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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평] 중국공산당의 살인역사

관리자  |  200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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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中共) 정권 수립 55년의 역사는 피와 거짓으로 쓰여진 역사이다. 그 피의 역사는 참혹하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아는 사람도 드물다. 공산당 정권 하에서 중국인들은 6천만 내지 8천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파탄된 가정의 수도 이에 못지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이 무엇 때문에 살인을 하겠는가?’고 의아해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도 여전히 파룬궁(法輪功)수련생들을 살해하고 있으며, 2004년 11월 초 한위안(漢源)에서 항의하는 민중들을 총으로 진압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도 언젠가는 살인을 멈추고 총보다는 대화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총결산하면서 “천하가 크게 혼란해야 천하를 크게 다스릴 수 있으며 7~8년마다 해야한다.(
주석보기)”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7~8년 주기로 또 다시 문화대혁명과 같은 운동을 하고 7~8년 마다 반복하여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살인을 하는 데는 이론적인 근거와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끊임없는 혁명’이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권을 탈취한 후 공산당은 ‘지주를 살해하는’ 방법으로 농촌의 생산관계를 해결하였고, ‘자본가 계급을 살해’하여 상공업 개조(改造)를 완성하고 도시의 생산관계를 해결하였다. 이 두 계급이 모두 제거되고 난 뒤 경제적 기반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공산당은
상부구조`의 문제도 역시 살인을 통해 해결하였다. ‘후펑(胡風) 반당 집단’과 ‘반(反) 우파 투쟁’으로 지식인들을 숙청하였고, ‘회(會)·도(道)·문(門)을 살해’하여 종교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살인으로 점철된 “문화대혁명”을 통해 문화 및 정치분야에서 당의 절대적인 영도권 문제를 해결하였다.

6.4’ 살인으로 정치적인 위기를 모면함과 동시에 민주화 요구를 해결하였고, ‘파룬궁 탄압’으로 신앙과 신체단련 운동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중국 공산당이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고 권력을 수호하는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경제위기(건국 후 물가상승이나 문화대혁명 후의 경제 붕괴 등), 정치위기(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나 당의 권력을 분할하자고 요구하는 사람) 신앙위기(구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공산진영의 급격한 몰락 및 파룬궁 사건)를 처리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반영이다. 파룬궁 사건 이외에 앞의 모든 정치 운동은 모두 중국 공산당의 사악한 영(靈)을 충전하여 혁명투지를 증가시키는 과정이었으며 당 조직을 검열하여 당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당원을 도태시키고 제거한 것이다.

공산당이 살인을 하는 데는 또한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애초부터 무뢰배들과 불한당(
流泯)들의 살인에 의지해 당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살인을 했기에 중간에 손을 뗄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공포를 조성해야 했으며, 인민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과정에서 공산당의 강대한 힘을 받아들이게 해야만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역사상 많은 시기에 공산당이 ‘피동적으로 살인’을 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사회에서 ‘우연’한 사건이 ‘우연’하게 중국 공산당의 사악한 영(靈)과 중국 공산당의 조직적인 살인 메커니즘을 건드린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우연’의 뒷면에 가려진 주기적인 살인은 중국 공산당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필연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처가 나으면 통증을 잊는다.’는 말과 같이 이년 만 살인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이 이제는 좋아졌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심지어 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많은 이상(理想) 을 품었던 청년들처럼 민주화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산당은 7~8년마다 한번씩 살인을 하고 사람들에게 공포의 기억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며 또한 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즉, 누가 만약 공산당과 대립하고 공산당의 절대적인 영도를 부인하며 역사의 진실한 면모를 회복시키고자 한다면, 그는 곧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철권(鐵拳)’의 쓴맛을 본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살인은 중국 공산당이 통치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피의 빚[血債]이 점점 더 많아질수록 도살용 칼을 내려놓는 것은 곧 민중들에게 자신을 맡겨 빚을 청산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은 단지 들판에 시체가 널리고 강물이 피로 물들 정도로 많은 살인을 할 뿐만 아니라 아주 잔인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정권 초기에 더욱 심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민중들이 두려워 떨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인의 목적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누구를 죽이고 죽이지 않을 것인가는 어떠한 이성(理性)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역대 정치 운동 중에서 중국 공산당은 여지껏 모두 ‘집단학살(Genocide)’ 정책을 사용하였다. ‘반혁명 탄압’을 예로 들면 중국 공산당은 반혁명 ‘행위’를 탄압한 것이 아니라 반혁명 ‘분자’를 탄압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국민당 군대에 잠시 있었고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똑같이 죽여 버린다. 왜냐하면 그가 ‘반혁명 역사’에 속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중공은 심지어 ‘풀을 벤 후에 뿌리까지 뽑아내는’ 몰살 방식으로 지주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지주의 가족도 한꺼번에 살해하였다. 1949년 이후 중국에서는 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의 박해를 받아 대략 6천만에서 8천만 명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하였다. 이것은 두 차례 세계 대전의 사망자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이다.

세계의 다른 공산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은 민중들을 대량학살 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진행했으며 그 수단도 매우 참혹했다. 목적은 ‘당성(黨性)’보다 ‘인성(人性)’을 중시하는 당원들을 깨끗이 제거하는데 있었다. 공산당은 이른바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는 전투보루’를 형성하기 위하여 인민을 공포에 떨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원도 위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문화 속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심과 사랑, 생명에 대한 존엄 및 신(神)에 대한 은혜와 감사로 충만 되어 있다. 동양인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慾 勿施於人:『논어』안연(顔淵)제13편)”고 했으며 서양인들은 “타인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Love thy neighbor as thyself. 성경 레위기19:18)”고 말해왔다. 그러나 유독 공산당만은 “지금까지 일체 사회의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주장하며 투쟁(鬪爭)의 ‘투(鬪)’란 한 글자를 유지하기 위하여 인민 속에서 증오를 선동하며 중국 공산당 자신이 살인할 뿐만 아니라 군중을 동원하여 서로 살인하게 하였다. 인민들은 연속적인 살인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고 타인의 고통에 냉담하게 되었으며, 비인간적인 잔인한 폭행 앞에서 습관이 되어 감각이 무뎌졌다. 또한 요행히 폭행을 모면하기만 하면 자신이 가장 운이 좋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참혹한 탄압으로 중국 공산당의 통치를 유지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몇 십 년의 학살 중에서 무수한 생명을 훼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중화 민족의 정신을 파괴했다. 많은 사람들은 참혹한 투쟁 중에서 일종의 조건 반사가 형성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도살용 칼을 들기만 하면 사람들은 즉시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판단력을 포기하며 손을 들고 투항한다.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면 그들의 정신은 이미 죽은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사망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다.


참혹한 학살

마오쩌둥은 정권을 건립하기 전에 “우리는 반동파와 반동계급의 반동행위에 대해 절대로 인정(仁政)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마오쩌둥,『인민민주주의 독재(1949)』)”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잡기 이전부터 ‘폭정(暴政)’할 결심을 하고 거기에 ‘인민민주독재’라는 미명을 붙였던 것이다. 아래에 공산당이 펼친 일부 운동을 보자.


(1) 진반(鎭反)과 토지개혁

중국 공산당은 1950년 3월 『반혁명 분자에 대한 엄격 탄압 지시』를 발표했는데 역사에서는 이것을
진반(鎭反)운동이라고 한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정권을 잡은 후 대사면을 내린데 반해,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도살용 칼을 치켜들었다. 마오쩌둥은 1951년 3월에 발표한 한 문건에서 “아직도 많은 지방에서는 소심하게 겁을 먹고 기치를 높이 들어 반혁명 분자들을 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1951년 2월 중국 공산당 중앙은 저장성(浙江省)과 환난(皖南)지역을 제외하고 또 지시하였다. “기타 살인을 적게 한 지방, 특히 대도시나 중소도시들은 마땅히 계속하여 한 무리씩 붙잡아 살해해야 하며 너무 일찍 중단하면 안 된다.”

또한 “농촌에서 반혁명 분자를 살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마땅히 인구 비례의 천분의 일을 넘어야 한다. …… 도시에서는 일반적으로 천분의 일이 못되게 해야 한다.” 그 당시 중국 인구를 6억으로 계산하면 마오쩌둥의 한마디 말, 이른바 ‘성지(聖旨)’에 따라 적어도 60만 명의 사람들을 죽여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천분의 일’이란 숫자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마오쩌둥의 생각에, 60만 명 정도를 죽이면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규모에 도달한다고 여기어 이런 지표를 하달한 것으로 보인다.

