁은 자오쯔양 총서기가 제시한 ‘민주와 법 제도 하에서 학생들이 요구한 민주개혁 방침의 평화적 해결’을 적극적으로 집행했고, 덩샤오핑의 무력 진압방침을 반대했습니다.
리펑(李鹏) 당시 총리가 1989년 5월 20일 베이징 군 계엄을 선포하자 바오퉁은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연락해 계엄을 반대하고, 계엄 선포가 전인대 상무위원회를 거치지 않았고, 헌법 심의비준에 따르지 않았음을 질책했습니다. 때문에 덩샤오핑이 군대와 탱크를 동원하기 일주일 전, 즉, 5월 28일 그는 긴급 체포됐습니다.
6·4 후 바오퉁은 중공당국에 의해 ‘국가기밀누설죄’와 ‘반혁명선동죄’로 7년 판결을 받아 친청감옥에 수감됐습니다. 1996년 석방 후에는 당국에 의해 연금상태로 집에 머물렀습니다.
1989년 4월 15일 중국 학생들과 시민들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장장 2개월 동안 민주, 반부패 를 요구했고, 이 시위는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러자 중공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광장에 파견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목격자와 녹화된 영상자료에 따르면, 1989년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 새벽까지 수 천명의 완전 무장한 해방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몰고 천안문 광장으로 돌진했습니다. 당시 서구언론들은 거의 모두 6·4기간에 수천명이 살해됐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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