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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체계적인 사상개조(상)

관리자  |  2008-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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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유불도 사상 비판

1) 유가(儒家) 비판
(1) 공자 비판
(2) 지식인 비판

2) 불가와 도가 비판
(1) 신불(神佛)의 존재를 부인하고 신앙의 동기 왜곡
(2) 수행의 물질적 환경 파괴
(3) 육체 소멸
(4) 종교 경전을 왜곡하고 종교를 세속화
(5) 중공 종교협회를 설립하고 내부로부터 종교 비판
(6) 종교자유의 가상 조작

2. 전통관념 비판

1) 하늘에 대한 경외(敬畏) 비판
2) 운명과 선악보응 비판
3) 유순함과 인내, 양보 비판
4) 전통사회질서 비판
5) 도덕을 가늠하는 주요한 근거를 재산으로 삼다
6) 저속한 당문화(黨文化) 선양
7) 비판 받은 기타 관념

정치학습, 사상개조와 같은 이러한 사건들을 중국인들은 얼마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사상을 개조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중공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 사유방식과 언어계통이 모두 반(反) 인성적인 것으로 대중 속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성에 의해 쉽게 배척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산당은 본래 서양에서 수입된 것으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정교(政敎)합일의 독재체계로서 중화전통문화와는 극도로 저촉되는 것이다. 중공이 발을 붙이자면 반드시 당문화(黨文化) 환경을 만들어내야 했고 따라서 사상개조는 필수적이며 절박한 것이었다.

개조의 중요한 일보는 바로 중화문화에서 신앙의 근본인 유불도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동시에 민간의 전통 관념은 삼교가 확립한 가치관들이 세속 중에서 반영된 것이다. 이런 관념들은 일찍이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종교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때문에 전통 관념에 대한 비판 역시 중공이 중국인들의 사상 속에서 중국 전통문화와 신앙을 근절하는 중요한 일보로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인들은 중공과 당문화에 대한 변별능력과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유불도 사상과 전통 관념에 대한 중공의 비판과 제거는 단지 ‘파괴(破)’의 일보에 속할 뿐이다. 동시에 중공은 또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사유방식을 ‘세워(立)’야 했다. 예를 들면 투쟁사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과 진화론과 현대과학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체계적으로 무신론을 기초로 한 중공의 사악한 설을 접수하게끔 했으며 나아가 중공의 생존에 적합한 사회 환경을 다시 만들고 수호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공이 체계적인 사상개조를 진행한 결과이다.


1. 유불도(儒釋道) 사상 비판

수천 년 역사 중에서 유가, 불가, 도가의 영향은 중국사회의 각 계층에 깊이 들어갔다.

중국의 유가는 ‘인(仁)’ ‘의(義)’를 숭상하며 공자는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맹이 없는 것이다(見義不為,無勇也.)”라고 말했으며 또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살기 위해 인(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살신하여 인(仁)을 이룬다.(志士仁人,無求生以害仁,有殺身以成仁.)”라고 하였다. 유가의 천명관(天命觀)은 민간에 깊이 들어갔다. 『논어』에서 이르기를 “생과 사에는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死生有命,富貴在天.)”라고 했고 『중용(中庸)』 첫머리에는 “하늘의 명을 일러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라고 하여 사람의 근본특성은 하늘에서 명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옛 사람들에게 하늘은 만물의 근본이었고 일체 가치의 근원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기왕에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라면 이 생명의 목적은 바로 천명(天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내심(內心)이 선(善)을 향하는 요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유가사상에서 수많은 경전의 으뜸이라 하는 『주역』에서는 ‘3재(三才)’를 중시한다. 즉 천(天), 지(地), 인(人) 3재로서 천생인(天生人), 지양인(地養人)이라 한다. 사람은 또 천지를 본받아(取法天地)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與天地合其德)”할 수 있다. 천지의 운행은 불변의 천리(天理)를 준수한다. 백성들은 높은 곳에서 인간세상의 일체를 제약하는 ‘하늘(天)’이 있어 ‘불변(不變)’의 천리로 인간세상의 일체를 가늠한다고 믿는다. 유가사상은 도덕과 사회질서를 연계했다.

불가(佛家)는 선(善)을 중시하고 자비를 중시하며 인욕(忍辱)을 중시하고 생명을 중시하고 중생이 평등하다는 것을 믿고 받든다. 중공이 정권을 세우기 전에 불가의 육도윤회(六道輪廻), 덕을 쌓고 선을 행하는 것, 인과응보는 이미 사람들의 상식이 되었다. 이른바 “전생의 원인을 알고 싶으면 금생에 받은 것을 보면 되고 내생의 결과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지은 것을 보면 된다(欲知前世因,今生受者是;欲知來世果,今生作者是).” 객관적으로 말하면 불가의 ‘선악에 보응이 있다(善惡有報)’는 관념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사람의 도덕을 유지하는 데에 지극히 중대한 작용을 일으켰다.

도가(道家)는 ‘진(眞)’을 강조하고 청정무위(淸淨無爲)를 강조하며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통일을 강조하여 나중에 반본귀진(返本歸眞)의 목적에 도달한다. 이른바 “사람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天,天法道,道法自然)”라고 하는 이치이다. 중국의 중의(中醫)와 기공(氣功)은 모두 도가에서 기원했다. 이외에도 기를 연마하고 단을 연마하는 것은 도가 양생(養生)의 도(道)이다.

도가의 점술과 예언의 정확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대도(大道) 수련자들은 더욱이 육신을 갖고 도를 이루며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신적(神跡)이 있다. 세간의 층면에서 지금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갈수록 대립되고 있으며 환경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화제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도가 사상은 각국 학자들의 중시를 받고 있으며 그 특수한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다.

중공을 놓고 말하면 유가의 ‘천명(天命)’, 불가의 인과응보, 도가의 무욕무구(無慾無求)와 여세무쟁(與世無爭)은 중공이 ‘계급투쟁’을 발동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유불도 경전에서 확립한 도덕관은 중공이 자신의 도덕권위를 수립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으며 또한 중공의 반란(造反), 혁명, 전제정치 등 정치운동을 가로막았다. 불도(佛道) 양가(兩家)의 수련은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를 초월하게 했으며 유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생취의(捨生取義)하게 하는데 이러한 것은 중공이 물질수단을 이용하여 전반 사회를 통제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불가의 열반(涅槃)과 피안(彼岸), 도가의 우화등선의 자취와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정신 그리고 유가의 천명관 등은 모두 중공이 무신론을 선전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1) 유가(儒家) 비판

(1) 공자 비판

유불도 3교 중에서 생활 속에 융합된 것은 그래도 유가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인들은 줄곧 가족을 생활의 중심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유가문화에서 규범 하는 것이 바로 가정윤리였으며 이러한 가정윤리를 사회생활과 정치 중으로 다시 확장시켰다.

약 2천5백년 동안 중화문화의 입세(入世) 부분은 기본적으로 유가문화가 주도적인 작용을 했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사당을 세워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해서부터 한고조(漢高祖)는 유가의 예절을 이용해 조의(朝儀)를 정했다. 한무제(漢武帝)는 제자백가를 배척하고 유학만을 존중했으며 당태종(唐太宗)은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했으며 청나라 성조(聖祖) 강희(康熙)제에 이르러서는 친히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사당에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4글자를 써넣는 등 중국 역대 왕조에서 모두 공자에 대해 추봉하거나 제사를 올렸다. 심지어 한화(漢化)정도가 가장 낮았던 원나라 때에도 원성종(元成宗)은 여전히 공자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고 봉했다. 인류에 대한 공자의 영향은 이미 국경을 초월했다. 일본, 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이 일부 유가사상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 계몽시대의 대철학자 볼테르 역시 자칭 공자의 학생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나라 때부터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향불은 끊이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국가 정권을 탈취하고서도 오히려 공자를 욕하고 공자의 사당을 파괴하는 행패를 부린 것은 오직 공산당뿐이다.



중공은 마오쩌둥(毛澤東)부터 시작하여 유가의 문화를 몹시 미워했다. 그 원인은 『9평 공산당』 제6평에서 이미 기술한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시 서술하지 않겠다. 마오(毛)가 진시황을 아주 좋아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그가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법가(法家)의 권모술수를 이용해 나라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마오는 특히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좋아했으며 이를 모방하고 또 초월하였다.

‘문행충신(文行忠信)’을 선도한 공자를 중공은 “일체 낡은 이론의 사표이자 악세력(惡勢力)의 영혼”이라 욕했으며 “자고로 생명이 생긴 이래 공자처럼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없었으며 선량한 사람들과 대다수 사람들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앞으로 인류는 함께 일어나 공격해야 한다! 고금중외(古今中外)의 모든 사상가들의 언행 중에서도 공구(孔丘)야말로 가장 황당무계한 사람이다.”라고 욕했다.

