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차오창칭(曹長靑ㆍ중화권 정치평론가)
[SOH] 베를린 올림픽과 베이징 올림픽은 독재정권이 주도하고 예술가가 홍보를 맡아 강권정치를 도금하고 미화시킨 올림픽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비슷하다.
나치 독일의 경우, 여성 감독인 레니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올림피아’와 ‘의지의 승리’는 파시즘 미학의 경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공산주의 중국에서는 강권으로 천하를 통일한 집권자를 극찬한 영화 ‘영웅’, ‘황후화’ 등으로 정권의 신임을 얻은 장예모(張藝謀ㆍ장이머우) 감독이 올림픽 개막식 감독을 맡게 됐다.
리펜슈탈과 장예모는 비록 같지 않은 국가에서 태어나 같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공통점은 독일 나치와 공산주의 미학이 얼마나 비슷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 최하층 예술가에서 권력의 지지를 얻기까지
최근 출판된 리펜슈탈의 전기를 보면, 그녀는 베를린의 한 빈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인물이 되려고 했다. 16세 때에는 영화를 찍기도 했으나 실패했으며, 그 뒤에는 무용수가 되었고 19살 연상인 테니스 선수와 동거하기도 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남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중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한 유태인 재력가를 통해 무용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었고 무릎 부상으로 무용수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영화 ‘성스러운 산’에 출연하여 히틀러의 마음에 들게 되면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리펜슈탈이 ‘성스러운 산’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일생동안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그녀에게서 우상숭배, 권력숭배와 정복에 대한 욕망을 발견하고 매우 만족했다. 때문에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뒤 리펜슈탈은 나치 선전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파시즘 미학을 펼쳐 보이는 것으로 최고의 유명세를 누리게 됐다.
장예모 감독 역시 빈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산당의 정치운동으로 농촌에서, 공장에서 일을 하며 갖은 고생을 겪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나중에 영화대학에 입학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붉은 수수밭’, ‘홍등’, ‘국두’ 등 황당한 시대 속의 소인물들의 비참한 운명을 묘사한 작품도 많았다. 그는 이러한 작품으로 해외에서 수상하며 유명해 졌으나 국내에서는 중공 당국에 의해 작품이 상영 금지되면서 연속 좌절을 겪었다.
나중에 그의 작품은 갈수록 ‘얌전’해졌고 정권의 이념에 완전히 부합되는 ‘영웅’, ‘진시황’(연극), ‘황후화’ 등 영화의 제작을 통해 공산당 당(黨)문화를 선전하는 총 지휘관이 됐으며 리펜슈탈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애완견으로 변질됐다.
미학에 대한 추구
리펜슈탈은 ‘올림피아’와 ‘의지의 승리’에서 파시즘 미학을 남김없이 보여줬다. 그녀는 군중들이 외치는 모습, 군인들의 대열, 높은 산과 파도, 기념비, 길거리 행진 인파 등 획일적인 대형 장면을 통해 질서의 위엄, 권력의 숭고함, 의지의 힘을 보여주었다.