살해당한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는가 하는 이것은 전혀 중국 공산당이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1951년 공포한 『중화인민공화국 반혁명 분자 처벌 조례』중의 규정에는 “유언비어를 전달한 사람도 즉각 살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기세 좋게 타오른 진반 운동과 동시에 ‘토지개혁 운동’ 역시 마찬가지로 사나운 기세로 타올랐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1920년대 말부터 공산당 점령지역에서 이른바 ‘토지개혁’을 시작했었다. 표면적으로는 ‘태평천국’이요, 토지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보였으나 공산당의 진정한 목적은 이런 명분으로 사람을 살해하는데 있었다. 나중에 공산당 서열 제4위까지 오른 공산당 지도자 타오주(陶鑄)의 토지개혁 구호는 “마을마다 유혈이 낭자하고 집집마다 투쟁하는(村村流血,戶戶鬪爭)”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마을마다 지주를 총살하는 것이었다.

본래 토지개혁은 사람을 죽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대만 정부에서 실행한 것처럼 매매하는 방식으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적[土匪] 및 룸펜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출발한 중국 공산당은 ‘약탈하는’ 방법밖에는 몰랐다. 남의 것을 약탈하고는 그들이 원한을 품을까 두려워 화근을 잘라버리기 위하여 아예 몰살시켰던 것이다.

토지개혁 당시 가장 흔한 살인 방법은 투쟁회(鬪爭會)였다. 지주나 부농들에게 없는 죄명을 날조하여 뒤집어 씌우고는 군중들에게 어떻게 할지를 묻는다. 그러면 군중 속에 배치된 공산당원이나 또는 열성분자들이 ‘죽여라!’하고 구호를 외친다. 이런 다음 지주와 부농들을 그 자리에서 처단한다. 당시 농촌에서 땅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
패(霸)’라고 인정되었다. 평상시에 백성들을 못살게 군 지주는 ‘악패(惡覇)’, 늘 길과 다리를 수리하고 이재민들을 돕는 사람은 ‘선패(善覇)’라고 했으며, 아무것도 안 했으면 ‘불패(不覇)’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실제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패(霸)’도 결국은 모두 같은 처분, 즉 현장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공포에 의하면, 1952년말까지 소멸된 ‘반혁명 분자’가 2백4십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살해당한 인원은, 국민당 현장(縣長)이하 지방 갑장(甲長) 등 공무원 및 지주를 포함하여 최소한 5백만 명 이상이다.

이런 진반과 토지개혁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과거 중국의 기층 권력 조직은 기본적으로 향촌의 종족자치였으며 향의 신사(紳士) 계층은 지방자치의 수령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진반과 토지개혁을 통해 기존 체계의 관리인원을 몰살시키고 촌마다 공산당 지부를 만드는 것을 실현하여 농촌을 전면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토지개혁과 진반을 통하여 대량의 돈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
지주 부농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통해 백성들을 두려워 떨게 하는 목적에 도달하였다.


(2) ‘3반(反)’과 ’5반(反)‘

진반과 토지개혁이 주로 농촌 기층을 상대로 했다면 연이은 ‘3반’, ‘5반’ 운동은 곧 도시에서 벌어진 학살 운동이다.

‘3반(反)’은 1951년 12월 중공 내부의 부패간부를 겨냥하고 전개한 것으로, ‘반(反) 탐오(貪汚), 반 낭비, 반 관료주의’ 운동이었다. 당시 부패한 간부들을 처치했을 뿐만 아니라 잇따라 간부들을 부패하게 만든 것은 모두 자본가들이 유혹한 결과라고 여긴 공산당은 그 다음 해 일월부터 ‘5반’을 시작하였다. 즉, ‘반 뇌물증여, 반 탈세(脫稅), 반 국가재산절도, 반 부실공사, 반 국가경제정보절취’ 등 5가지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5반’은 실질적으로 자본가의 돈을 약탈한 것으로 심지어 재산을 빼앗기 위해 목숨까지 해친 것이다. 당시 상하이 시장 천이(陳毅)는 매일 저녁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고는 한가하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고 한다. ‘오늘 낙하산은 몇명이지?’ 이 질문의 실질적인 의미는 얼마나 많은 상인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렸는가 하는 것이다. ‘5반’ 운동에서 거의 모든 자본가들은 액운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반 탈세’의 경우
광서(光緖)연간 상하이 개항 때부터 계산을 하니 자본가들은 재산을 몽땅 바쳐도 ‘세금’을 다 갚을 수 없었다. 죽고 싶어서 황포강(黃浦江)에 뛰어들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신을 찾지 못하면 홍콩으로 도망갔다고 하여 가족들에게 계속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건물에서 뛰어 내려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공산당이 시체를 보고 더 이상 박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시 상하이시에서는 고층 건물 양쪽 길로는 누구도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위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에게 압사(壓死)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중국 공산당 중앙 당사(黨史) 연구실 등 4개 부문이 연합하여 편집한 『건국이후 역사정치 운동 사실』보고에 의하면 ‘3반’, ‘5반’ 중에 32만3천1백여 명이 체포되어 280여 명이 자살 혹은 실종되었다고 한다. 1955년 반후펑(反胡風) 운동 중에는 5천여 명이 연루되어 5백여 명이 체포되고 60여명이 자살했으며 12명은 비정상적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숙반(
潚反)’ 운동 중에 2만천여 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4천3백여 명이 자살 혹은 실종되었다.


(3)대기근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운동은 이른바 ‘대약진’ 후의 대기근이다. 1994년 2월 홍기(紅旗) 출판사에서 출간한 『중화인민공화국 역사기록』 ‘대기근’ 관련 문장에서는 “1959~1961년 비정상적인 사망과 출생 인구의 감소는 대략 4천만 명 정도다. …중국인구가 4천만 명이나 감소했는데 아마도 금세기 최대의 기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이 대기근을 ‘3년간의 자연재해’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실제로 3년간 기후는 순조로웠으며 큰 홍수나 가뭄, 회오리바람, 해일, 지진, 서리, 추위, 우박, 해충 등 대규모 자연재해는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대기근은 철저한 인재(人災)였다. ‘대약진’ 때 강철을 만든다고 전 인민을 동원하는 바람에 농촌에서는 곡식을 거둘 일손이 없어서 그대로 썩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국 각지에서는 공산당 지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역별 벼 생산량 ‘신기록 경쟁’이 불붙었다. 류저우(柳州)지역 공산당위원회 서기 허이란(賀亦然)은 심지어 일방적으로 환장현(環江縣)의 벼 생산량이 한 무(畝)당 무려 13만 근이라는 기사를 조작하였다. 마침 루산(廬山)회의 이후 중국 공산당이 전국적으로 ‘반(反)우경’을 하고 있을 때라 공산당의 일관된 정확성을 관철하기 위하여 전국에서는 허위 보고한 대로 식량을 바쳐야 했다. 결국 농민들의 식량, 종자, 사료까지 몽땅 징발하였다. 그렇게 해도 양이 부족하자 농민들이 식량을 숨겼다고 모함하였다.

허이란은 “류저우 지역에서 설령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더라도 전국 제일을 쟁취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농민은 집에 있던 곡식을 몽땅 빼앗겨 오줌통에 감춰둔 몇 줌의 곡식밖에 남지 않았다. 환장현 쉰러구(馴樂區) 위원회에서는 농민들에게 식량이 있어도 먹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음식을 해먹지 못하도록 ‘불씨를 없애고 솥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병(民兵)들이 야간에 순찰하다가 불빛만 보이면 집을 수색하고 사람을 체포하였다. 수많은 농민들은 채소와 나무껍질조차도 감히 익혀 먹지 못했으며 산채로 굶어죽었다.

과거에 대기근이 발생하면 관에서는 죽을 끓여주는 죽청(粥廳)을 설치하여 창고를 개방하고 곡식을 풀어 구휼하였으며, 난민들에게 살길을 찾아 멀리 이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난민들이 이주하면 ‘공산당의 위신(威信)’이 내려간다며 민병을 파견하여 향촌의 길을 막고는 굶주린 난민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기아에 시달린 사람들이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서 식량창고의 양식을 꺼내면 총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총에 맞아 죽은 난민들은 반혁명분자로 모함하였다.