앞서 언급한 공공연하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는 식의 언론(言論)은 중공이 공자를 비판하는 문장의 주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중공은 공자의 언론에 대해 단장취의(斷章取義)하고 논리적 함정을 파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을 설득할 만한 증거를 내놓은 적이 전혀 없었으며 또한 내놓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공의 유가에 대한 비판은 계급투쟁을 출발점과 기초로 삼아, 공자가 노예주인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비판했다. 오늘날, 자본가들이 이미 중공에 가입했거나 혹은 중공 관원 자신이 거대 자본가로 되었으며 혹은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쥔 지주가 된 이때 계급투쟁 이론은 이미 파산되어 중공 자신조차도 이를 거론하기 싫어할 정도에 이르렀다(물론 중공이 계급투쟁의 수법으로 다른 사람을 계속 박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이때에 와서 고개를 돌려 유가를 비판했던 그 시절을 보면 모두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중공은 자신의 통치를 수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공자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근 몇 년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중공은 또 해외에서 소위 ‘공자학원(孔子學院)’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이 비판했던 공자를 이용하여 또 중국문화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기만하려 한다. 다른 한편 중공은 대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유가의 13경을 외우도록 가르친 민간학교를 금지하였다.

중공은 일찍이 정권을 탈취한 초기에 차이상쓰(蔡尚思)의 『중국전통사상총비판(中國傳統思想總批判)』이라는 책(이하 『비판』으로 약칭)을 출판하여 공자에 대한 파괴와 욕설을 퍼부었으며 비판을 진행하였다. 그중에서 중공이 상습적으로 사용한 논리적 함정에 대해 대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문제는 여전히 중공 당문화 중에서 대비판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종류는 단장취의이다. 공자가 학비를 받은 것에서 공자는 오직 귀족을 위해 봉사했다고 단정 지었으며 공자의 ‘가르침에 차별이 없다(有教無類)’는 주장을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공자의 학생 중에서 자로(子路)는 출신이 비천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 종류는 다른 사람의 말을 공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춘추곡량전(春秋谷梁傳)』은 자하(子夏)의 제자가 쓴 책이나 『비판』에서는 오히려 그 중에 나오는 백희(伯姬)와 관련된 논술부분으로 공자를 공격했다.

세 번째 종류는 부당한 유추이다. 공자가 말한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다(不在其位,不謀其政)”에서 “이는 ‘나라의 흥망에 필부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는 황당한 결론을 도출한다. 개인이 직책을 대하는 태도에서 엉뚱하게 국민의 의무를 유추한 것이다.

네 번째 종류는 부당한 비유이다. 한대(漢代)이후부터 내려온 독존유술(獨尊儒術)과 진시황의 독존법가(獨尊法家)처럼 유가는 도덕으로 사람을 다스리지만 법가는 상벌로 사람을 유혹하고 협박하는데 이들은 전혀 다르지만 중공은 이를 관계하지 않고 비교하였다.

다섯 번째 종류는 원래 명제와 역(逆)명제가 같지 않음에도 서로 뒤섞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판』에서 “기왕에 여자가 전부 소인이라면 남자는 모두 군자가 아닌가.”라고 말한 것을 들 수 있다.

여섯 번째 종류는 ‘반과학(反科學)’이라는 모자를 씌워 공자가 ‘자연과학을 위반’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공자가 담론한 것은 대부분 윤리와 정치 분야의 일이며 이런 것들은 자연과학과는 무관한 것이다. 마치 자로 중량을 측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의 원리를 가지고 사람 행위의 선악을 가늠할 수는 없다. 하물며 공자가 규정한 ‘육예(六藝)’ 중에는 자연과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수학(數學)’을 포함하고 있다.

일곱 번째 종류는 암암리에 중상모략 하는 것이다. ‘삼강(三綱)’을 제출한 것은 명백하게 법가인 한비자(韓非子), 한나라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등이다. 그러나 『비판』에서는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여자에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할 때의 몇 가지 참혹한 예를 들었다. 이런 예들은 공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예기(禮記)』에 기재되어 있기를 공자의 며느리와 손자며느리도 모두 재가했다. 그러나 전편에서 공자를 비판하는 배경 하에서 『비판』 독자들이 이런 비극의 원인을 공자 탓으로 돌리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여덟 번째 종류는 바로 사람들의 질투심을 선동하는 것이다. 『비판』에서는 전문적으로 ‘공자의 귀족생활’로 사람들의 질투심을 선동하였다. 사실 『논어』에 나오는 “생선이 상하고 고기가 부패했으면 드시지 않았고(魚餒而肉敗,不食)” 등은 사실 기본적인 양생의 도(道)이지 무슨 귀족생활이 아니다.


(2)지식인 비판

『좌전(左傳)』에 이르길 “가장 좋은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이 공을 세우는 것이며, 그 다음이 말을 세우는 것이다. 오랫동안 폐지하지 않는다면 이를 일러 불후(不朽)라 한다.(太上有立德,其次有立功,其次有立言,雖久不廢,此之謂不朽.)”라고 했다.

중국 전통문화는 지식인들이 크게 솜씨를 발휘하는 역사적 무대였으며 수많은 별들이 찬란히 빛났고 인걸이 많았다.

지식인을 개조하는 것을 중공은 극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중국 전통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 4계층을 중시했고 이 중에서 ‘사(士)’가 바로 지식인을 말한다. ‘사대부(士大夫)’계층은 도통(道統)의 담당자로서 도덕의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때문에 그들은 심지어 통치자보다도 발언권이 있었으며 일반 민중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중공은 지식인이 대표하는 정통 도덕관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식인을 매개로 일반인들의 사상을 개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중공이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우선적으로 한 것이 바로 지식인들의 사상을 개조한 것이다.


 

1950년 6월, 마오쩌둥은 중공 제7차 3중전회의 강화 중에서 지식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들을 이용해야 하는 동시에 교육과 개조를 진행해야 한다. 그들에게 사회발전사, 역사유물론 등 몇 개 과정을 배우게 해야 한다.” 마오의 소위 교육과 개조는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을 조직해 정치협상회의(政協) 3대 문건, 사회발전사와 신민주주의론을 학습하게 하는 외에 1951년부터 대량의 지식인들을 조직하여 항미원조(抗美援朝, 역주: 6․25 전쟁을 의미), 토지개혁과 반혁명 탄압운동에 참가하게 했다.

이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운동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의 잔인함과 흉악함을 보게 했으며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1952년 1월, 전국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회에서 만든『각계 인사들의 사상개조와 학습운동을 전개하는데 관한 결정(關於展開各界人士思想改造的學習運動的決定)』에서는 개조 후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중공이 그들에게 주입한 사상을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하여 모든 사람들의 사상을 개조하게 했다.

일찍이 청나라 말기에 과거제도를 폐지한 후 상당수 지식인들은 정당에 달라붙었다. 이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또한 지식인들이 ‘주동(主動)’적으로 사상을 전환한 과정이었다. 물론 이런 전환을 중공은 충분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이 비록 그들이 필요로 하는 민주와 과학의 큰 깃발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유가의 절대다수 수신입명(修身立命)의 학문이 여전히 시비를 판단하는 준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중공으로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1939년 12월에 발표한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이란 문장에서 지식인들을 ‘소자본가계급 범주’로 획정했다.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여기던 그 시대에 ‘소자본가계급’이란 모자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고개를 쳐들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중공은 선전기구를 통해 노동자와 농민을 찬양하면서 그들의 지식이 결핍한 것을 혁명의 동력으로 삼아 ‘소박한 계급증오’라고 선전했다. 여기에 공산당의 인도가 있으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지식인들은 영화속에서 안경을 쓰고 두려워하며 위축된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즉, 그들은 책이나 보는 책상물림으로 군중들을 보지 못하며 일을 하는 것이 주관적이라는 등이다.

1958년 청인(成蔭)이 연출한 『상해아가씨(上海姑娘)』는 공개 상영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 원인은 뜻밖에도 “첫째 지식인이 당위원회 서기나 혹은 지부 서기의 비평교육이 없는 정황 하에서 원칙을 확고히 지키고 건설 중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당의 영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당의 영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둘째, 지식인의 ‘연약성, 동요성, 현실과 괴리, 군중들과 괴리’ 등 결점을 그리지 않았다. 이는 자본가계급 지식인을 미화하는 것이다.

셋째, 주인공이 노동자 중에서 일부 낙후된 사상의 영향을 받아 급히 공을 세우려 하는데 이는 ‘노동자 계급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원인에는 또 노동자와 지식인의 관계를 도발했다는 것이 있다.

