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태국에서 다시 대만으로 입국해 제3국으로의 망명을 기다리고 있는 자 비서장은 그가 안정한 생활을 되찾아 중국 민주화운동을 추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국제 사회가 도움을 주길 희망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어느 서방 국가가 중공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 비서장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락할지가 가장 주목되고 있다.
이번에 중국을 탈출해 탈당을 선언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자 비서장은 홍콩을 떠나기 전, 본지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공산당에 대한 대륙 민중의 증오와 중국 민주화의 실현을 바라는 소원을 보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가오즈성(高智晟)이 체포된 사건에서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 비서장은, “나는 공산당에 가오 변호사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지식인도 과감히 나섰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으며 가오즈성에 대한 탄압으로 형성된 공포를 해소시키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자 비서장은 그가 이날을 위해 일찍부터 아들을 해외에 보내는 등 20여 년 동안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고 강조했다. 현재 중공에 의해 폐쇄된 산시성(山西省) 과학기술전문가협회 공식 사이트도 자 비서장이 개설한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종교 신앙이 없는 자 비서장이지만 전반 탈출 과정에, 신이 돕고 있는 것처럼 신기하게 위험에서 벗어난 경험이 세 차례나 있다고 말했다.
자 비서장은 또 그동안 도움을 줬던 파룬궁을 포함한 사회 각 단체와 인사들에게 감사드린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지만, 중국 탈출 후 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이 자원 봉사자로써 대륙 인사들의 탈당을 돕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 아직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운명을 주시하고 있으므로 매우 만족한다. 나는 이미 많은 당 간부들에게 중공을 이탈할 것을 호소했다.”
앞에서 발표한 인터뷰에서 자 비서장은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거쳐 출신을 포함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누차 투쟁 받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번에 본지는 계속해서 자 비서장이 유명해진 과정과 중공을 이탈한 과정을 인터뷰했다.
▶공문 한 장으로 고립돼
문화혁명이 끝나자 자 비서장은 명예를 회복했다. 중공은 문화혁명이 잘못된 투쟁이라고 말했지만 자 비서장에게 밀렸던 월급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 뒤, 원래 예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자 비서장은 진둥난(晋東南) 가무단을 떠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 읽기 좋아하고 글 쓰고 연설하는 데 능했던 자 비서장은 현지에서 꽤 유명해졌으며 많은 학교에서 그를 교사로 초빙했다.
1983년, 자 비서장은 베이징 상업대학에 입학해 점차 전문가, 교수로 되기 위한 길로 접어들었다. 그의 전공은 마케팅, 경제 관리 방면의 것이었는데 마침 공산당이 경제 건설을 시작하며 도처에서 교육 세미나를 여는 상황이라 자 비서장은 더욱 유명해졌고 초청 강의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녔다.
1999년, 산시성 창즈시에 전문가 협회가 설립되자 자 비서장은 초대 법인 대표 비서장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3일도 채 지나지 않아, 공산당원도 아니고 권세도 없었던 자 비서장은 현지 관료에 의해 밀려나게 됐다. 자 비서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당황했고 서둘러 신문사에 갔습니다. 신문사 관리는, ‘창즈시 당위원회와 정부가 정식으로 공문을 발표해 당신의 비서장 직위를 부인하고 다른 전문가 협회를 설립했습니다. 전문가와 기타 직원들도 모두 그쪽으로 보냈고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창즈시 부시장, 당위원회 조직부장, 당위원회 서기 등 몇몇 사람들이 협회의 권력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저는 창즈시에서 이미 살 수 없었고 아무도 저를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창즈시 당국이 회의를 열고 저를 경계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원래 제가 거느리기로 되어 있던 수천 명 엘리트, 고급인력, 전문가, 학자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가 사무실에 출근한 지 3일이 지났지만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지요. 저는 1천여 위안이라는 거금을 들여 전화기를 설치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걸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어린 아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일을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즈시에서 십몇 년 동안 살면서 오랫동안 노력한 성과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유사한 경험은 자 비서장에게 너무나 많았다. 이번 탈출 과정에도 신의 도움이 있었던 것처럼, 과거에도 자 비서장은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 기적처럼 매몰되지 않고, 비 당원의 신분으로 점차 관리로 되었으며 산시성에서 전문가들의 자격을 심사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 동안, 자 비서장은 자신이 이미 중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시 어린 시절의 공포를 자 비서장에게 가져다 준 것은 파룬궁을 위해 변호하면서부터 였다.