당시 간쑤(甘肅), 산둥(山東),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쓰촨(四川), 광시(廣西) 등 많은 성(省)에서 기아에 굶주린 난민들의 시체가 온 들판에 깔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에 지친 농민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수리(水利)사업’, ‘대규모 강철 제련’ 등 강제노역을 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나중에는 사람이 죽어도 묻을 기력마저 없었으며 많은 마을에서는 가족이 모두 죽은 폐가(廢家)가 속출하였다.

중국 역사상 기근이 가장 엄중했던 시기에 일찍이 ‘자식을 식량과 바꾼’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 공산당이 통치한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시신을 가르고 삶아서 먹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지역에서 기아를 피해 온 난민을 잡아먹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도 잡아먹었다.

“한 농가에서 마지막에 아버지와 아들, 딸 셋만 남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딸을 문밖으로 내쫓은 후 한참이 지나 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남동생이 없어졌다. 솥에는 하얀 기름기 있는 물건이 있었고 솥 옆에는 뼈가 한 무더기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또 솥에다 물을 붓고는 딸을 불렀다. 딸은 놀라서 문밖으로 도망치면서 울며 애걸하였다. ‘아빠 저를 잡아먹지 마세요. 제가 아빠를 위해 나무 하고 불도 지피는데 저를 잡아먹으면 아빠를 위해 일을 해줄 사람도 사라집니다.”(작가 사칭(沙靑)의 보고 문학 『아득한 대지만(依稀大地灣)』중에서)

이러한 반 인륜적인 비극이 얼마나 많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무수한 반 인륜적 비극을 만든 죄악의 우두머리 중국 공산당이 인민을 인도하여 자연 재해를 극복했다고 찬송하면서 공산당은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하다.’고 했음을 알고 있다. 1959년 루산회의 때는 인민을 위해 바른 말을 한 펑더화이(彭德懷)가 숙청당했으며 진실을 말한 많은 공산당 간부들도 파직되거나, 감금되고, 심사 당했다. 그리하여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더 이상 진실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이 굶어죽는 진상을 은폐하였다. 심지어 간쑤성의 경우 산시성(陝西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식량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부족하지 않다는 구실로 거절해 버렸다.

이 대기근은 또한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한 차례의 검열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표준에 따른다면 이런 간부들은 모두 합격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어도 바른 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인정(人情)이나 천리(天理)도, 그들이 당을 따르는데 있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기근 후 잘못을 저지른 성(省)급 간부들은 형식적인 검토를 거쳐 일을 마무리지었다. 쓰촨에서 몇 백만 명을 굶어 죽인 성위원회 서기 리징취안(李井泉)은 심지어 다시 발탁되어 공산당 서남국(西南局)의 제일 서기로 선임되기도 했다.


(4) 문화대혁명, 6.4부터 파룬궁까지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 기간을 중국 공산당도 ‘10년 대재앙[浩劫]’ 이라고 부른다. 후야오방(胡耀邦)은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약 1억 명이 연루되었는데 중국 인구의 10분의 일을 차지합니다.’라고 말했다.

중공(中共) 중앙 당사연구실 등에서 편집한 『건국이후 역사정치 운동 사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84년 5월 중국 공산당 중앙이 2년 7개월간의 전면적인 조사와 사실 확인 및 새로 통계한데 따르면 문화대혁명 당시에 420만 명이 체포되어 심사 받았으며, 172만8천여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고, 13만5천여 명이 현행 반혁명 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무장투쟁에서 23만7천여 명이 사망했고 703만여 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7만천2백여 가정이 완전히 훼멸되었다.”

사람을 때려죽인 것 외에도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에서는 자살 열조가 나타났다. 많은 저명한 지식인, 예를 들면 라오서(老舍), 보레이(傅雷), 젠버짠(翦伯贊), 우커우(吳口), 추안핑(儲安平) 등은 모두 문화대혁명 초기에 자살의 길을 걸었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중국 역사상 ‘좌경’이 가장 광분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살인은 대개 혁명성을 과시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계급의 적’에 대한 살인은 지극히 참혹하고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개혁 개방’은 정보 전달에 거대한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해외의 많은 기자들이 베이징에서 직접 1989년의 6.4 유혈사건을 보았으며 탱크가 학생을 쫓아가 몸을 짓뭉개고 피투성이로 만든 도살 장면을 녹화하여 해외 텔레비전에서 방송하였다. 10년 후, 장쩌민은 1999년 7월 20일 파룬궁 탄압을 시작하였다. 2002년 연말 대륙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7천여 명이 각지 구류소, 노교소,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참혹하게 치사 당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7명의 수련생을 학살한 셈이다.

지금 중국 공산당이 살인하는 숫자만 본다면, 걸핏하면 백만 내지 천만 명을 죽였던 과거보다 심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사실상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하나는 인민들이 중국 공산당의 당문화에 이질감을 느껴 더욱 냉소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 가지는 중국 공산당의 거대한 횡령과 국고 도용으로 이미 중국 경제가 수혈(輸血)형 경제로 되어 외래 자본이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사회 안정을 보증하는 중요한 지주(支柱)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6.4 이후에 서방국가들이 취한 경제제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 시기에 공개적으로 살인을 한다면 외국 자본이 겁에 질려 철수할 것이며 결국 공산당 통치에도 위협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암암리에 하는 살인은 멈추지 않았으며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피의 흔적을 극력 은폐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극히 잔인한 살인수단

중국 공산당이 하는 일체는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공산당에게 있어 살인은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인 바, 살인방법이 잔인하고 살인한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인민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인민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은 항일전쟁시기 및 심지어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1) 항일전쟁시기의 화베이(華北) 폭행

전(前) 미국 대통령 후버(Hoover)는 레이몽 드 재거(Raymond De Jaegher) 신부의 저서 『내재하는 적(Enemy Within)』을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 책은 공산주의의 테러진상을 공개적으로 폭로한 책입니다. 나는 이런 사악한 세력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레이몽 신부는 이 책에서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폭력을 사용하여 민중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지 일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어느 날 중국 공산당은 모두 마을 광장에 모이라고 했으며, 어린이들도 교사 인솔 하에 데려 갔다. 목적은 그들에게 13명의 애국 청년들의 참수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일부 날조된 죄상을 낭독한 후, 공산당은 놀라서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 교사에게 명령하여, 아이들을 인솔하여 애국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도록 시켰다. 노래하는 중간에 튀어나온 사람은, 춤추는 연기자가 아니라 손에 큰 칼을 든 망나니였다.

망나니는 흉악하게 생긴 젊은 공산당 병사로 팔 힘이 센 자였다. 그는 최초 희생자의 뒷편에 서서 두 손으로 넓고 잘 드는 큰 칼을 들고는 번개같이 휘둘렀다. 소리와 함께 희생자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자 머리가 구르면서 선혈이 솟구쳤다. 어린이들의 불안한 노랫소리가 시끄러운 비명소리와 울음으로 변했다. 교사들은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계속 불러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했고, 혼란 속에서 나는 또 종소리를 들었다.