지식인에 대한 이런 비방선전은 거대한 작용을 일으켰다. 그 원인은 지식인들은 줄곧 사회사상조류의 지도자였고 줄곧 사회문제의 발언자였으며 줄곧 전통문화의 전승자이자 논술(論述)자였기에 지식인의 형상에 성공적으로 먹칠을 한 후, 그들이 대표하는 가치관마저도 따라서 전복되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의 눈에 지식인들은 더는 존중하거나 가르침을 구할 대상이 아니라 조소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상술한 모욕이 ‘명예를 실추’하는 데에 속한다면 지식인들의 밥그릇을 통제한 것은 ‘경제적인 절단’이라 할 수 있다. 후펑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반(反)우파 투쟁,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는 ‘육체적인 소멸’ 부분에 해당한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할 때 함께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며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민주인사들은 순진하게도 자신이 정권의 기초를 다진 공신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간담(肝膽)이 서로 돕듯이 영욕을 함께하자’던 중공도 그들에게 강렬한 사회적 책임감과 거대한 포부를 펼칠 기회를 주었다. ‘진정’한 요청에 고무 받은 이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士爲知己者死)’ 인사들은 늠름한 정기가 있을수록 더 참혹한 탄압을 받았다.

사람들이 중공의 행위를 목격하고 ‘당 천하(黨天下)’의 진실한 함의가 드디어 만천하에 뚜렷이 드러났다. 바로 ‘인민민주주의 전정(專政) 혹은 인민민주주의 독재’였다. 장보쥔(章伯鈞), 장나이치(章乃器), 뤄룽지(羅隆基), 추안핑(儲安平) 등 저명한 문인들은 나라를 위해 귀국한 해외유학 박사는 물론이고 전 재산을 공산당에 바친 자본가, 부장, 교수, 문학가, 편집장, 기자의 지위에서 분분히 끌려 내려와 공산당 우파 외양간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싸늘한 현실 속에서 또렷하게 민주와 독재가 어떻게 중공에 의해 ‘인민전정(人民專政)’으로 결합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정충보국(精忠報國), 사생취의(捨生取義), 인격 존엄, 천하의 근심은 미리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기는 등의 전통적인 품격은 모두 마지막 유학자들의 고독한 사망과 함께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소실되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적극적으로 인간천당을 내걸고 유혹하던 중공 당이 가장 먼저 건립한 것이 바로 인간지옥임을 보았다.


요행히 살아남은 그런 사람들은 이때부터 전전긍긍하면서 더는 감히 전통적 가치를 제기하지 못했고 지식인의 독립적인 사고와 인격을 지킬 수 없었다. 예를 들면 펑유란(馮友蘭), 궈모뤄(郭沫若)는 겨우 마오쩌둥의 한마디 비평에 놀라서 자신의 학술적 관점을 재빨리 개변했다. 지식인들로서 독립적인 사상과 인격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심각한 피해는 지식인들의 내심 고통을 절대로 표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지식인’은 일찍이 도덕과 동의어였으며 청빈(淸貧), 정의, 지식, 함양(涵養),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사회형상을 표현했다. 장쩌민 시대에 이르러 당에는 ‘정치적인 어용 문인’이라는 일종의 배역이 등장했다. 문인(文人)의 정통과는 판이하게, 그들은 정치무대 위에서 가마를 들고 나팔을 부는 장인에 불과하며 보좌한 것은 성현(聖賢)의 군주가 아니라 장쩌민과 같은 도적의 무리였다.

탱크로 사람을 깔아뭉개는 피비린내 나는 탄압 중에서, 국제사회에서 제재와 비난의 목소리가 고조되는 가운데 무대에 오른 장쩌민은 정치적으로 두터운 분칠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이런 어용문인들을 통해 소위 ‘3개 대표’를 발명했다. 그들은 단지 정치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장사지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지식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청렴결백을 오염시켰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공의 ‘전문가 학자’들은 일찍이 심후한 정통문화와 행위방식을 계승한 그런 지식인과는 다르다. 그들 중 절대다수는 중공의 무신론, 투쟁철학, 사회발전사에 세뇌되었고 그들은 단지 과학기술을 장악한 전문가에 불과할 뿐이며 정통적인 유불도 문화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못했고 더욱이 생활 속에 융합하지 못했다.

이때 중공은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당의 은혜는 가없이 크다’는 표현을 한다. 사이비지식인들은 아낌없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이론을 만들어 중공 통치의 합법성을 논증하거나 아니면 각종 사회비극의 합리성을 날조하였다. 중공은 ‘정치 엘리트, 경제 엘리트와 문화 엘리트’라는 철의 3각을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중공이 필요로 하는 것은 탄광 사고로 죽은 광부에게 “누가 당신에게 불행히도 중국에서 태어나라고 했는가?”라고 말하는 허쭤슈(何祚庥)와 같은 자들이다.

또 일부 당문화에 심각하게 오염된 지식인들이 있는데 비록 사람됨의 기본적인 양지(良知)는 지니고 있지만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없으며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길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체제 내’의 신분과 ‘체제 내 개혁’을 쟁취할 수밖에 없고 매사에 ‘체제 내의 해결’을 찾을 수밖에 없다. ‘체제 내 해결’은 우선적으로 공산당에 굴종하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공산당과 당문화의 통제와 임의적인 사용권을 승인하여 가련할 정도로 미미한 발언권을 얻을 뿐이다.

선택이 없는 사회 환경 속에서 일부 소련문학과 공산당의 저작 중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장과정 중의 숙식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독약인 줄 모른다. 공산당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기 힘들어하며 사회의 불공정에 침묵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중공이야말로 만악(萬惡)의 근원임을 똑똑히 알도록 도와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이 중공에 희망을 거는 방법은 사실 바로 개인의 덕행으로 중공의 추태를 감춰주는 것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공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것이다.


2)불가와 도가 비판

(1)신불(神佛)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앙의 동기 왜곡

일찍이 공자는 노자(老子)의 사상을 운중용(雲中龍)으로 인정했다. 오늘날 서양 학계에서도 노자의 사상을 변함없이 존중하고 있다. “복이란 화가 의지하는 것이요, 화는 복이 잠복한 것이다.(福兮禍之所倚,禍兮福之所伏)”, “천릿길도 한걸음부터(千里之行,始於足下)” 등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잠언은 지금까지도 쇠퇴하지 않고 오랫동안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한 대(漢代) 이후 도가의 부록(符菉), 단정(丹鼎) 등 각 유파에서 모두 노자를 존중했고 장도릉(張道陵), 구홍제(邱弘濟), 허정양(許旌陽), 갈홍(葛洪) 등 수도자들이 백일비승(白日飛昇)한 신적(神跡)을 남겨놓았다.

역대의 제왕들은 늘 도사를 국사(國師)로 삼았는데 장량은 자신을 일러 ‘세 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촉한(蜀漢)의 제갈량, 당나라 시기의 원천강(袁天罡)과 이순풍(李淳風), 송대(宋代)의 묘광의(苗光義), 명나라 때의 유백온(劉伯溫) 등은 모두 개국황제에게서 국사(國師)의 예(禮)로 대우받았다. 칭기즈칸 역시 만년에 만 리를 마다하지 않고 장춘자(長春子) 구처기(丘處機)를 찾아가 도를 들었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49일을 가부좌 했고 최후에 개공개오(開功改悟)하여 그가 있는 경지에서 우주의 진상을 투철히 보았으며 사람들에게 덕을 중시하고 선을 행하며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석가모니에게는 10대 제자가 있었는데 모두 아주 높은 신통이 있었다. 그의 28대 제자인 달마는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이는 속인들이 할 수 없는 것으로 그는 나중에 소실산(少室山)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여 그림자를 돌에 새길 수 있었으니 천고의 기이한 경관이라 할 수 있다. 선종(禪宗)의 육조 혜능(六祖慧能)은 원적한 지 1000여 년이 지났음에도 육신이 썩지 않고 지금까지도 의연히 광동(廣東) 남화사(南華寺)에 단정히 앉아 있다.

중공은 한편으로는 사회발전사를 선전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 종교 내부에 대리인을 심어 종교 창시자의 말을 부정했다. 불교에서는 부처란 천국세계의 창조자라고 여기는데 가령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이룬 것이다. 그러나 중국불교협회 부회장인 자오푸추(趙樸初)는 1965년에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불타는 신격화되었다.”, “부처는 조물주가 아니며, 사람의 길흉화복을 주재할 수 없다.” 등과 같은 말을 했다. 중공 통제 하에 있는 3자(三自) 교회의 회장인 우야오쭝(吳耀宗)도 자신은 예수의 신적을 ‘던져버렸’으며 “하나님은 이미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열쇠를 교회에서 빼앗아 공산당에 주었다.”고 말했다.