‘의지의 승리’에서는 군중, 깃발 바다, 정연한 나치의 예포 등을 묘사해 국가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를 미학의 극치로 표현했다. ‘올림피아’ 중에서는 올림픽 정신을 나치 정신으로 바꿔놓아, 가장 개인의 자유를 표현해야 할 올림픽을 단체적으로 열광하는 파시즘 영웅 축제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전투’, ‘승리’ 등 단어가 난무하는 나레이션은 나중에 벌어질 아우슈비츠 집단학살과 유럽정복 후의 대학살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파시즘 미학의 특징을 통제, 복종, 투쟁, 고통에 대한 숭상과 변호라고 말했다.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는 지도자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고,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며 게르만 민족을 위해 분투하고 어떠한 고통이든 모두 참고 전진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전체주의의 원대한 목표가 휘황찬란한 것이며 희생과 헌신의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리펜슈탈의 작품에서는 기세 높은 민중의 모습, 도전이 절대 불가능한 질서, 개인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폭력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리펜슈탈의 예술적 유전자가 장예모에게 옮겨간 것일까, ‘영웅’과 같은 영화의 촬영 수법과 미학 구도는 거의 제2의 ‘의지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정도로 큰 장면, 높은 기세와 많은 군중이 출현한다. 정연하고 획일하며 위풍당당한 진시황의 대군, 겹겹이 둘러싸인 높은 성, 산처럼 꿈쩍하지 않는 무사들의 대열은 도전이 불가능하고 절대 넘을 수 없는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며, 어떠한 도전이나 이견, 획일성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모두 빗발치는 화살에 의해 사망하고 말 것이며 개미처럼 깔아뭉개 없어질 것임을 표명하고 있다.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에서 히틀러가 뉘른베르크에 돌아온 것을 마치 메시아가 인간 세상에 돌아온 것처럼 화려하게 묘사했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에서 진시황의 출현, ‘황후화’에서 부왕이 조정으로 돌아온 모습 역시 모두 절대 권력의 강림으로 묘사됐고 황제의 지고무상, 절대지존, 절대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모든 사람들은 놀라고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경배했으며 모두 개미들처럼 획일적으로 움직이고 크기가 같은 나사못처럼, 개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도구와 같은 물건처럼 묘사됐다.
리펜슈탈의 카메라 앞에서 나치의 손과 팔, 군화, 깃발과 박수소리는 모두 획일적이다. 장예모의 진시황 대군도 만개의 검이 사살을 위해 획일적으로 움직였다.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죽이자!”, “바람이다, 큰 바람이다!” 등 외침소리마저 획일적이다. ‘황후화’에서는 약을 달이고 물을 가져다주는 궁녀의 동작도 획일적이며 심지어 여인들이 드러낸 가슴마저 똑같이 쪄낸 찐빵처럼 똑같은 사이즈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장예모의 이런 과장된 획일성은 ‘정연한 아름다움’을 통해 시각적인 충격을 형성했다. 이러한 충격적인 미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사람들은 일치성, 통일성, 일관성에 도전할 수 없는 위엄과 그속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심리적인 암시를 받게 된다. 이러한 미는 획일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그러한 미를 파괴하며 용납할 수 없다는 것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전체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개인의 의사와 권리를 압도적인 미학의 힘을 빌려 묵살해 버리려는 것이다.
장예모 영화는 색깔을 가장 중시하며 파시즘의 미학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인’은 녹색이고 ‘영웅’은 붉은 색이고 ‘황후화’는 황금색이다. 장예모 감독은 영화마다 한 가지 색깔을 극치로 표현했다. 스크린 전체를 가득 채우는 동일한 색채 역시 앞에서 말한 획일적인 장면과 일맥상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 전체주의를 극대화했다. 녹색이든, 적색이든, 황금색이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색상을 유아독존적으로 존재하게 했다는 점이다. 무소부재하게 이용된 단일한 색상 안에서 다른 색상들은 눈을 자극하는 존재로 되어 용납되지 않았다.
장예모 감독의 이러한 수법은 모두 파시즘 의식형태와 일치하며 전체주의를 지고무상의 위치에 올려놓고 개성을 멸시하고 말살하려는 것이다.
전체주의를 위한 획일성 외, 리펜슈탈은 웅장한 경기장, 높이 솟은 기념비 등을 좋아했다. 이러한 것들은 숭고한 느낌, 권위적인 느낌을 강조할 수 있고 파시즘 미학이 필요로 하는 장관, 신비, 권력 이러한 요소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장예모 감독이 자금성, 중국 고대 궁전을 카메라에 담기 좋아하는 것도 휘황한 건축물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영웅’의 마지막과 ‘황후화’의 결말에 모두 자금성이 나오는데 궁전이 대표하는 권력의 승리를 상징한다.