망나니는 연속 13번이나 큰 칼을 휘둘러 13명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의 병사들이 함께 손을 써서 죽은 자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도려내 숙영지에 가서 먹어 치웠다. 이 모든 폭력은 모두 아이들 앞에서 벌어졌고 아이들은 놀라서 얼굴이 백짓장처럼 되었으며 몇몇은 구토하기 시작하였다. 교사들은 병사들을 비난하는 한편 아이들을 집합시켜 학교로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레이몽 신부는 어린이들이 강요에 의해 살인 장면을 관람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어린이들이 이런 살인 장면에 익숙하게 되어 무감각해지거나 심지어 자극적인 쾌감을 느낄 때까지 계속 이렇게 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살인이 더 이상 공포적인 자극을 줄 수 없다고 느끼면 각양각색의 혹형(酷刑)을 발명하였다. 예를 들면 강제로 대량의 소금을 먹게 한 다음 피해자가 목이 말라 죽을 때까지 물을 한 방울도 주지 않는 고통을 가한다. 다른 한 가지 혹형은 옷을 전부 벗기고 깨진 유리 파편 위에 뒹굴게 하는 형벌을 가한다. 또 다른 혹형으로는 한겨울에 얼음이 언 강에서 얼음에 구멍을 내고 피해자를 얼음 구멍에 집어넣는데 얼어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산시성(山西省)의 한 공산당원은 아주 무서운 형벌을 발명하였다. 어느 날 식당 문 앞에 서서 밥 끓이는 큰 가마솥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는 몇 개의 큰 가마솥을 주문했다. 즉시 반공(反共)인사를 붙잡아 와서는 간단한 심문과 동시에 솥에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심판이 끝나자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옷을 벗겨 끓는 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산채로 끓는 물에 삶아 죽인 것이다. …… 핑산(平山)에서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산채로 피부가 벗겨져 죽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공산당은 아들을 핍박하여 직접 두 눈으로 이 참상을 보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부친이 고통스런 신음 속에서 죽는 장면이나 중국 공산당이 아이 아버지의 몸에 식초와 산(酸) 등의 물질을 발라 인피(人皮)가 재빨리 벗겨지게 하는 장면을 보게 했다. 처음에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두 팔 및 전신의 피부를 벗겼다. 전신의 껍질을 벗기자 머리가죽만 남았는데, 아이 아버지는 전신의 피부가 벗겨진 후 몇 분 만에 사망하였다.


(2)‘붉은 8월’ 적색테러와 광시(廣西) 식인(食人) 사건

중국 공산당은 강산을 차지한 후에도 폭행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으며 문화대혁명 때 폭력은 가일층 발전되고 확대되었다.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서 ‘홍위병’ 대표를 접견하였다. 쑹런총(宋任窮)의 딸인 쑹빈빈(宋彬彬)이 마오에게 ‘홍위병’ 완장을 달아주었다. 마오는 쑹의 이름이 ‘문채날 빈(彬)’임을 알고 나서 “
무(武)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쑹(宋)은 이때부터 이름을 쑹야오우(宋要武)로 개명하였다.

들판을 태우는 불꽃과도 같이 ‘무장 투쟁’은 곧장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무신론(無神論)으로 교육한 젊은 세대들은 그 어떤 고려와 두려움도 없이 공산당의 직접적인 지도 하에 마오쩌둥의 지시를 법으로 삼았다. 그들은 광란, 우매함 속에서 무법천지로 날뛰면서 중국 전역에서 사람을 구타하고 집을 수색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많은 지방에서 ‘검은 5부류’ 즉, 지주, 부자, 반동, 악인, 우파를 뿌리 뽑는 말살 정책을 실행하였다. 다싱현(大興縣)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였다.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현(縣)내 13개 공사(公社)와 48개 대대(大隊)에서 325명을 살해했는데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80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태어난 지 겨우 38일 된 갓난아기였다. 또한 22가구는 가족 전원이 몰살을 당했다.

“사람을 산채로 때려죽이는 것은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어서 이상한 일로 치지도 않는다. 사탄가(沙灘街)에서 한 무리의 남자 ‘홍위병’들이 쇠사슬과 혁대로 한 할머니를 때려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한 여자 ‘홍위병’이 할머니의 배를 짓밟았는데 숨을 거둘 때까지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다. …… 이번 활동 중에서 베이징의 충원먼(崇文門) 부근 한 지주노파의 집을 수색할 때 부근에 사는 주민들을 강제로 핍박하여 집집마다 끓인 물을 보온병에 담아 오게 하여 이 할머니의 목에 붓게 하였다. 살이 익을 때까지 잔인한 형벌을 가하도록 했다. 며칠 후 집안에 있던 시신에서는 구더기가 많이 기어 다녔다.…… 당시 살인방식은 천태만상이었다. 몽둥이로 때려죽이기, 작두로 작두질하기, 노끈으로 졸라매기 등이 있었다. 어린이에 대해선 더욱 잔인하여 한쪽 다리를 발로 밟고 다른 다리를 잡아당겨 강제로 아이를 두 동강 내기도 했다.” 『우뤄원(遇羅文)의 다싱 학살 조사』

다싱 학살보다 더 야만적인 것은 광시(廣西)에서 벌어진 식인(食人) 사건이 있다. 정이(鄭義)는 이 과정을 3단계로 분류하였다.(
주석)


시작 단계:이 시기의 특징은 몰래 숨어서 테러적인 음침한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모 현(縣)의 사건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심야에 살인 흉악범들이 살인 현장에 도착하여 죽은 사람의 배를 가르고 심장과 간(肝)을 꺼냈다. 당황하고 혼란한 데다 경험도 없어서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꺼내놓고 보니 폐(肺)였다. 할 수 없이 또 다시 벌벌 떨면서 갔다.……다 익자 어떤 사람은 술을 가져오고 어떤 사람은 소금 등을 가져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먹기 시작하였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

고조(高潮) 단계: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대대적으로 행한다. 이 기간에는 심장과 간을 도려내는데 상당한 경험이 쌓였고 또 인육(人肉)을 먹은 경험이 있는 노(老) 유격대원의 전수로 기술이 아주 숙련되었다. 예를 들면 산채로 배를 가르는데 갈비뼈 연골 부위에 칼로 人 자 모양으로 가른 다음 발로 배를 밟으면서(살해당한 사람이 나무에 묶여 있으면 무릎으로 배를 누른다) 심장과 간을 동시에 꺼낸다. 두목이 심장과 간, 생식기를 가져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대로 가져간다. 붉은 기는 휘날리고 구호를 높이 외치는데 장면이 성대하고 웅장하다. ……

군중 광란 단계: 그 특징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사람을 잡아먹는 대중 운동이다. 예를 들면 우쉬안(武宣)에 큰 돌림병이 발생했을 때, 시체를 먹어 눈이 빨개진 개떼처럼 사람들은 끝내 미친 듯이 인육을 먹었다. 한 무리 사람들을 끌어내서 이른바 ‘비판 투쟁’한 후 매 비판마다 죽인 사람을 먹었다. 사람이 쓰러지면 숨이 붙어있는지 개의치 않고 사람들이 한 무리씩 덤벼들어 사전에 준비한 칼과 비수로 닥치는 대로 살을 벤다.……이렇게 일반 군중들마저 인육(人肉)을 먹는 운동에 휘말려 들어갔다. 이전에 남아있던 죄책감이나 인간성은 이미 ‘계급투쟁이라는 초대형 태풍’에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사람을 잡아먹는 돌림병이 우쉬안 대지에 몰아쳤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인육 파티’까지 있었다. 사람 고기, 사람 심장과 간, 사람 허리, 사람 팔목, 사람 발, 사람 발의 인대……볶고, 삶고, 불에 굽고, 기름에 지져 아주 성대한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면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인육을 먹는 극성기에는 심지어 최고 권력 기구인 우쉬안현(武宣縣) 혁명위원회 식당에서조차 인육(人肉)을 삶아먹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는 이렇게 인육을 먹는 파티는 절대로 민간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독재권력 조직인 중국 공산당이 사회를 통제하여 사회의 매 세포까지 스며들었기에, 중국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부추기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 가사에 ‘낡은 사회는 사람을 귀신으로 만들었지만 새로운 사회는 귀신도 사람으로 만든다네.(
주석)’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성대한 인육 파티는 중국 공산당은 사람을 승냥이나 마귀로도 변하게 할 수 있음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공산당 자체가 승냥이나 마귀보다 더 흉악하고 잔혹하기 때문이다.


(3)파룬궁(法輪功) 박해

중국인들도 전자(電子) 시대 및 우주 비행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사사로이 인권문제와 자유, 민주를 담론할 수 있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머리칼이 곤두서고 역겨운 그런 극심한 폭력은 이미 과거의 일이며 중국 공산당도 문명의 외투를 걸치고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한 단체가 그것들의 혹형과 학살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자 중국 공산당은 더욱 미친 듯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이런 식으로 박해를 받아 온 단체가 바로 파룬궁(法輪功 Falun Gong)이다.

만약 홍위병의 무장 투쟁과 광시성의 사람 잡아먹기가 상대방의 육체를 소멸하는 것이 목적이라 몇 분 내지 몇 시간 만에 한 생명을 끝내는 것이라면, 이에 반해 파룬궁 수련자를 박해하는 목적은 수련생들에게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라는 것으로 잔인한 혹형은 며칠, 몇 달, 심지어 몇 년씩 계속되는 것이다. 만 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이로 인해 생명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죽음의 고비를 구사일생으로 넘기고 살아남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몸에 가해진 백가지가 넘는 혹형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 혹형사례들을 살펴보자.