신불(神佛)은 종교의 근본이다. 불교건 도교건 기타 정교(正敎)를 막론하고 신도들은 자신의 경지를 제고하기 위해 노력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믿는 신불의 천국세계로 가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사람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 등이다. 만약 신불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국세계를 부정한다면 종교 신도로서 말하자면 수련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종교라는 이 수련단체 역시 곧 와해될 것이다.

중공은 무신론을 선전하기 위해 종교를 ‘자연역량과 사회역량이 사람들의 의식 중에서 허구적으로 반영된 것’, ‘노동자 착취제도로 조성된 거대한 고난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으로 묘사한다. 이런 선전에 근거하여 천국과 지옥,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일체의 교의(敎義)는 모두 중공이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대상이 되었다.

중공은 ‘사회적인 고난(苦難)이야말로 종교가 존재하고 발전하는 비옥한 토양’이라고 선전하면서 아울러 의도적으로 속인들 중에서 고난에 직면하거나 실의에 빠진 그런 사람들이 종교에 들어가는 것이 종교 신도들의 일반적인 상태라고 선전했다.

사실 도가의 장도릉[張道陵, 즉 장천사(張天師)를 말한다]은 일찍이 한나라 화제(和帝)가 세 차례나 태부(太傅, 9품 관제 중에서 정1품에 해당)로 초빙했음에도 모두 응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학명산(鶴鳴山)에 은거하여 수련했다. 석가모니부처는 출가하기 전에 일국의 태자였으며 그의 부친은 그가 출가하려는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 큰 꽃밭을 만들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지었으며 아름다운 궁녀 수백 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그를 따르게 했다. 아울러 그에게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아수다라를 아내로 삼게 했다.

그러나 태자는 야반에 말을 타고 성벽을 넘어 산림 속으로 들어가 고생스럽게 수련했다. 태자가 성불한 후 가장 먼저 제도한 56명 중 51명이 모두 바라나(波羅柰)국의 귀족들이었다. 세존(世尊)이 귀국하여 불법을 펼 때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500명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다. 때문에 출가는 절대로 현실의 고난(실의에 빠지거나 혹은 경제적인 곤란 등)에 대한 도피가 아니었으며 보리심을 내어 지혜의 검으로 속세의 인연을 끊으려는 커다란 소원이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하기 전에 민간에는 신을 믿는 환경이 있었다. 불교와 도교 수행자들은 ‘법사(法師)’, ‘도장(道長)’, ‘고승대덕(高僧大德)’ 등으로 불렀으며 덕이 높고 신망이 큰 상징이자 또한 사람들이 존중하는 대상이었다. 설사 전통 왕조시대의 황제라 할지라도 고승(高僧)을 만나면 역시 예우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후에 민간에 ‘사회발전사’ 교육을 강제하며 신을 믿는 환경을 파괴했고 수행자들을 우매하고 무지하며 미신을 믿거나 심지어 종교를 이용해 재물을 모으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때 수행자의 사회적 지위는 일락천장(一落千丈)이었으며 존중받던 데서부터 대중들이 조롱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수많은 출가인들이 이런 정신적인 충격을 견디지 못해 환속했다.


 

‘사람이 높은 곳으로 가려(人往高處走)’는 것은 매 사람의 내심마다 잠재된 것으로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성공한 사람과 함께하기를 희망한다. 중공은 불교와 도교신도들을 실패자나 심지어 ‘착취계급’으로 묘사했으며 신불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미신을 믿고 사상이 낙후된 것으로 묘사했다. 이는 모두 민중들로 하여금 신도들과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2) 수행의 물질적 환경 파괴

만약 출가인이 세속의 견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수행에 정진하면 중공은 이어서 수행자의 식량을 끊어버린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행자가 식량을 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중들의 공양(供養)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찰 소유 토지에서 얻는 수입이다. 중공이 민간의 신앙을 파괴할 때 첫 번째 내원은 바로 중단되었다. 두 번째 내원에 대한 중공의 대책은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중공은 1950년 1월에 반포한 『노해방구(老解放區) 시교(市郊)의 농업토지 문제에 관한 지시』에서 사찰, 교회의 토지를 일률적으로 국유로 규정했다. 각 지역 사찰 중에 노동능력이 있는 승려는 모두 농업, 임업, 수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해야 했으며 마대공장, 직물공장, 인쇄공장, 비구니 재봉조 등에서 일해야 했다.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소승불교에서는 신도 역시 모두 동냥으로 살았으며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았다. 중국에 전해들어온 후에 선종의 4조 도신(道信)이 쌍봉산(雙峰山)에 정착하면서 500명의 무리가 모였다. 이곳은 도시와 멀리 떨어진 관계로 걸식에 어려움이 있었고 이에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자급했고 농사를 지어 봉양했다. 도신이 가르친 문도들은 ‘노동과 좌선에 노력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3,5년 경작하여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면 곧 문을 닫고 가부좌를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농업생산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가부좌와 참선을 위한 노동에 종사한 것으로 한 끼만 먹을 수 있어도 문을 닫고 가부좌를 했다.

중공이 생산 자료와 상업행위를 전면적으로 독점함으로 말미암아 사원과 도관의 생산도 도신이 제창한 농사를 통해 참선을 봉양하는 것이 아닌 세속적인 공작단위로 완전히 변해버렸고, 공산당의 경제통제하에 공산당을 받들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정권에 의지하게 되자 종교의 독립성은 끝장났고 아울러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공산당에 종속되었다. 이는 종교전통에 대한 최대의 파괴였다.


(3)육체 소멸

1955년 7월 1일, 중공중앙에서는 『깊이 감춰진 반혁명 분자에 대한 투쟁과 숙청을 전개하는데 대한 지시(關於展開鬥爭肅清暗藏的反革命分子的指示)』를 발표했다. 역사적으로는 이를 ‘숙반운동(肅反運動)’이라고 하는데 ‘불교와 도교의 대오를 순결하게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중공에 협력하지 않는 승려나 도사들을 반혁명 분자로 몰아 체포하거나 총살할 수 있게 했다. 경제적인 박탈, 정치적인 압력과 이런 종류의 ‘죄명을 나열하고 공개심판, 판결, 총살’한다는 위협 하에 수많은 승려들을 공산당과 한편에 서게 했다.


(4)종교경전을 왜곡하고 종교를 세속화

불교에서는 ‘불․법․승(佛法僧)’을 3보라 칭한다. 그중에서 ‘법(法)’이란 바로 불경을 말한다. 중공은 부처의 존재를 부정하고 고승대덕들을 탄압한 외에 경전에 대한 파괴는 더욱 은폐되었고 음험했다.

석가모니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미래 상황을 예언한 적이 있는데, 마(魔)가 승려와 거사로 전생해 내부에서 불법을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 20, 30년대에 태허(太虛)화상이 ‘인간불교(人間佛教)’라는 설을 제출하여 삼승의 공법[천승(天乘), 성문(聲聞), 원각(圓覺)]이 ‘신권(神權)을 미신’하거나 아니면 ‘소극적으로 세상을 회피’하는 데 속한다고 인정했다. ‘인간불교’는 더 나아가 ‘수행을 현대생활화’하고 ‘사원을 현대학교화’하며, ‘현대화된 불교 사업에는 마땅히 공장, 농장, 보험, 은행, 공사, 소위 공농상무(工農商貿)’ 등을 주장했다.

이렇게 ‘인간불교’의 모자를 쓰고 불교를 철저히 세속화, 통속화하는 방법은 불타의 원래 의도와는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몇천 년 동안 불교에서 요구해 온 세속욕망을 멀리 떠나 심령의 승화를 추구하는 초탈한 수행방법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티베트 불교 백교(白敎) 창시자인 밀레라빠(密勒日巴) 역시 제자들에게 “자신이 정과로 수련 성취하기 전에는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서론에서 제출한 당문화의 세 번째 유형과 마찬가지로 중공은 이미 존재하는 사조(思潮)에 ‘더욱 확대발전(發揚光大)’시키고 아울러 그것이 장악한 국가자원을 동원해 깊이와 넓이를 확장했다.

중공은 ‘인간불교’라는 각종 사이비 논설이 마침 이용하기에 아주 좋다는 것을 인식했다. 신도들의 ‘천국’에 대한 관심을 ‘인간’으로 전이시키기만 하면 중공이 쉽사리 더 많은 거짓말을 날조하여 신도들의 사상을 조종하기 쉬웠다. 이에 ‘인간불교’의 전수자이자 태허의 제자인 자오푸추(趙樸初)를 바로 중공의 가장 이상적인 대리인으로 선발했다.