국가 의지에 대한 추구
리펜슈탈의 영화에서는 국가의 숭고함,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 지도자의 위대함이 과장되게 나타난다. 장예모의 영화에서도 천하의 성인, 중화민족의 휘황함, 황제의 위엄이 과장되었다. 그들의 영화에서 개인의 존재, 개인의 자유 등은 보잘 것 없고 설자리가 없었으며 운명적으로 실패하고 소멸되게 되어 있다. 영화 ‘영웅’에서도 황제에 반항하는 협객들은 결국 모두 훼멸에 이른다. 또 ‘황후화’를 보면 설사 왕후, 태자와 같이 귀한 존재라 하더라도 부왕의 의지를 위배한다면 모두 재앙을 피하기 어렵다. 부왕에게 속하는 대군의 무서운 기세와 일제한 외침소리는 중국판 ‘의지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리펜슈탈에게 있어서 독일의 강대함, 게르만 민족의 굴기는 모든 것을 초과한 것이며 지도자는 국가와 민족의 화신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히틀러가 바로 독일’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장예모로 놓고 말하면 ‘영웅’이 천하에서 최고이다. 수만 명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격투 끝에 최종의 승리자는 모두 ‘영웅’이다. 반항하는 자들은 여지없이 짓뭉개 지며 행운스럽게 살아남았더라도 결국은 ‘영웅’에게 항복하며 자결한다. 영화 ‘영웅’에서 진시황을 살해하려던 자객은 천하를 통일하려는 그의 마음에 감동되어 손에 들어온 기회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게다가 죽을 때 그들은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이러한 국가의식이 리펜슈탈로 하여금 경기장을 ‘영웅의 축제’로 만들게 했으며 개인지간의 경쟁을 국가 의지의 대결로 만들게 했다. 독일선수가 상을 받고 독일인들이 기립하여 환호하며 ‘독일이 모든 것보다 높다’고 노래할 때, 개인의 승리는 전체주의가 요구하는 승리, 국가의지의 승리, 독일의 영광으로 되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의지의 승리’를 ‘독일의 승리’로 번역하기도 했다.
장예모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의 미학적 경향은 어렴풋이 짐작이 가게 한다.
효과
‘폭력의 세기’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강권주의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군중과 선전이라고 말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대중의 마음을 가장 잘 사로잡을 수 있는 수단인 영화를 선전 도구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는 나치를 선전하고 사람들을 세뇌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무수한 독일인들이 영화관에서 리펜슈탈의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좌석에 일어설 때 모든 사람이 히틀러가 영웅이며 하늘이 파견한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게 됐다는 논평과 기록이 있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히틀러를 위해 죽음을 포함한 모든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현재에도 중국 인터넷에서는 “다시 한 번 이 두 작품 중에서 강대한 힘, 질서와 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논평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중국 교수들은 학생들이 ‘의지의 승리’를 보고 나치로 변할까봐 강의시간에 다큐 전체를 방영하길 주저할 지경이다. 일부 중국 네티즌들은 리펜슈탈을 위해 변명하면서 “신화에 대한 추구가 그녀의 생명을 신화로 만들었다. 평생 운동과 미를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자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를 숭상하고 영웅을 숭상하며 폭정에 영예를 주고 전체주의를 최고화하며 개인을 말살하는 장예모의 영화는 개인의 자유와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는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무참히 짓밟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난 2003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한 리펜슈탈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나치를 선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작품은 순수한 역사적 다큐멘터리였다고 고집했다. 그리고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것이 없다면서 폴란드에 있을 때 군인이나 평민의 시체를 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학자 바흐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수십 명의 평민을 학살할 때 리펜슈탈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현장에 있는 사진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올림피아’는 히틀러의 생일선물로 바쳐져 히틀러의 생일에 방영식을 가졌다. 