악독한 구타는 파룬궁 수련생을 학대할 때 가장 상습적으로 쓰는 방법이다. 경찰과 감방 두목이 직접 때리거나 다른 잡범들을 시켜 때리게 한다. 어떤 수련생은 구타로 귀가 멀고 귀가 떨어져 나갔으며 눈이 튀어 나오고 이빨이 부러졌다. 두개골, 척추, 가슴뼈, 허리, 손발이나 팔다리의 뼈가 구타로 골절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외에 남자 수련생의 생식기를 꽉 움켜쥐거나 여자 수련생의 음부를 발로 차기도 한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으면 연달아 혹형을 가하여 가죽이 찢어지고 살이 터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든다. 나중에는 얼굴이 변형되어 피투성이가 된다. 그런 후 소금물을 몸에 뿌리고, 고압 전기충격기로 온몸을 지져 피비린내와 살이 타는 냄새가 동시에 코를 찌르고 신음소리는 심장이 터지고 폐가 갈라지는 듯하다. 폭행하는 한편 비닐 주머니를 머리에 씌워 숨을 쉬지 못하게 하면서 수련자들에게 질식의 공포 속에서 굴복할 것을 강요한다.

전기고문도 중국 노교소(
勞敎所)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사용하는 보편적인 혹형의 한 가지이다. 경찰은 전기충격기로 수련생들의 민감한 부위를 가격한다. 즉, 입안, 정수리, 앞가슴, 음부, 여자 수련생들의 유방과 남자 수련생들의 생식기, 엉덩이, 넓적다리, 발바닥 등인데 어떤 자들은 온몸을 전기로 감전시키기도 한다. 여러 개의 전기충격기를 동시에 사용하여 피부가 타고 살이 익을 때까지 한다. 이 때문에 살이 타는 냄새를 도처에서 맡을 수 있으며 상처는 시꺼멓게 변한다. 어떤 때는 머리와 항문에 동시에 전기를 통과시킨다. 경찰은 동시에 10개의 전기충격기 혹은 그 이상 여러 개의 충격기를 사용하여 오랜 시간 폭행을 가하기도 한다. 전기충격기는 보통 몇 만 볼트에 달한다. 연속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때는 파란 불이 튀고 귀를 자극하는 “파파”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전기로 몸에 혹형을 가할 때는 불에 탄 것과 같고 뱀에 물리는 느낌이다. 매번 전기로 감전시킬 때면 뱀에게 물린 것처럼 아프다. 감전된 피부는 붉게 변하고 파손되거나 타서 고름이 흘러내린다. 머리를 가격할 때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치는 느낌이다.

그 외에 담뱃불로 손이나 얼굴, 발바닥, 가슴, 등, 유두(乳頭) 등을 지지거나 라이터로 손이나 음모(陰毛)를 태운다. 또한 전기난로에 벌겋게 달군 쇠를 두 다리에 놓고 지지거나, 벌겋게 달아오른 석탄 덩어리로 수련생의 얼굴을 지진다. 심지어 혹형을 받아 생명이 위험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수련생을 산채로 태워 죽이고는 외부에는 ‘분신자살’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전문적으로 여자 수련생의 앞가슴, 유방, 하반신을 악독하게 때리거나 강간, 윤간하며 전기충격기로 유방과 음부를 지진다. 라이터로 유방을 태우고 전기충격기를 음부(陰部)에 집어넣거나 4개의 칫솔을 한데 묶어 여자 수련생의 생식기에 넣고 돌리기도 한다. 불로 음부를 태우고 여자 수련생의 두 손을 뒤로 묶고 전깃줄을 젖꼭지에 연결하여 전기 고문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여자 수련생들을 발가벗겨 남자 감방에 집어넣고 죄수들이 마음대로 모욕하게 한다.

‘공포의 약속의(約束衣)’라는 옷을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입히고 수련생의 팔을 뒤로 힘껏 당겨 교차하여 묶은 다음 두 팔을 어깨 너머 앞가슴까지 끌어온 후 또 두 다리를 묶어 쇠창살문에 달아맨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아 파룬궁을 모욕하는 녹음을 강제로 듣게 하고, 입은 천으로 틀어막는다. 이 형벌을 받으면 두 팔은 즉시 불구가 되고 우선 어깨, 팔꿈치, 손목 부위의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진다. 이 형벌을 오래 받는 사람은 척추가 모두 부러져 산채로 고통스럽게 죽는다. 허난성(河南省) 스바리허(18里河) 여자 노교소에서 4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이 옷을 입혀 잔혹하게 살인하였다.

또 다른 혹형으로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더러운 물이나 똥물에 담가 놓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물감옥’이라고 한다. 다른 고문으로는, 예를 들자면 손톱 밑을 대나무 꼬챙이로 찌르기, 천정, 바닥과 벽에 온통 적색, 녹색, 황색, 백색의 곰팡이가 피는 감방에 가두고 사나운 개나 독사 및 모기로 물게 하기.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을 주사하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다양하고 기괴한 방법으로 수련생들을 괴롭힌다.


잔혹한 당내 투쟁

공산당은 당성(黨性)에 의거하며 도의(道義)적으로 결합한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최고 지도자에 대한 당원 및 당 고급간부들의 충성심이 어떠한가가 문제로 된다. 그러므로 당내에서도 살인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최고 독재자가 누구를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내부 투쟁은 아주 유명하다. 러시아 공산당의 경우 처음 두 차례 공산당 정치국 위원을 지낸 사람들은 레닌이 병으로 죽은 후, 스탈린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되거나 자살했다. 또 당시 5명의 군(軍) 원수(元帥) 중에서 3명이 총살되었으며, 5명의 최고 군사령관 중 3명이 총살당했고, 2급 군사령관 10명은 전원이 총살당했다. 85명의 군단장 중 57명이 총살당했고 195명의 사단장 중에서 110명이 총살당했다.

중국 공산당도 일관적으로 ‘참혹한 투쟁, 무정(無情)한 타격’을 주장해 왔다. 이런 투쟁과 살인은 단순히 당외(黨外)를 겨냥한 것만이 아니다. 일찍이 장시(江西)에 있을 때, 중국 공산당은 AB단(團)을 죽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에는 전투를 할 만한 사람이 몇 남지 않았다. 옌안(延安) 시기 정풍(整風)활동, 정권을 잡은 후 가오강(高崗), 라오수스(
饒漱石), 후펑(胡風), 펑더화이(彭德懷)를 숙청했으며, 줄곧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공산당 내부의 원로 당원들은 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 중국 공산당 역대 총서기들도 뒤끝이 모두 좋지 않았다.

류샤오치(劉少奇) 전(前) 국가주석은 일찍이 마오쩌둥에 이어 중국의 제2인자로 군림했으나 아주 비참하게 일생을 마쳐야 했다. 그의 70세 생일 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특별히 왕둥싱(汪東興)을 시켜 류샤오치에게 생일 선물로 라디오를 주었다. 목적은 그에게 공산당 제8기 12중 전회(全會)의 다음과 같은 공식보고[公報]를 듣게 하려는 것이었다. “반역자, 내부 간첩, 노동자의 적 류샤오치를 영원히 출당시키고 계속해서 류샤오치와 그 동료들의 반당(反黨), 반국가(反國家) 죄행을 청산하자!”

류샤오치는 당시 정신적인 충격으로 단번에 무너졌다. 그날부터 그의 병은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장기간 침대에 고정적으로 묶여 있어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목, 등, 엉덩이, 발뒤꿈치 부위에는 고름이 흐르는 욕창(팂瘡)이 생겨 통증을 참기 힘들었다. 그가 통증이 너무 심하면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으므로, 그를 지키던 자들이 그의 손에 단단한 플라스틱 병을 쥐여주었다. 그가 죽을 때 양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플라스틱 병은 마치 조롱박처럼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었다고 한다.