자오추푸 등 사람들의 이끌림 하에 중국불교협회는 ‘국토를 장엄하고 유정물(有情物)을 이롭고 즐겁게 한다(莊嚴國土,利樂有情)’는 것을 수시로 입에 달고 있다. 사실 불경에서 언급한 ‘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불국정토를 장엄한다[예를 들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 나오는 ‘이 공덕(功德)으로 불정토(佛淨土)를 장엄하기를 원하나이다’와 같은 시구를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정물(有情物)을 이롭고 즐겁게 한다’는 것은 ‘유정한 중생’을 열반의 피안으로 제도한다는 것이지 결코 불교협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조국건설에 참가해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데 노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5)중공 종교협회를 설립하고 내부로부터 종교 비판

50년대에 중공은 완전히 그것의 조종을 받는 불교협회와 도교협회를 만들어 대리인으로 하여금 요직을 차지하게 한 후 중공의 소위 8개 ‘민주당파(民主黨派)’ 정치조직과 유사한 부속품으로 만들었다. 이들 협회는 당 조직 체계 중에서는 통일전선부의 관할에 속하고, 정부 체계 중에서는 국무원 종교사무관리국(宗教事務管理局) 관할에 속한다. 그 목적은 종교를 번영케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불교협회는 그 발기문 첫 편에서 중공이 반혁명을 탄압한 것을 열렬히 찬양하면서 아울러 “이 일체의 영도자이자 우리들의 위대하신 수령 마오 주석과 중앙인민정부에 감사드린다.”라고 하여 그 어떤 세속 조직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첨을 했다.

석가모니부처는 인도의 카필라 왕국 정반왕(淨飯王)의 왕자 싯다르타로 태어났고 출가 후에도 빔비사라왕(瓶沙王)에게서 왕위를 이양 받을 것을 제안 받았지만 싯다르타는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산속에 들어가 고생스럽게 수련했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듯이 불교의 진의는 인간의 영화나 세속의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공이 조종하는 중국불교협회는 그 성립 장정(章程) 중에 불교신도들에게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에 참가할 것을 요구한다는 종지(宗旨)를 명확히 했다.

도교의 상황도 불교와 유사했다. 2005년 통과된 중국도교협회 장정 중에서는 “시사정책학습을 강화하여 도교도들의 애국주의 깨달음과 사회주의사회에 적응하는 자각성을 제고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도교협회는 바로 『도덕경(道德經)』을 중공의 정책에 적응하게 한 것으로 노골적으로 신앙의 내포를 개변시켰다.

불교협회, 도교협회는 정치적으로 중공에 투항했기에 자연히 중공의 생각에 따라 교의를 해석한다. 종교에서는 세계는 고생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며 이런 고난은 자연스럽게 천국세계의 아름다움과 비교된다. 그렇지 않다면 석가모니가 왜 왕위를 버리고 수행하러 나섰는지 해석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중공의 종교대리인은 도리어 중공 치하의 중국을 “더는 어둡고 고통스런 곳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신도들로 하여금 진일보로 세속에 들어가도록 촉진하기 위해 각 협회에서는 모두 소위 “소극적이고 염세적이며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관념”을 비판하며 신도들이 인간천당 설립을 믿게 했다. 이런 설법은 불타가 말씀하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오묘한 법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종교협회의 이들 대리인들은 종교 중에서 쌓아온 자원을 내부에서 비판한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계율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며 아울러 이런 전장(典章)이 수많은 청춘남녀들을 해쳤다고 말한다. 이런 내부적인 비판은 중공의 외부적인 훼손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이다.


(6)종교자유의 가상 조작

중국의 소위 ‘종교자유’는 일종 사이비 자유로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바로 공산당의 지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이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며 참회하고 소원을 비는 것은 모두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의 신앙이 공산당과 충돌할 때면 반드시 공산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 자유는 종교의 세속화, 종교단체의 기관화, 종교장소의 상업화, 종교 지도자의 정치화와 간부화로 표현된다.

중국에서 종교국(宗教局)은 정부에서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부서이다. 수많은 사찰의 방장(方丈), 도관의 주지는 동시에 중공의 간부이며 그들은 행정급별로 임금을 받고 정치협상회의(政協會議)에 참석하며 매주 정치학습을 진행한다. 다른 중공 간부들과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바로 이 사람들이 입은 옷이 가사나 도포라는 점일 뿐이다. 그 마음이 속세를 벗어난 곳에 있지 않으며 4대가 모두 비어 있지 않다면 사찰과 도관은 단지 사업하는 직장에 불과할 뿐이다.


 

사이비 종교 자유의 또 다른 표상(表象)은 바로 대량의 사찰을 건립하고 각종 종교대회를 조직하며 불상을 만들고 불경을 인쇄하는 등으로 사람들에게 중공이 종교를 몹시 지지한다는 가상을 주는 것이다.

『9평 공산당』제6평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시 불교 사찰을 예로 들어보자. 이곳은 본래 아침에 종을 울리고 저녁에 북을 치며, 등불을 밝혀 부처님께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때로는 속세의 사람들이 참회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수행은 청정(淸靜)함과 무위(無爲)를 중요시하며 참회와 예배도 장엄하고 엄숙한 환경을 요구한다. 그런데 지금은 돈벌이를 위한 유람 명승지로 탈바꿈시켰다. 절을 찾아 온 사람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목욕재계한 후 진정으로 경건하게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가? 외관만 꾸미고 내포를 훼손하는, 이것 역시 중국 공산당이 세인(世人)을 미혹하는 책략이다. 불교든 기타 종교든 아니면 파생문화든지 막론하고 중국 공산당은 전통문화를 이 지경까지 타락시킨 것이다.”


오늘날 중국 선종의 조종(祖宗)인 소림사(少林寺)는 이미 관광지이자 영화 촬영지가 되었다. 소림사 방장은 소림 문화를 판매하는데 최근에는 3억 5천만 위안(元)을 들여 청정한 불지(佛地)를 휴양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풍자적으로 소림사의 ‘CEO’로 불린다. 그는 “소림사 역시 마땅히 경영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며 세계를 일주하고 각종 공연을 기획하는데 매일 기업체 사장, 정부 관계자, 국제인사 등 각종 사회 인사들 사이를 맴돈다. 그는 생활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내빈을 접대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데 쓴다. 달마조사가 전한 ‘벽관(壁觀)’ 수련법은 청정한 환경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런 환경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2006년 8월, 장시(江西)성 화청선사(化成禅寺)의 감사(监寺)인 성관(聖觀) 법사는 천안문 희생자들을 위해 불교의 천도식을 거행했다가 당국의 위협과 협박으로 사찰을 떠나야 했다. 구이양(桂陽)현 종교국의 허(何) 국장은 성관 법사에게 “당신이 먹고 마시고 오입질하고 도박을 하는 것은 다 되지만 공산당을 반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사이비 종교 자유는 진상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중공이 장악하고 있는 종교장소에 가입하게 하는데 그들이 배우는 경전은 중공이 왜곡한 것으로 그들의 바른 믿음은 중공의 세속 이익에 의해 침식되었다. 이는 모두 중공이 체계적으로 불교와 도교를 파괴하는 계책이다.

사이비 종교 자유는 동시에 공산당의 명령을 따르는 품행이 나쁜 한 무리 사람들을 사찰, 도관의 주지나 각급 종교협회의 책임자로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들이 적극적으로 중공에 협력하여 국제적으로 중공의 사이비 자유를 위해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서인데 심지어 먹고 마시고 오입질하고 도박까지 한다. 예를 들면 광저우(廣州)에 있는 두 사찰의 승려들이 싼위안리(三元裡)에 가서 단체로 오입질을 했는가 하면 광샤오사(光孝寺), 파촹사(法幢寺)와 난산사(南山寺) 등 3대 사찰의 승려들이 단체로 오입질을 했다. 또 광둥(廣東) 불교협회 회장이자 광샤오사 방장(方丈)인 밍성(明生) 화상은 사찰 원내에 ‘감로방(甘露坊)’ 소식관(素食館)을 차려 몇몇 기녀모양의 사람을 절 입구에 세워 고객을 끌어들인다.

