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자는 1951년 톈진(天津)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했으며 산시(山西)성 과학기술협회 비서장을 맡고 있었다. 지난 10월 22일, 자자는 단체 관광으로 대만을 방문한 기간, 단체를 이탈해 중국공산당과의 결별을 선포하고 중공 관료들에게 공산당 탈퇴를 호소했다.
지난 2일은 자자(賈甲)가 대만 정부로부터 망명 신청을 거부당한 뒤, 홍콩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한 마지막 날이다. 합법적 체류일이 지나면 그는 수시로 대륙으로 송환되어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용기와 양심으로 중국인들을 격려한 자자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가 무슨 용기로 중공을 이탈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중국에서의 우월한 생활, 교수, 전문가라는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민주화를 추구하는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했을까?
자자의 홍콩 비자가 만료되기 하루 전날, ‘대기원시보’는 이 전기적인 인물을 특별 취재했다. 첫 인터뷰에서 자자는 어린 시절 목격한 공산당의 잔학성을 이야기했다.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40년 세월 얼룩져>
두려움과 배고픔, 자자는 이 두 가지가 그의 40여 년 세월을 함께 했다고 말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저의 할아버지는 돈 많은 자본가였고, 아버지는 국민당 공군 간부였습니다. 중공이 정권을 빼앗은 뒤, 우리 가족은 미처 대만으로 탈출하지 못한채 톈진에 남았고 중공 당국의 최우선 숙청 대상이 됐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비판, 투쟁 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우리 집은 매우 비좁았지만 아버지가 비판 받을 때 서있는 형당(刑堂)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우리 집에 몰려와 중간에 의자 하나를 놓고 우두머리가 앉은 뒤, 고함을 지르면서 아버지를 심문하기 시작했지요. 아버지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뭇매를 퍼부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 가족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그 장면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친구들, 아버지와 같은 국민당 군인들은 모두 총살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도시 톈진으로 갔고 능력이 있는데다 이미지가 비교적 좋았기 때문에 공산당은 아직 국민당 세력이 남아 있는 남부에 가서 정권을 수복하거나, 중공 군대에 가입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공산당이 이처럼 아버지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포보다 더한 것은 배고픔>
자자는 현재 대륙 인민들이 모두 공산당이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적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잔혹해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사실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고 자자는 말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저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은 매일 비판, 구타당하고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출신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었으며 영원히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공산당의 잔학성은 배고픔으로 사람을 통제한다는 점입니다. 저와 저의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를 닮아 키도 크고 몸집도 컸으나 식량을 겨우 12.5kg 배급받았습니다. 농촌은 더 심해 아예 굶어 죽는 일이 속출했지요. 나중에 문화혁명이 끝나서야 농촌에서는 3, 40키로의 껍질을 벗기지 않은 쌀을 배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껍질을 벗기고 나면 무게가 5키로 정도 줄어 정말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살았지만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그 정도의 식량만 가지고, 그마저도 식량 배급소에서 어떻게든 덜어내는 바람에 어릴 때부터 40세가 되도록 한 끼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형장으로 보내>
자자는 아버지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때를 말하면서 눈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형장으로 가게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얻어 왔는지 옥수수 가루 한줌을 작은 냄비에 넣어 죽을 끓여드렸습니다. 형장으로 가지만 총살당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굶으면서 비판과 구타를 당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배고픔을 덜어 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가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있었는데, 아버지는 죽을 다 드시고 나서 곁에 있는 저를 보시더니 평소와 달리 그릇에 묻은 죽을 깨끗이 핥지 않으셨습니다. 가시기 전에 자식에게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자 그릇 바닥에 남은 죽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당시 저는 너무 배고팠지만 그릇을 가져다 핥을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대륙에서 유일하게 먹지 않고 남겨놓은 음식입니다. 나중에 죽이 말라붙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저는 집에 있는 낡은 베개를 찾아 그 안에 들어 있는 연꽃 껍질을 꺼내 물에 섞어 마셨습니다. 결국 속이 아프고 토하고 설사까지 했지요. 어렸을 때는 이런 것을 자주 먹었는데 먹은 뒤에는 대변을 보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자자의 부친은 다행히 공산당에게 맞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국민당 관료, 시달림에 자살>
자자는 국민당 관료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우리 이웃에 한 국민당 관료가 살았는데 뭇매를 당하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죽을 생각에 건물에서 뛰어 내렸지만 당시 건물들은 기껏해야 2,3층 높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이웃들은 상처를 입은 그를 발견했으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어차피 국민당 반동분자이니, 마땅히 처벌 받아야 하고 공산당이 불쌍히 여겨 때려죽이지 않고 총살시키지도 않으니 운이 좋다고 여길 뿐이었지요. 그는 떨어져 죽지 못하자 녹이 쓴 면도칼로 대동맥을 끊었습니다. 피가 콸콸 흘렀지만 하지만 아무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어 그는 그 상태로 죽었습니다.”
<어린이도 산채로 맞아 죽어>
자자는 초등학교 어린들도 마오쩌둥 석고상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산채로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
“학교 담임선생님이 쓰는 작은 책상에 마오쩌둥 석고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반 간부는 홍위병이었는데, 책상 모서리를 돌면서 옷이 걸리는 바람에 퍽 소리와 함께 마오쩌둥 석고상이 산산이 부서졌지요. 반 아이들 모두가 놀랐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마오쩌둥 초상에 문안을 드리고 절을 하며, 점심밥을 먹을 때는 밥그릇을 들고 ‘태양이 떠오르니 동방이 붉네(東方紅,太陽昇)’라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홍위병은 너무 두려워 손에 경련이 일고 있었는데 잠시 후 다른 반 홍위병들이 들어와 그를 그대로 때려 죽였습니다.”
자자는, 어릴 때부터 ‘공산당이 온다,’ ‘경찰이 온다’ 소리를 들으면 가족들이 모두 두려워했다고 하면서 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대륙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말했다.
<모든 대륙 인민이 걸어온 길>
자자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자 대륙인민들이 걸어온 길이며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중공의 시달림을 받은 경력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저는 이런 지나간 일을 말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오늘 저는 홍콩 인민들이 저를 구해줬기에 비로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이제는 말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잔혹성은 전대미문의 것이지만 홍콩과 대만 사람들은 그 과정을 잘 모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처음 이런 얘기들을 하게 됐습니다.”
자자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57년 동안, 무수한 중국인들이 박해로 사망했고, 자신과 가족들이 겪은 불행은 수억 중국인들이 겪은 불행 중에서 아주 보편적인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자자는 어린 시절을 선명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어디 가나 비판 투쟁 집회가 있었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 비판하고 투쟁했는데 심지어 자식이 아버지를, 형이 동생을 고발하는 일도 너무나 흔했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사람을 너무나 많이 죽였기에 중국 인민들이 중공을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 때문에 이 같은 황당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당 간부들을 포함해 모든 중국 대륙인들이 피눈물로 쓰여진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계속..>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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