1969년 10월 류샤오치의 온몸은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풍겼고 장작처럼 말라 약간의 숨만 붙어 있었다. 당에서 특파한 요원이 목욕은 커녕 몸조차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못하게 했다. 도리어 그를 발가 벗겨서 이불에 둘둘 말아 비행기에 태워 베이징에서 카이펑(開封)까지 싣고 가서는 견고한 토치카 형태의 지하실에 가두어 놓았다. 그가 고열로 괴로워할 때면 약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사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죽을 때, 류샤오치는 이미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헝클어진 백발머리는 두 자나 자라있었다. 이튿날 밤 열성 전염병 환자라고 화장하면서 그의 이불, 옷들을 몽땅 불에 태워버렸다. 류의 사망기록카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성명 : 류웨이황(劉韋黃), 직업:무직, 사인:병사(病死)

공산당은 이렇게 당당한 국가 주석마저도 박해하여 죽일 수 있으며, 게다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일 수 있다.


혁명수출과 해외 살인

국내와 당내 살인을 신바람 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한 것 외에도 중국 공산당은 혁명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해외 화인(華人)을 살해하는데 참여하였다. 크메르루주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에서 단 4년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975년에서 1978년 까지 인구 800만도 되지 않는 작은 국가에서 200만 명을 학살했으며 그중에는 중국인 20만 명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시 크메르루주의 죄행을 낱낱이 밝히기에 앞서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폴 포트(Pol Pot 1925~1998)는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숭배자였다. 그는 1965년부터 4차례나 중국에 와서 직접 마오쩌둥의 교시를 들었다. 1965년 11월, 폴 포트가 3개월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천보다(陳伯達)와 장춘차오(張春橋) 등이 그에게 “정권은 총끝에서 나온다.”고 알려주면서,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의 이론과 경험을 소개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그가 정권을 탈취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다스린 바탕이 되었다. 캄보디아로 돌아간 후, 그는 원래의 당을 캄보디아 공산당이라고 개명하고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혁명근거지를 건립하였다.

1968년 캄보디아 공산당은 정식으로 군대를 만들었다. 1969년 말 군사는 3천명 밖에 안 되었으나 1975년 진볜(金邊)을 공격할 때는 이미 “우수한 장비와 용감한 작전을 펼치는” 8만의 무장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중국 공산당의 지지에 의한 것이었다. 왕셴건(王賢根)의 『월남지원과 반미항전 실록』 기록에 의하면 1970년 중국은 폴 포트의 3만 부대에게 무기와 장비를 지원해 주었다. 1975년 4월 폴 포트는 캄보디아 수도를 공략했으며, 두 달 후에는 베이징에 와서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크메르루주의 살인은 중국 공산당의 이론과 물질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예만 들겠다. 시아누크 국왕의 두 아들이 캄보디아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후 저우언라이의 한 마디 말에 캄보디아 공산당은 시아누크를 순순히 베이징으로 보냈다. 캄보디아 공산당은 살인할 때 뱃속의 태아조차 죽여 버린다. 앞으로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우언라이의 요구에 대해서는 두말없이 집행한 것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한 마디가 시아누크를 구하긴 했으나, 캄보디아 공산당이 20만 화인을 도살할 때 중국 공산당은 한 마디 항의도 없었고 화인들이 중국 대사관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대사관은 수수방관하면서 상관하지 않았다. 1998년 5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인(華人) 학살과 강간에 대해서도 중국 공산당은 아무 말도 없었고 구원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중국 내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소식을 봉쇄하였다. 마치 해외 화인들의 생사는 중국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인도적인 원조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가정파괴

중국 공산당이 역대 운동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우리는 정확한 통계를 낼 방법이 없다. 민간에서는 자료부족, 지리, 민족, 언어의 차이 때문에 근본적으로 통계를 낼 방법이 없다. 중국 공산당 또한 이렇게 자기 무덤을 파는 통계는 더욱이 진행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은 영원히 자신의 역사에 대해 ‘대강만 알고 세밀하게 조사하지 않는’ 방법을 쓰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해친 가정의 숫자는 더욱 알기 힘들다. 어떤 경우는 한 사람이 죽음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었다. 어떤 집은 한명 한명씩 전부 다 죽임을 당했다. 설사 사망자가 없더라도 강제로 이혼시키거나 부모 자식 간에 협박에 의해 경계선을 긋거나, 사람을 불구로 만들거나 미치게 하고, 사람을 괴롭혀 중병을 얻게 하여 요절시킨 경우 등이 있다. 이런 것들도 역시 고통스런 가정의 비극이지만 이와 관련된 통계는 더욱 적다.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중국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의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이 훼멸시킨 가정은 적어도 일억이 넘을 것이다.

장즈신(
張志新) 여사는 그녀에 대한 보도를 통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고문과 윤간, 정신적 시달림을 받았으며 최후에는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칼로 기도를 절단당한 다음 총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이 한차례 비극의 배후에는 더욱 잔인한 이야기가 있다.──『사형수 가족의 학습반』

장즈신의 딸 린린(林林)은 1975년 초봄에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선양(瀋陽)법원의 사람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당신의 모친은 매우 반동적이고 개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위대한 지도자 마오(毛) 주석을 완고하게 반대하며, 백전백승의 마오쩌둥 사상을 반대하고, 마오 주석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을 반대하여, 수많은 죄를 지었다. 정부에서는 형벌을 가할 생각인데 만약 극형으로 처리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 나는 놀라서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억지로 진정하면서 눈물을 참았다. 전에 아버지가 “남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어머니와 경계선을 잘 가르지 못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를 대신해서 대답하셨다. “만약 확실히 그런 정황이라면 정부가 어떻게 처리해도 상관없습니다.”
법원 사람이 또 묻기를 “극형으로 처리하면 시체를 가져갈 것인가? 장즈신의 옥중 물건들은 당신들이 가져갈 것인가?” 내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자 아버지가 대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현(縣) 초대소에서 나오자마자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하여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간신히 집으로 오셨다. 밥도 하지 않고 집에 남은 옥수수 떡 하나를 두 조각내서 나와 동생에게 주시면서 “먹고 빨리 자거라”라고 하셨다. 내가 조용히 바닥에 누워있자 아버지는 혼자 작은 의자에 앉아 등불 아래에서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셨다. 이윽고 아버지는 우리가 잠이 들었다고 여기셨는지 천천히 일어서서 선양에서 가지고 온 상자를 여시고는 어머니 사진을 꺼내 보셨다. 사진을 보시던 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단번에 아버지 품에 안겨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나를 다독거리시면서 “이러지 말거라. 옆집에서 들으면 안 된다.” 울음소리에 동생도 깨어나자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품에 힘껏 끌어 안으셨다. 이날 저녁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르지만, 마음껏 소리 내어 울진 못했다.」

모(某) 대학의 한 교수는 행복한 가정이 있었으나, 우파(右派)를 바로 잡을 때 그의 가정은 큰 재앙을 만났다. 그의 처는 원래 반(反)우파 시기에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우파로 몰리면서 먼 변방으로 추방당해 수많은 고생을 하였다. 젊은 처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이 교수에게 시집을 왔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그녀의 애인이 온갖 고생을 겪은 끝에 고향에 돌아오게 되자, 이미 몇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자신의 무정(無情)함과 애인에 대한 배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재 남편과 이혼하고 새롭게 양심의 죗값을 치르려 하였다. 50여 세의 대학교수는 이런 갑작스런 변동을 감당하지 못하여 발가벗고 들판을 헤매는 등 정신이 이상해졌다. 결국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버렸다.

공산당이 만든 고통과 이별은 결국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한쪽의 이별이 다른 쪽의 이별을 가져오는 불치의 증상이 되었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며 또한 전통문화는 당(黨)문화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이다. 그러므로 가정파괴는 중국 공산당의 살인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잔혹한 악행이다.

중국 공산당이 사회 자원(資源)을 모조리 독차지했기에, 어떤 사람이 만약 공산 독재의 공격대상이 되면 즉시 생활상의 위기, 사회적으로 지탄을 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다. 이런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것으로, 가정은 그들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연좌제는 가족들조차 서로 위로하지 못하게 한다. 가족도 독재의 공격대상이기 때문이다. 장즈신은 곧 이렇게 이혼 당한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족의 배반, 고발, 반대, 적발과 비판은 그들의 정신을 붕괴시킨 최후의 지푸라기였다. 이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길을 걸었다.