중국은 자고로 신불(神佛)에게 구하고 절을 하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사찰에 가서 향을 피우든 어떤 소원을 빌든지 상관없이 모두들 지금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인과응보로 초래된 것임을 믿었다. 때문에 경건하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여 보완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신불께 일시적인 편의를 주시어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 인사들은 신불에게 비는 것을 왜곡하여 사찰과 도관에 돈을 보시하기만 하면 신불의 보우(保佑)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돈을 훔쳤든 탐오(貪汚)했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신불에게 비는 것이 ‘참회(懺悔)’에서 ‘돈으로 부처를 매수하고 부처와 거래하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탐관이 부처에게 빌고 승려가 오입질하는’ 이런 사이비 종교의 자유는 정교(正敎)에 대한 파괴력이 가장 크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종교는 허위적이며, 재물을 착취하고 음란한 짓을 하는 곳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자발적인 비판은 중공이 직접 비방하는 것보다 더욱 큰 영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강조해야 할 것은 유불도에 대한 중공의 비판은 이론적인 비판을 포함하여 여러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과학을 종교화하는데 이른바 ‘과학’이란 큰 몽둥이로 유불도 사상을 비판한다. 또 종교계를 개편하여 종교 내부에서 유불도를 비판한다. 공산당 내부에서는 사상 청리(淸理)를 하고 유불도를 요괴나 마귀로 만든다. 이런 비판은 장기간 지속적으로 진행한 비판으로 교육, 생활 중을 관통하며 정기적으로 정치 운동으로 강화하고 사람마다 문장을 쓰게 하거나 베껴 쓰게 하여 강제로 세뇌한다. 동시에 이런 비판은 또한 완전히 부정하는 식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전통 사상에 대해 남겨놓을 어떠한 여지도 없게 한다. 중공의 무신론과 유물론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광적인 선전 중에서, 유불도에 대한 악독한 미신화 중에서, 중공이 사악하게 대리인을 배치하여 내부적으로 전복하려는 중에서, 중공은 유불도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과 대체를 완성했다.

오늘날 대다수 중국인들은 이미 유불도가 무엇인지 모르며 오로지 ‘봉건 미신’ 한 마디면 사람들로 하여금 조건반사 식으로 멀리 피하게 만들 수 있다. 구호 식 비판이면 되는데 증명할 필요도 없다.


2. 전통관념 비판

“하늘의 운행은 강건하니 군자는 이를 보고서 자강불식한다(天行健,君子以 自强不息.)”, “땅의 세력이 곤이니 군자는 이를 보고서 덕을 두터이 하고 만물을 싣는다(地势坤,君子以厚德载物.)”『역경(易經)』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두 괘(卦)는 천지(天地)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군자는 하늘의 도(天道)에 순응하여 행해야만 자강불식(自强不息)할 수 있으며 유순하고 심후(深厚)한 도덕으로 만물을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대함에 성실하고 신의가 있고 화목해야 하며 이를 확장하여 자기 집 어른에 대한 존경과 아이에 대한 애호를 모든 노인과 아이에게 넓혀야 한다. 이를 소위 ‘신뢰를 중시하고 화목을 도모함(講信修睦)’이며 ‘내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치며, 내 아이를 사랑하여 남의 아이에까지 미친다(老吾老以及人之老,幼吾幼以及人之幼. 『맹자 양혜왕장구상』)’는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이미 정해졌으니 전통 관념의 근본도 정해진다.

중국인은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공경하며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공경하는데 이로부터 일상 생활 중에서 처세의 도가 형성되어 대대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공산당은 “전통적인 관념과 가장 철저히 결별해야 한다.”(『공산당선언』) 전통 관념에 대한 그것의 비판은 중국인의 생활 속에서 전통문화와 신앙을 철저히 제거하는데 필수적인 절차였다.

중공은 정권을 세운 초기부터 「사회발전사」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전 인민을 세뇌했다. 또한 중국이 근 백년 간 열강의 침략을 받은 원인이 전통 문화가 ‘낙후’되고, ‘우매’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는가 하면, 전통 사회를 ‘부패하고 몰락한’ 낡은 사회로 묘사했다. 또한 전통 관념 중의 신앙부분을 ‘우매와 미신’으로 표시했는가 하면, 그 중의 도덕 부분을 ‘사람을 잡아먹는 예교(禮敎)’라고 표시했다.

이리하여 중국 인민의 민족적 자존심과 자강(自强)의 염원을 이용해 중공은 전 사회적으로 이른바 ‘봉건 미신’을 타파하는 운동을 일으켰고 이른바 ‘낡은 풍속과 습관을 고치자(移風易俗)’는 구호를 내걸고 전통 신앙과 관련된 일체의 민간 활동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중공은 또 전통 관념을 ‘봉건 통치자’를 대신하여 인민을 마취시키는 정치 도구로써 ‘그들로 하여금 착취 받는 생활에 만족하게 했다’고 비판했고,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백성을 압박하는 ‘봉건 종족제도’라고 비판했는데 이는 ‘봉건 전제(專制) 제도’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 문화를 뿌리 뽑는 운동을 정치의 높이로 끌어 올렸는데 이리 하여 대규모 군중운동을 통해 민간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전통 관념의 언어와 행위를 ‘감독’, ‘검거’, ‘적발’할 수 있게 되어 철저히 뿌리 뽑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럼 여기에서 중공에게 비판받은 전통 관념의 예를 몇 개 들어 보자.

1) 하늘에 대한 경외(敬畏) 비판

중국인은 줄곧 하늘에 대한 경외를 유지해 왔다. 설사 명확한 신앙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老天爺)’을 믿는다. 중국인의 전통 관념 중에서 하늘은 비록 형상은 없지만 모르는 것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왕조의 말기나 혹은 보편적으로 사회도덕이 타락했을 때, 하늘은 곧 재난을 내려 보내는데 그 전에 경고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하늘이 상을 드리우니 길흉이 나타나고 성인이 이를 본받는다(天垂象,見吉凶,聖人則之.)”라는 것이다. 제왕이 등극한 후에는 제천(祭天)의 예를 올린다. 매년 정월 보름과 동지에는 황제가 천단(天壇)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모두 하늘에 대한 존경을 체현한 것이다.

정치생활 중에서 ‘하늘’은 나라를 다스리는 법칙을 명시한다. 공자는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뭇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為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眾星拱之. 『논어―위정(爲政)』) 일상생활 중에서 “밀실에서 속삭이는 말도 하늘은 우레처럼 듣는다(密室私語,天聞如雷.)”라고 했다. 병법(兵法), 건축, 악기 등도 모두 하늘의 규칙을 체현하는데 설사 반란을 할지라도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替天行道)’는 기치를 내걸었다.

‘하늘’에 대해, 전통 관념 중에서는 지금까지 줄곧 경외해 왔지만 오직 공산당만이 ‘하늘’과 투쟁했다.

하늘에 대한 경외는 사람의 도덕을 수호했고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렸다(人命關天)’는 생명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관점을 수호했으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념은 효과적으로 자연을 보호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공산당이 사람을 죽이고 환경을 훼손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중공이 필요로 한 것은 도리어 살인에 의지해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 속에서 그것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었다. 중공은 또 ‘하늘과 투쟁하고 땅과 투쟁하는’ 호언장담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숭배하고 자연을 파괴할 결심을 유발할 필요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나는 중이 우산을 쓴 것처럼 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我是和尚打傘,無法無天 역주: 원래 의미는 대머리인 중이 우산을 쓰면 머리카락도 없고 하늘도 없다는 뜻인데,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髮’과 ‘法’의 발음이 유사해 방자하여 거리낌 없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며 법도 하늘도 없음을 비유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본래 “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無法無天)”는 말은 폄하하는 뜻이 있었지만 용감하다는 뜻으로 변했으며 아울러 사람들을 선동하여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 정치투쟁과 환경파괴에 참여하게 했다.


2) 운명과 선악보응 비판

중국인들은 ‘하늘’에 대한 경외에서 ‘천명(天命)’관과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善惡有報)’는 것을 파생시켰다.

‘운명으로 여긴다(認命)’는 말은 중국에서 자주 쓰이는 말인데 중공은 이를 곤경에 처해 소극적으로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사실상 ‘운명으로 여긴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사람의 일을 다 한 후에 하늘의 명을 듣는다(盡人事而聽天命)’ 혹은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지만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謀事在人,成事在天)’는 뜻이다. 공자는 “생과 사는 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死生有命,富貴在天. 『논어―안연(顔淵)』)”라고 제출했지만, 여전히 54세 때 노나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사직하고 14년 동안 각국을 다니며 왕도(王道)를 펼쳤다. 그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말에는 소극적으로 세상을 도피한다는 의미가 없다.

개인 생활 속에서 ‘운명으로 여기’는 사상은 결코 개인적인 분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인생 중에서 불가항력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더 나아가 말한다면 전통 관념에서는, 사람의 운명은 전반생 더 나아가 몇 세대 전에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여 감당한 선보(善報) 혹은 악보(惡報)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운명’은 또한 늘 ‘선악유보(善惡有報)’, ‘복보(福報)’, ‘악보(惡報)’와 연계되어 있다.