“한번은 비서가 자리에 있지 않아 제가 직접 문서를 만들러 복사·인쇄 업체를 찾아갔지요. 그 업체 한 아가씨가 파룬궁이 정말 담이 크다, 감히 중공과 대항한다 등의 말을 하고 있기에 저는 파룬궁이 어떤 단체라는 것을 말해주고, 보다시피 공원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는데 신체를 단련하려는 것 외 더 무엇이 있겠는가고 말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에 두 명의 국가안전부 요원이 있었는데 산시성 해외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내막을 알고 있던 사람이 알려 준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저에게 다가와 저를 붙잡고 어디서 근무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공안에 전화를 걸어 저를 체포하려고 했지만 업체 사장이 막아 나서면서 자기의 체면을 봐서라도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사장의 아들은 국가안전부 사람들과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자주 그곳에 와서 일을 맡겼던 것이었습니다. 가게 안의 다른 직원들은 다른 한 국가안전부 요원의 앞을 막으며 저에게 빨리 떠나라고 재촉했지요.”
“집에 돌아온 후, 저는 저녁에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수년간의 노력이 이번에 또 다시 물거품이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복사 업체 사장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해서야 저는 비로소 시름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산시성 과학기술전문가협회 비서장을 지내고 있었고, 파룬궁 수련하지 않았지만 파룬궁을 공개적으로 지지만 해도 탄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9평공산당’은 신서(神書)
어렸을 때의 경력은 자 비서장의 마음속에 중공 폭정에 반항하는 씨앗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자 비서장이 진정으로 민주 의식을 가지도록 한 것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 인터넷 봉쇄 돌파를 통해 접속한 ‘대기원시보’였다. 그는 특히 대기원시보의 사설 ‘9평공산당’을 높이 평가했다. 자 비서장은 이 서적은 귀중한 책이며 신서(神書)라고 말했다.
“제가 이 책을 신서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인들은 건망증이 매우 심합니다. 중공이 십몇 년 동안 ‘개혁·개방’을 해 왔기에 사람들은 공산당이 역사상 저지른 죄악에 대해 다소 희미해졌습니다. 게다가 공산당이 50여 년 동안 진행해온 잔혹한 탄압, 특히 6.4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침통한 교훈은 대륙 인민들에게 전대미문의 충격을 주었습니다.”
“때문에 대륙 인민들은, ‘공산당은 무섭다, 감히 맞설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대륙에서는 누구도 감히 공산당을 담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9평공산당’ 이 서적은 공산당의 죄악을 알게 하고 공산당에 대해 분개하게 하고 있습니다.”
▶고위층 관리들도 중공 비난
자 비서장은 현재 대륙의 많은 민중들, 고위층 관리들을 포함해서 모두 중공을 비난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省) 당위 서기의 친척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역시 고위층 관리였지만 공산당을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TV를 봐서 알겠지만 북한 공산당이라는 것들은 서로 서로 공격하면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투쟁이 끝나지 않았어.’ 그는 또 저에게 귓속말로 ‘자자, 공산당에게는 사리를 따지는 것이 먹히지 않아, 공산당은 법이 없어’ 라고 말했습니다.”
“산시성 기타 고위층 관리들 역시 이러했습니다. 어느 한 관리는 중앙 공문을 저에게 보여주면서 ‘(중공이) 또 이 따위 짓을 하는군요.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진실한 숫자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오즈성 변호사가 용기 줘
유명한 인권변호사 가오즈성이 당국에 체포된 사건은 자 비서장이 이번 탈출을 결심한 직접적인 요인이 됐다.
“제가 이렇게 한 것은 가오즈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오즈성을 말하는 이유는, 미국 의회가 그를 위해 중국에 공문을 보낼 정도로 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없었던 일입니다. 때문에 아무도 공산당이 감히 가오즈성을 건드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공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를 계속 감금하고 있습니다. 미국만이 중국공산당을 제약할 수 있다고 믿었던 중국 지식인들은 사실상 이번 사건으로 인해 공산당에 대해 더욱 두려움을 갖게 됐습니다. 중공은 가오즈성을 없애면 대륙을 안정시킬 수 있고 감히 나설 사람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서둘러 출국을 결정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공산당에게 직위가 더 높고 명망이 있으며 상당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식인이 또 한 사람 나섰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가오즈성을 죽이려고 하지만 지금 살아있는 이 자자가 그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저는 제가 나섬으로써 중국공산당의 가오즈성에 대한 탄압으로 민중에게 형성된 극도의 공포를 해소시키려 했습니다.”