살인 방식과 결과

(1) 공산당의 살인 이데올로기


중국 공산당은 늘 자신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천재적이며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창조적으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일체 사악을 집대성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공산당은 공산주의의 대동(大同)사상으로 민중과 지식인들을 기만했고,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신앙을 훼멸시키고 철저한 무신론을 주입시켰다. 또 공산주의를 이용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했으며 레닌의 폭력혁명에 관한 이론과 실천으로 국가를 통치하였다. 동시에 중국문화 중에서 전통을 이탈한 가장 사악한 부분을 결합하여 더욱 진일보로 악화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이 발명한 한 세트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의 ‘혁명’ 및 ‘연속혁명’ 이론과 방식으로 세계를 개조하여 공산당 일당독재를 하고자 한다. 그 이론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경제적인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상부구조는 토대에 반작용을 한다. 상부구조, 특히 공산당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경제적인 토대로부터 혁명을 진행시켜야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지주를 살해하여 농촌 생산관계` 해결.
자본가를 살해하여 도시 생산관계 해결.

한편, 상부구조에서도 반복적인 살인이 필요한데, 그 목적은 의식형태에서 절대적인 통치를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당에 대한 지식인의 정치태도문제 해결

중국 공산당은 장기간 반복적으로 몇 차례의 ‘지식인 사상개조 운동’을 발동하였다. 자본가계급의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가계급의 사상과 초(超) 정치적인 관념, 초(超) 계급사상, 자유주의 등을 비판한다. 세뇌하고 속마음을 비판하여 지식인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한다. 일부 지식인 중의 자유사상과 좋은 품격, 의리를 지키고 바른 말을 하며 몸을 바쳐 의리를 지키는 것, “가난해도 동요하지 않으며,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부귀에도 현혹되지 않는다.(
주석)”, “천하의 근심은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거워한다.(주석)”,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주석)”, “군자가 벼슬을 하면 천하를 선(善)하게 대하고, 등용되지 못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노라.(주석)”와 같은 이런 전통을 중국 공산당은 모두 파괴한 것이다.

문화와 정치의 절대 권력을 위하여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여 살인

처음에는 당내에서 당외(黨外)로 군중을 동원하여 문학, 예술, 연극, 역사, 교육 등의 영역에서 살인을 했다. 먼저 전국에서 몇 명을 살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는데, 예를 들면 ‘삼가촌(
三家村)’, 류샤오치, 우한(吳晗), 라오서(老舍), 젠보짠(翦伯贊) 등에서 발전하여, ‘당내의 한 무리’, ‘군대 내의 한무리’를 숙청하였고 더 발전하면 전당(全黨) 전군(全軍) 전국 인민이 서로 살해하게 하였으며, 무장투쟁으로 육체를 말살시켰고 문화투쟁으로 영혼을 말살시켰다. 그것은 당이 조종한 하나의 극히 혼란스럽고 잔인한 시기였다. 인간성 중에서 악(惡)한 일면이 당의 위기를 구실로 충전되어 최대한 팽창할 필요가 있었다. 매 개인마다 모두 ‘혁명이란 이름’과 ‘당과 마오 주석의 혁명노선을 수호한다.’는 구호 아래 마음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역사상 종래로 찾아볼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인간성을 말살시킨 전민 운동이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사회의 민주화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6.4 학살

이것은 인민해방군이 인민들의 반탐오(貪汚), 반(反)정경유착, 반부패, 신문 자유, 언론 자유, 결사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하여 처음으로 인민을 공개 살해한 것이다. 공산당은 군대의 상호 억압과 인민들에 대한 군대의 증오를 유도하기 위하여 심지어 군용차를 불태우고 병사들이 살해된 거짓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 결과 인민의 자제인 병사들이 군중을 도살한 참혹한 천안문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앙이 다른 사람을 학살

신앙영역은 중국 공산당의 생명줄이다. 뒤틀린 사설(邪說)로 인민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은 건국 초기부터 각종 종교 신앙인과 신앙 체제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기의 심신수련인 ──파룬궁(法輪功) 수련생들을 향하여 중국 공산당은 다시 한번 도살용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공산당의 의도는 파룬궁이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고 “비방하지 않으며”,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지 않는 것”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즉, 파룬궁을 탄압한 경험을 살려 다른 모든 신앙 단체를 말살하려던 계략이었다. 이번에는 공산당의 우두머리인 장쩌민이 직접 손을 써서 살인하였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살해

국민의 알 권리는 중국 공산당의 또 다른 아킬레스 건으로 공산당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살해한다. 과거에는 ‘해외라디오방송’을 듣기만 해도 감옥에 감금되는 큰 죄가 되었다. 최근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하여 각종 텔레비전에 파룬궁 진상내용이 담긴 프로그램을 삽입 방송한 것에 대해, 장쩌민은 “무조건 죽여라”는 밀령을 내렸다. 진상방송을 삽입한 창춘수련생 류청쥔(
劉成軍)은 바로 이것 때문에 혹형에 시달리다 죽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히틀러의 게쉬타포와 유사한 조직인 610사무실을 설립하여 경찰, 검찰, 법원, 그리고 방대한 사이버 경찰 체계를 통해 군중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사리사욕을 위해 백성의 생존권을 박탈

공산당의 이른바 ‘연속혁명론’은 사실상 정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 공산당의 부정과 부패는 이미 당의 절대적 영도권과 백성들의 생존권이 충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민중들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할 때에도, 공산당은 폭력적으로 민중의 지도자를 살인하는 방법으로 모순을 해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이를 위해 백만 명이 넘는 무장 경찰을 준비해놓았다. 6.4 때 임시로 야전군을 조종하여 탄압할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중국 공산당은 살인준비를 보다 철저히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민중을 핍박하여 살길을 막아버린 것이 도리어 중국 공산당 자신의 살길도 막아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당 정권은 이미 바람에 초목(草木)이 흔들리는 것조차 모두 적(敵)으로 간주할 정도로 취약해졌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공산당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사악한 영(靈)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절대적인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 어떤 변화가 있든지 막론하고 그것은 과거에 살인을 했으며 현재도 살인하고 있으며 장래에도 살인하는 역사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2) 상황에 따라 변하는 살인 방식

언론을 앞잡이로

중국 공산당은 각양각색의 살인 방식을 사용하였다. 서로 다른 시기에는 서로 다른 방식이 있다. 절대 다수의 살인은 ‘언론이 선도.’한 것이다. 공산당은 늘 "죽이지 않으면 민중들의 분노를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마치 공산당이 백성들의 요구에 응해 살인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지만, 사실상 민중들의 분노는 공산당이 일으킨 것이다.

예를 들면 『백모녀(白毛女)』라는 연극은 완전히 민간의 전설을 날조한 거짓말이다. 『류문채(劉文彩)』라는 극에서 지주가 가혹한 세금을 받는 것과 사사로이 물감옥에서 고문을 하는 것도 민중들을 교육하여 지주를 증오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요귀나 마귀로 표현되는 적을 만드는 술법은 공산당이 보편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심지어 국가주석마저도 요귀로 몰 수 있다.

파룬궁에 대해서는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을 조작하여 민중들로 하여금 파룬궁을 증오하도록 한 다음 수련생들에게 집단학살식의 박해를 진행하였다. 공산당은 이러한 살인 방식을 여전히 개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보기술의 발달로 최고봉에 도달하였다. 과거에는 중국인민 만을 기만했지만 지금은 외국 사람들도 함께 기만하고 있다.

군중을 동원하여 살인

공산당은 독재기구를 이용하여 살인할 뿐만 아니라 또 ‘군중을 동원하여 살인한다.’ 이런 군중동원 운동에서 처음에는 비록 규정이나 법규가 있어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군중 살인이 고조에 달하면 그 무엇도 군중들을 제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토지개혁 운동’ 중 토지개혁위원회에서 지주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었다.

영혼을 죽이고 나서 육체 살해

다른 한 가지 살인 방식은 ‘우선 영혼을 살해하고 다음에 육체를 살해하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던 진시황 때조차도 정신적인 도살은 없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강개(慷慨)하여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른바 “인정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저항하면 엄하게 처리하며”, “고개 숙여 죄를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다.”라고 하여 반드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신앙을 포기하도록 한 후에 개처럼 아무런 존엄도 없이 죽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롭게 죽은 사람의 기개가 이후 사람들을 격려한다고 여겨 절대로 이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죽을 때 비열하고 부끄럽게 죽어야만 중국 공산당이 이후 세대를 교육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지극히 잔혹하게 박해하는 원인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신앙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즉,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의 존엄을 제거하지 못하게 되자 중국 공산당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들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게 된 것이다.