『역경(易經)』에서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은 반드시 경사가 있고, 불선(不善)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다.(積善之家,必有餘慶;積不善之家,必有餘殃. 『역경―문언전』)”고 했다. 이런 관념은 사람들에게 애써 선을 행하게 하며 자신의 이후 생활이나 더 나아가 후대자손을 위해 공덕을 쌓게 한다. ‘선악유보(善惡有報)’는 또한 ‘머리 석 자 위에 신령이 있다(三尺頭上有神靈.)’, ‘인간의 사사로운 말도 하늘이 듣는 것은 우레와 같고 어두운 방 속에서 마음을 속일지라도 신의 눈에는 번개와 같다(人間私語,天聞如雷;暗室虧心,神目如電.)’ 등의 관념을 기초로 한다.

운명과 보응을 믿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애써 선행을 하도록 하고 욕망을 담담하게 보게 하며 하늘에 순응하여 행하게 할 수 있어 일시적인 즐거움을 위해 후과를 따지지 않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더욱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에도 천의가 있으며 “사람의 한 생각도 천지는 반드시 알며 선악에 보응이 없다면 건곤에 반드시 사심이 있을 것이다(人心生一念,天地必相知,善惡若無報,乾坤必有私.)” 를 믿게 한다.

왕조(王朝)가 바뀌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중국에 문자가 존재한 이래, 후대의 역사적인 큰 사건에 대한 예언을 끊임없이 남겼는데 그 정확도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런 ‘하늘을 받들고 운을 따르는(奉天承運)’ 천명관(天命觀) 역시 제왕이 집권하는 합법성의 근원이다.

중공은 ‘운명’과 ‘보응’을 ‘봉건 미신’이라고 비판했으며 아울러 이런 것을 소재로 하는 연극은 선전하지 못하게 했다. 그 근거는 실증할 수 없는 ‘진화론’과 ‘역사 유물주의’라는 가설이다. 중공은 만약 어떤 사람이 보응을 두려워한다면 절대로 줄곧 중공을 추종하여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3) 유순함과 인내, 양보 비판

“유순하며 이롭고 바르게 함이 군자가 할 바이다(柔順利貞,君子攸行.)” 『역경』에서는 「곤(坤)」괘로 대지를 묘사했다. 대지는 ‘유순’한 덕(德)이 있다. 이런 유순함은 결코 원칙 없이 외압을 참는 것이 아니라 천도(天道)에 순응해 행하는 것이다.

‘유순함(柔順)’ 속에는 ‘인내와 양보(忍讓)’의 덕(德)이 포함되어 있다. “잠시만 참으면 모든 일이 무사태평하고 한 걸음만 물러서면 가없는 세상이다(忍一時風平浪靜,退一步海闊天空.)” 한신(韓信)이 모욕을 받고도 사타구니 밑을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지 2천 년이 넘는데 이 모두는 중국인들의 ‘인(忍)’에 대해 추앙을 반영한다.

중공은 이와 반대로 투쟁을 고취시킨다. ‘공산당의 철학은 바로 투쟁의 철학이다.’,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린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협상이나 대화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탄압에 의지하며 아울러 보복하는 것을 용감한 것으로 묘사한다.

소동파(蘇東坡)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모욕을 받은 후에 즉각 검을 빼들고 일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필부(匹夫)의 일이라, 전혀 용감하다고 할 바가 못 된다.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은 갑작스런 침범에 직면했을 때 늘 진정하고 놀라지 않는 것이다. 설사 무고하게 모욕을 당하더라도 역시 자신의 분노를 통제할 수 있다. 이는 그의 흉금이 넓고 크며 수양이 깊으며 뜻이 고상하기 때문이다.”

‘인(忍)’은 전통문화 속에서 긍지, 관용, 다른 사람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 것으로 결코 나약하거나 무원칙하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중공이 주장하는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린다’는 것은 사실 흉금이 좁고 사소한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는다는 표현이다. 이는 ‘투쟁’ 정신에 매우 부합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원한을 서로 갚게 하고 사람마다 서로 적으로 대하게 하는데 이 역시 오늘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긴장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중국인들은 건(乾)을 강(强)으로 여기고 곤(坤)을 유(柔)로 여겼으며 강(强)과 유(柔)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보았다. 전통 관념 중에서는 ‘조화(和)’를 몹시 중시했다. 황궁에 있는 세 곳 큰 전각의 이름이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인 것만 보아도 화해와 화목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공 대변인은 지금도 ‘대화’, ‘협상’, ‘협력(合作)’ 등을 입에 달고 있지만 이런 거짓말은 탄압의 다른 한 측면이다. 최근에 있었던 산웨이(汕尾) 사건, 한위안(漢源) 사건, 산베이(陝北) 유전사건과 상방(上訪) 인사, 토지를 몰수당한 농민, 강제 이주민, 실업 노동자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사실 투쟁정신의 연속이며 도살을 이용해 ‘사이비 화해사회’를 만든 것이다. 다른 한편 투쟁은 이미 중공이 존재할 수 있는 주요한 기둥이 되었기 때문에 일단 대화와 화해를 찾게 되면 중공은 스스로 해체될 것이다.


 

4)전통사회질서 비판

중국인들은 천존지비(天尊地卑)의 자연 상태로부터 『역경(易經)』 중의 ‘건곤(乾坤)’과 ‘음양(陰陽)’의 대응을 일련의 가정과 사회윤리로 확장했고 다시 이 윤리 중에서 사회질서를 파생시켰다.

‘존비(尊卑)’는 중국 전통관념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정통문화에 따르면 ‘비(卑)’는 꼭 나쁜 일이 아니다. 도가에서는 줄곧 물의 미덕(美德)을 추앙해 왔다. 왜냐하면 물은 늘 ‘아래에 처하기(下處)’ 때문이다. ‘아래에 처’하는 쪽은 사랑받고 보호받는 일방이며 위에 처하는 쪽은 감당하는 일방이다. 남자는 굳세고(强) 여자는 약(弱)하며, 남자는 강(剛)하고 여자는 부드럽다(柔). 그러나 강하고 굳센(剛強)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도가에서는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兵強則滅)’, ‘나무가 강하면 부러지며(木強則折)’,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柔弱勝剛強)’는 말이 있다.

중공은 줄곧 질서를 어지럽혀왔고 사람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속여 왔지만 사회에는 중공이 의미하는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생활 중에서 한 국가, 기업, 사회단체, 가정에는 늘 책임을 맡아 일부 일을 협조하는 사람이 있고 계획을 제출하는 사람, 구체적으로 집행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일종 정상적인 사회 상태이며 또한 각 사람의 지력(智力), 체력 등 종합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은 이를 극단적으로 만들어 계급압박과 계급투쟁으로 묘사했다. 때문에 중공은 일체 존비(尊卑)와 질서를 혼란하게 했다. 이는 사실 해낼 수 없는 것으로 이런 종류의 소위 ‘해방’이란 사실 ‘혼란’을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재난, 돌림병, 굶주림, 전쟁 시기에 부녀자와 아동을 우선적으로 보호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마치 부녀자도 남자와 마찬가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이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예전에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부녀자와 아동을 가장 우선적으로 구명보트에 태웠다. 설사 그녀들의 남편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한 남자로서 책임을 감당하고 배와 함께 침몰할지라도 말이다. 이 결정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이는 우리의 내심 깊은 곳에 남녀 간의 절대적인 평등이란 없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회생활 중으로 확장한다면 한 기업 혹은 국가에는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필요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은 집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군대라면 사령관이 있고 아래에 각급 장교와 사병들이 명령을 집행할 책임을 진다. 만약 사회 직능을 말하더라도 확실히 ‘존비(尊卑)’의 문제가 존재하지만 ‘존비’가 반드시 착취와 압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상하간의 ‘인(仁)’과 ‘충(忠)’의 미덕으로 유지될 필요가 있다.

가정에서 부자자효(父慈子孝), 형우제공(兄友弟恭)을 확장하면 전통 윤리는 자연스럽게 조화롭고 질서 있는 가정과 사회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평등’은 근본적으로 말해 불법(佛法) 중의 ‘중생평등(眾生平等)’이나 도가의 ‘천도무친(天道無親)’, 유가의 ‘유교무류(有教無類)’, 서양의 ‘신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것이요 기회의 평등이지 결코 결과의 평등이 아니다.