히틀러는 이에 화답하여 “이 작품은 우리 당의 강대함과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이런 작품은 유일무이하며 아무것도 이에 비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 리펜슈탈은 “유태인들이 영화를 평론하면 나는 영원히 성공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고 보라,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며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히틀러도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정권을 잡으면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또 기자들에게 “나에게 있어서 히틀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매우 소박하지만 남성적인 힘을 가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의 한 학자는 미국에서 발간된 리펜슈탈의 전기에 대한 서평에서 “명성, 금전, 권력이 그녀로 하여금 나치와 거래를 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리펜슈탈의 일생을 보면 그녀의 강인한 기질(72살에 잠수를 배우기 시작했음), 정복에 대한 욕망, 일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성격과 자율성(어떠한 남자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실천함)은 모두 그녀가 정권에 아부한 것만이 아니라 나치와 통하는 기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녀는 처칠이 자신에게 영화를 찍으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찍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서서도 그녀는 여왕과 관련된 영화를 찍으려 했다. 아름답고 용감한 여전사인 여왕이 나중에 이집트 영웅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영웅은 여왕을 사랑하여 시체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려 한다. 리펜슈탈은 “2천 마리 백마를 동원해 전쟁터에서 싸우는 장면을 연출할 것”이며 큰 장면을 통해 ‘의지의 승리’에 뒤떨어지지 않는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하면서 열정적이고 대담하며 용기로 충만 된 그 여왕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런 기질은 히틀러와 거의 같았다. 때문에 그녀는 전설 속 히틀러의 내연녀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신적인 동반자였음은 틀림없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 국가관도 정권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언제 정권에 추파를 던져야 하는지, 언제 공개적으로 충성을 표시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억지로 아부만 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는 그러한 이념을 숭상하고 있었고 리펜슈탈과 같은 정복 심리가 있었다. ‘영웅’을 위해 작곡한 탄둔(譚盾)은 TV에 출연해 이렇게 장예모를 평가했다. “그가 바로 영웅이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어 했으며 매우 자신감에 넘치고 매우 좋은 수단이 있다.”
창작과 모방, 강인함과 유연함
리펜슈탈과 장예모는 그러나 적어도 세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창의적이며 선이 예리하고 캐릭터가 신선하며 화면이 율동적이지만 장예모의 영화는 짝퉁 흔적이 역력하다. 리펜슈탈의 다큐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흑백에서 칼라로 변하면서 국가권력의 이미지를 더 빛나게 도금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일 것이다.
다음은 두 사람의 기질이다. 리펜슈탈은 원시적인 야심, 자신을 영웅화하는 마음이 있기에 나치는 사라졌어도 그녀는 건재할 수 있었으며 ‘여왕의 꿈’도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예모의 야심은 벼락부자와 같이 저력이 부족하여 정권이 받쳐주는 데 힘입어 생존하고 있다. 때문에 정권이 사라지면 그의 야심도 설 자리가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특징을 보면, 리펜슈탈의 영화는 군대, 기율, 강철, 기계, 승리로 강인한 세계를 연출해 냈지만 장예모의 영화는 중국 특색의 유연함을 체현했다. 리펜슈탈이 정예군의 강인함을 표현했다면 장예모는 규방의 부드러움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으며, 리펜슈탈이 국가의 위풍을 과시했다면 장예모는 작은 무리들의 옹졸함을 발산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만약 리펜슈탈의 영화에 굉장한 장면과 신비, 권력이 넘쳤다면 장예모의 영화에는 음흉, 음모, 암흑, 독기와 잔인함이 집결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한 학자는 리펜슈탈이 “사악에게 아름다운 가면을 씌워주고 자신은 일생 동안 순결한 아름다움 속에서 살았다고 말한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장예모는 폭군에게 영웅의 가면을 씌워주고 13억 중국인들을 ‘영웅’이 제패하는 세계에서 살게 만들려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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