밀고 당기는 수법으로 살인

살인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은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사용한다. 공산당은 지금까지 ‘적은 무리를 타격하거나’ 혹은 5%의 비율로 타격하며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영원히 좋으며 영원히 교육 대상이라고 말해왔다. 이런 교육에는 ‘공포와 따뜻함’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공포’란 곧 사람들에게 공산당과 대립하면 절대적으로 좋은 결과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격받는 사람을 멀리 회피하게 만든다. ‘따뜻함’이란 공산당의 신임을 얻거나 당과 같은 길에 섰을 때는 안전할 뿐만 아니라 중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피로 만든 만두도 얻어먹을 수 있다. 린뱌오(林彪)가 말하기를 "오늘 한 무리, 내일 한 무리, 합하면 큰 면적이다."라고 하였다. 매 차례 운동에서 걸려들지 않았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다음 한 차례 운동의 희생양이 된다.

‘맹아 상태에서 소멸시키는 살인 방식’과 ‘법률 이외의 은폐된 살인 방식’

한걸음 더 발전하여 중국 공산당은 이제 ‘맹아(萌芽) 상태에서 소멸시키는’ 살인 방식과 ‘법률 이외의 은폐된 살인 방식’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각지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항의가 많이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은 ‘맹아 상태에서 소멸시키는’ 원칙에 의거하여 매 번 선도적인 사람을 잡아 가두거나 중벌로 다스린다.

다른 예를 들자면 인권 자유가 세계적으로 공인받고 세계적인 조류(潮流)로 된 지금에 와서, 중국 공산당은 파룬궁 수련생을 한 명도 사형시키지 않았다. 대신 장쩌민의 ‘때려죽이면 그만이다’라는 부추김에 의해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고문 치사한 참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헌법』에는 분명히 공민(公民)의 청원권을 규정하고 있으나 중국 공산당은 비밀경찰을 파견하거나 심지어 건달이나 깡패를 고용해서 청원하는 사람을 체포하거나 원래 지역으로 송환한다. 심지어 민간에서 청원하는 민중들에게 노동교양처분을 내리기도 한다.

닭을 죽여 원숭이를 위협하는 살인

장즈신(張志新), 위뤄커(
遇羅克), 린자오(林昭) 등에 대한 박해

탄압을 이용한 살인은폐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중국 공산당은 탄압만 하고 살인을 하지 않는데 목적은 영향력이 적고 민중이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인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진반(鎭反) 때 국민당의 고급장교인 룽윈(龍雲), 부쭤이(傅作義), 두위밍(杜聿明) 등은 살해하지 않았지만 국민당의 중하위 관리나 사병들은 모두 살해하였다. 장기간의 살인은 사람의 영혼을 변이(變異)시킨다. 현재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살기(殺氣)가 등등하다.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사건 때 중국 대륙의 사이트는 의외로 모두 좋아하는 함성소리였고 ‘전면전’이란 말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결 론

중국 공산당의 정보 통제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통치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로 죽었는지, 우리는 정확한 숫자를 통계할 방법이 없다. 위에서 말한 각 운동 중에서 적어도 6천만 명이 치사하였고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이 신장(신강), 티베트(서장) , 네이멍구(내몽고), 윈난(운남) 등지에서 소수민족을 학살한 것은 역사자료를 찾기가 더 힘들다. 전에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를 8천만 명으로 추산한 적이 있다(주석).

이렇게 사망한 것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많은 생명이 분통이 터지거나 놀라서, 혹은 애가 타서 죽었는지? 우리는 더욱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개인의 사망은, 그 가족들에 대해 말한다면, 모두 가슴에 사무치는 참혹한 비극이다.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중국 공산당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한 수치를 인용한데 따르면, 중국 29개 성시(省市)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박해받거나 연루된 사람들의 숫자는 6억 명이나 된다고 한다(
주석). 중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 것이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일찍이 “한 사람이 죽으면 비극이지만 백만 명이 죽으면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리징첸(
李井泉)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쓰촨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냐고 말하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어느 역사에서나 사람이 죽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분투(奮鬪)하려면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고 사람이 죽는 일은 늘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의 생명에 대한 태도이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전체 소련 인구의 10분의 일에 해당하는 2천만 명을 박해로 죽였다. 중국 공산당 역시 당시 인구의 10분의 일 가량에 해당하는 8천만 명을 박해하여 죽였다. 또한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전 인구의 4분의 일에 해당하는 이백만 명을 살해하였다. 지금 북한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백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모든 것은 공산당이 인류에게 피의 빚을 진 것이다.

사교(邪敎)는 살인이라는 방식을 통해 사악한 영(靈)에게 피를 공양(供養)한다. 공산당은 첫 시작부터 끊임없이 살인을 저질러왔다. 심지어 외부인을 살해하지 못하면 자기 사람을 살해하는 수법으로 ‘계급투쟁’, ‘노선투쟁’이라는 사설(邪說)에 제사(祭祀)를 지냈으며, 심지어 공산당 총서기, 원수, 장군, 부장(
部長) 등을 사교의 제사상에 올려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마땅히 중국 공산당에게 좋게 변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중국 공산당의 살인도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살해해도 마찬가지로 살인범임을 알아야 한다. 더욱 큰 면에서 말하자면 살인은 중국 공산당이 테러통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살인의 많고 적음은 필요에 따라 조절하는 것으로, 그 표현은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공포감이 크지 않을 때면 살인을 늘려 공포감을 키우고, 사람들이 공포감이 많을 때는 살인을 조금만 해도 공포감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겁을 먹을 정도가 되면 중국 공산당이 살인한다고 큰소리만 쳐도(실제로 살인을 할 필요는 없다) 공포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무수한 살인 운동을 거쳐 중국 공산당의 공포에 대해 조건반사가 형성될 때면 중국 공산당은 살인을 언급할 필요도 없으며 단지 선전기구의 대량 비판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공포의 기억을 되살려 줄 수 있다.

일단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공포에 대한 감수에 변화가 생기면 중국 공산당은 곧 살인강도(强度)를 조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이 살인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의 일관성이다. 살인이 적어졌다고 해서 중국 공산당이 온화해진 것이 아니며 도살용 칼을 내려놓은 것은 더욱 아니다. 중국 인민들이 온순하게 변했을 따름이다. 일단 인민들의 요구가 중국 공산당이 용납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만 하면 중국 공산당은 절대로 살인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공포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무작위로 살인하는 것이야말로 공포를 유지하는 최대의 방법이다. 역대의 대규모 살인 중 공격 대상이나 죄를 규정하고 형량을 정하는 표준은 일부러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민들은 공산당의 살인 범위에 들어가지 않기 위하여, 종종 위축되어 자신이 정한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대(Safe Zone)로 물러난다. 어떤 경우 이 안전지대는 공산당이 그어놓은 표준보다도 훨씬 작다.

그러므로 매번 운동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좌파가 될지언정 우파가 되어선 안 된다(
주석)”고 하였다. 매 번 운동 때마다 박해 대상이 ‘확대’되기 때문에 공산당보다 한 등급 한 등급씩 스스로 등급을 올려 자신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운동은 아래로 가면 갈수록 더 참혹한데 이런 식의 전 사회적인 공포가 자동적으로 확대되는 원인은 바로 공산당이 무작위로 학살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살인 역사 중에서 중국 공산당은 변태적인 연쇄 살인광으로 변모했다. 살인으로 대권을 틀어쥐고 사람들의 생사를 좌우지 하는 변태적인 쾌감을 얻었으며, 살인으로 내심의 공포감을 숨겼고, 연쇄 살인으로 이전에 살인을 하여 조성한 사회적 원한과 불만을 짓눌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공산당은 피의 빚[血債]이 쌓이고 쌓여 선하게 해결[善解]할 출로가 사라졌으며 또한 고압(高壓)과 독재를 통해서 만이 근근이 그것의 최후 생존 시간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어떤 때 ‘살인한 후에 명예회복[平反]’ 하는 방식을 통해 또 다시 사회를 미혹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의 흡혈(吸血)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장래에는 더욱더 변하기 힘들 것이다.

(2005년 5월 8일 수정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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