중공은 ‘평등’을 왜곡되게 선전하여 사회적으로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했고 ‘남녀평등’을 왜곡되게 해석하여 사실상 부녀자를 박해했으며 그녀들로 하여금 강제로 여자들이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거나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하도록 강요했다. 예를 들면, 중공이 1976년 4월에 출판한 『낡은 전통 관념과 철저히 결별하자(同舊傳統觀念徹底決裂)』는 책에서 젊은 여성 15명의 문장을 실었다. 그녀들이 종사한 일은 본래 남자들이 해야 할 석탄 운반공, 도살공, 하역공 등이며 ‘돼지 잡는 도살 칼을 단단히 움켜쥐고 반공을 떠받쳤다’며 찬송하는 대상이 되었다.

중공 치하의 사회는 동시에 또 극도로 불평등한 사회이다. 중공이 모든 자원을 독점했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인민의 공복이라고 호칭하긴 하지만 사실상 인민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고 정치적인 권리와 경제적인 권리를 막론하고 관(官)과 민(民)은 전혀 평등을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5)재산을 도덕을 가늠하는 중요한 근거로 삼아

중국 정사(正史)의 첫 장을 장식하는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오제의 덕행(德行)과 이런 덕행에 대한 백성들의 인정과 존경이 기재되어 있다. 이런 덕행은 인심(人心)에 깊이 파고 들어가 수천 년을 전해왔다. 아울러 한인지역에 소수민족 지역과 다른 나라에까지 전해졌다.

중국인의 관념 중에서 도덕과 학식은 사람들이 성망(聲望)과 지위를 얻는 근원이다. 공자는 “대도(大道)가 행해진 세상에는 천하가 만인(萬人)의 것이었으며,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골라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으며, 서로 신뢰를 다지고 화목함을 누렸다(大道之行也,天下為公,選賢與能,講信修睦. 『예기(禮記)―예운(禮運)』)”라고 말했다. 즉 한 사람의 인품이 관리로 선발되는 중요한 지표였다.

한대(漢代)에 실행한 인재추천제도인 찰거제(察舉制)의 천거표준은 다음과 같았다. “덕행이 높으며 지조와 절개가 깨끗하고 학문에 능통하고 경전에 박식하며 법령에 통달해 의혹을 풀 수 있어야 하며…(德行高妙,志節清白;學通行修,經中博士;明達法令,足以決疑…….)” 이외에 또 구비해야 할 것이 ‘질박(質樸), 돈후(敦厚),겸손, 절약’의 미덕이었다. 위진(魏晉)시대에 이르러 관부에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실행할 때도 도덕은 관리를 선발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였다. 수당(隋唐)에 이르러 과거로 선발할 때에도 유가도덕에 대한 이해정도는 응시자들이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는가 여부와 마찬가지로 과거급제의 선결조건이었다.

그러나 중공이 정권을 세우자 덕망이 높은 향신(鄉紳), 행회(行會)의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탄압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한 개인의 출신성분이 사회자원을 획득하는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었다. 사람의 도덕이란 본래 그 개인의 사상행위에서 결정되지만 중공에 이르러서는 도덕이 한 계급의 집단적인 지표가 되었다. “누가 곤궁하면 누가 영광이고 누가 치부했으면 누가 좋지 않다.”라고 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자연히 정확함과 정의를 대표했고 피압박자를 대표했으며 ‘반란에도 도리가 있음’을 대표했고 ‘혁명’을 가장 단호하고 가장 철저히 함을 대표했다.


한 개인의 빈궁(貧窮)과 부귀는 본래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근면히 일하고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또는 제멋대로 돈을 낭비해 집안이 망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본래 전답이 많이 있었음에도 몇 년 후 걸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그 순간 단칼에 계급을 구분해버렸다.

부귀한 사람에 대한 증오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인들로 하여금 빈궁으로 다른 사람의 자본을 오만하게 바라보게 했다. 다른 한편 중공이 어떤 사람을 타도할 때면 단지 이 사람이 지주나 혹은 자본가라고만 하면 되며 나머지 말은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부귀는 ‘착취’를 대표하며 ‘탄압’을 대표하고 ‘죄악’을 대표했다.

수십 년 후 공산당은 자신이 스스로 세상을 뒤집어 여러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라고 외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는 부귀를 죄악시하지 않으며 도리어 빈궁을 수치로 여긴다. 이때에 한 사람의 좋고 나쁨, 성공 여부는 도덕에서 벗어나 사람의 부유한 정도로 판단한다. 누가 돈이 많으면 그가 바로 능력이 있는 것이며 그 돈을 훔쳐왔거나, 빼앗아 왔거나, 부정부패로 뇌물을 받았거나, 몸을 팔았거나 혹은 영혼을 팔았든지 상관이 없다.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笑貧不笑娼)’는 결과는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모으고, 그런 후 미색에 빠진 가운데 기득권자의 신분으로 중공의 통치를 인정하게 한다.


6) 저속한 당문화(黨文化) 선양

중공 치하의 수많은 사람들은 고상하고 우아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비루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중화민족은 본래 예의의 나라(禮儀之邦)로 불러왔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명을 강구하고 예의를 중시했다. 사람이 서로 만날 때는 손을 모으고 읍(揖)했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중공은 도리어 사람들에게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손에는 못이 박히며 온몸에 혁명충(이)을 기르라.”고 외쳤다. “손은 시커멓고 발에는 쇠똥이 묻어야”지만 가장 혁명적이다. 지식인들은 예의를 중시하지만 중공은 ‘까막눈’을 선전한다. 문명과 야만 사이에서 중공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야만을 선택했다.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예의를 중시하지 않고 함부로 가래를 뱉으며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들고 돈이 있건 없건 모두 말을 했다하면 저속한 말이나 음담패설이다. 해외에 나온 후에도 수많은 중국인들은 금연구역에서 흡연하며 종교장소에서 희희낙락하며 현지 풍속을 존중하지 않는다. 비행기, 호텔, 차량이나 선박 등에서 큰소리로 전화를 걸며, 아무데서나 신발이나 양말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며,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새치기를 하는 등등이다. 심지어 많은 국가의 관광지에 가보면 현지인들이 화장실에 특별히 중국어로 써 붙인 “용변 후에는 물을 내려주세요.”라는 팻말을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중공이 전통문화를 파괴한 결과이다.


7)비판받은 기타 관념

중공의 비판은 늘 이성적인 비판이 아니며 사상비판에서 인신공격으로 변질된다. 그런 후에 “무릇 적들이 반대하는 것이면 우리가 옹호하고 적들이 옹호하는 것은 우리가 반대한다.”는 억지와 삿된 말로 비판받는 사람의 사상을 단번에 매도해버린다. 비판받는 사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을 말하자면 역시 아주 간단한데, ‘노예주계급’, ‘지주계급’, ‘자본가계급’, ‘수정주의’ 등의 모자를 씌우면 그만이다.

중공은 공자를 비방하는 것을 통해 유가의 ‘중용(中庸)’사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극기복례(克己復禮)’,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 등을 부정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글자들을 보고도 생각하는 것이란 원래의 내포가 아니며 높은 톤의 방송, 천지를 뒤덮는 큰 누명, 대자보 또는 비판받은 사람의 비참한 말로이다. 이를 통해 두려움이 생겨나 자각적으로 이런 사상들과 ‘명확히 경계선을 긋는다.’

유가는 ‘인(仁)’을 주장하는데 바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己所不欲,勿施於人.)” 그러나 중공은 ‘인(仁)’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이 하기 싫으면 남에게 강요하라(己所不欲、要施於人.)”는 것으로 변질시켜버렸다.

중국인들은 ‘중용’을 숭상한다. ‘중용’은 중공이 해석하는 것과 같이 ‘두루뭉술함’, 교활함, 양다리 걸치기가 결코 아니다. 그 본래 의미는 바로 ‘늘 중도를 지킨다(常守中道)’는 것으로 천명을 존중하고 따라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중에는 학습박식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판단하며, 독실히 행함(博學之, 審問之, 慎思之, 明辨之, 篤行之.)”과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 형제, 친구”간의 관계를 잘 처리하여 ‘지극한 덕(至德)’에 도달하며 수신치국(修身治國)의 도리를 완전히 함을 포함한다. 그러나 중공은 ‘중용’의 본뜻을 완전히 왜곡하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원칙을 저버리는 견유(犬儒)로 만들어버렸다. (계속)

(판권은 대기원에서 소유하며 전재(轉載)를 환영하나 내용을 고칠 수 없습니다.)

중문: http://epochtimes.com/gb/6/9/25/n146528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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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당(黨)문화』사설 연재 [2]
관리자
07-03-03
3 제2장 체계적인 사상개조(상) [4]
관리자
08-02-07
2 제1장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대체 [3]
관리자
07-04-02
1 『해체 당문화』서론 [3]
관리자
07-03-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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