▶사이트 개설은 증거 남기기 위한 것
왜 국내에 있을 때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묻자, 자 비서장은 “저처럼 대륙에서 지위와 명망 있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나서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자 비서장은 이날을 위해 그는 아들을 먼저 출국시키고 산시성 과학기술협회 공식 사이트를 개설하는 등 남몰래 준비를 계속 해왔다고 설명했다.
“많은 공산당 고위관리들의 신상 정보와 관련된 문서를 모두 제가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외국에 갔을 때 저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자료들을 모두 웹사이트에 올려놓았지요. 특히 공산당은 ‘자자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고위층 간부들을 관리할 수 있었겠는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러분은 사이트에 접속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산시성의 모든 고위층 관리, 대륙의 많은 전문가의 개인 자료가 모두 등록돼 있습니다. 서명과 도장도 모두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가 자격증서는 모두 제가 담보인으로 되어 발급한 것입니다.”
▶중공, 전처(前妻) 이용해 설득
친중공 언론이 자자가 부인과의 갈등으로 출국하게 됐다고 보도한 것에 대해 자 비서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25년 전에 이미 그녀와 이혼하고 거의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저번에 제가 대만에 있을 때, 그들은 전처와 저의 친구들을 시켜 저에게 전화를 걸게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빨리 돌아오라고 했지요.”
“처음에 저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저에게 전화가 왔다고 말하기에 가서 받았습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저는 전처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지금 대만에 있느냐고 물었지만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어, ‘지금 방안에 모두, 모두...’라고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녀의 방에 경찰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엄숙하게, ‘나는 이미 당신과 이혼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일을 당신은 상관하지 말고 상관할 수도 없다. 나 역시 당신에 대한 일을 묻지 않겠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또한 다른 전화도 받지 않았지요.”
▶중공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아
불투명한 앞날에 대해 자 비서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자자의 생명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공산당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저를 마음대로 짓뭉개고 총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필연코 수많은 당원 간부와 지식인 및 전체 국민의 봉기를 일으켜 공산당 폭정을 전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중공을 이탈한 원인은, 세계 각국 정부에 공산당이 강대하지 않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공산당 관리들, 공산당 고위층은 현재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베이징과 중난하이(中南海) 중앙경위국(警衛局) 군인들이 그들을 협박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때문에 최근 후진타오도 베이징 군구(軍區)를 정돈, 재배치하는 것을 중요 업무로 삼고 있으며 특히 중앙경위국 군인들이 그를 잡으러 오지 않을까 더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군인들은 모두 농촌 출신으로 집에서 배를 곯다가 출로가 없어 입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해외로 나온 뒤, 제가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대만 국민들에게 공산당의 속임수에 들지 걸려들지 말고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최근 대만에서 있었던 정치계의 불미스러웠던 일들을 떠벌리면서 대륙 민중에게 대만의 민주주의가 좋지 않다고 선전했는데 그 뜻인즉 그래도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만 국민들은 단결해야만 안정된 정국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탈당으로 ‘두려움’ 해결
자 비서장은 그가 해외로 탈출해 공산당과 결렬한 것은, 많은 당원 간부와 중국 인민에게 ‘두려움’을 해결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누구나 공산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공산당은 즉각 끝장난다”, “다른 한 각도에서 말하면, 당원 간부들이 공산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공산당 탈당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라고 말했다.
“저는 탈당서비스센터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탈당을 할 때, 실명을 사용하든 익명을 사용하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여 제한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탈당을 통해 많은 당원 간부들의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사람이 탈당한 사실을 공산당이 알았다 하더라도 박해가 그리 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저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총살하고 투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탈당을 하면 고위층 관리였던 사람으로 말하면 분명 관직을 잃고 높은 대우도 없어질 것이며 집도 땅도 잃을 것이고 공돈을 벌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이러할 뿐이며 가장 먼저 탈당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10명의 관리가 탈당하고, 100명의 관리가 탈당한다면 공산당은 그들의 권력을 박탈할 수 없습니다. ”
“또 만약 5천 명이 탈당한다면 공산당은 감히 그들을 박해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5만 명이 공개 탈당한다면 전국에 5백만, 5천만이 탈당할 것이며, 공산당 당중앙, 후진타오를 포함한 고위층 관리들이 의심할 바 없이 따라서 탈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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