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올해 2월은 중공이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라 부르는 덩샤오핑 사망 10주년이면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15주년 기념월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떤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중공 당국은 성대한 기념 행사를 치를 수 있었지만 의외로 조용하게 지나갔으며 일부 기념 활동도 소규모로 조용히 치러져 임무 완성식 같은 느낌을 줬다.
지금까지도 덩샤오핑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흔히 “덩샤오핑이 없다면 개혁개방도 없었을 것이며 오늘의 경제 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라 불러야할 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의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칭송이 반영하는 것은 모두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노예근성에서 오는 것이며 사고할 줄 모르는 머리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심지어 “덩샤오핑이 없다면 지금 나에게 오토바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덩샤오핑이 없다면 내가 장가를 갈 수 있겠는가?”라고까지 한다.
일부 사람들은 “덩샤오핑이 중국을 개변시켰다”고 하는데, 사실 덩샤오핑이 개변한 것은 단지 마오쩌둥의 당내 노선에 불과하다.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이 기본’이라는 원칙을 주장하면서 민중을 진압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했으며 피비린내 맡기를 좋아했다. 덩샤오핑마저도 한 때 이런 마오쩌둥에 의해 박해를 받지 않았던가?
때문에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은 뒤, 마오쩌둥의 이러한 극단 노선을 개변시킨 것은 사실 조금도 놀랄 바가 못 된다. 특히 마오쩌둥이 타도했던 당내 고위층 간부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덩샤오핑이 당내에서 명망을 높이고 인심을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역사적으로도 아주 흔한 수법이라 할 수 있다. 왕권을 잡은 새 황제들은 늘 전 조대 황제가 살해했던 대신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줌으로써 궁중의 평안을 도모했다. 예를 들면, 남송 시기, 송효종(宋孝宗)은 송고종(宋高宗)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됐던 악비(岳飛)의 누명을 벗겨줬는데, 이는 송고종의 고명함이라기보다 훗날을 위해 부자 사이에 미리 잘 짜놓은 대본 같이 느껴진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치 한 사람이 악역을 맡고 다른 한 사람이 선역을 맡듯이, 마오쩌둥은 악이란 악은 다 행하고 덩샤오핑은 꿀 발린 말이란 말은 다 했던 것 같다. 그러니 덩샤오핑이 인심을 끌어 모으기란 당연히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를 함에 있어서 덩샤오핑도 마오쩌둥과 다를 바가 크게 없었다.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초기에 일으켰던 ‘반우파투쟁’도 마오쩌둥이 계획하고 덩샤오핑이 실행했다. 때문에 ‘우파’들에게 누명을 벗겨 줄 때도 덩샤오핑은 그들에게 잘못을 ‘시정’할 뿐이지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반우파투쟁’의 취지에는 잘못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마오쩌둥의 죄는 스탈린보다 훨씬 크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판해 훗날 소련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감싸주면서 앞으로 자신이 진행할 탄압과 도살에 공간을 남겨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덩샤오핑이 주도한 1989년 6.4 천안문 학생민주화운동은 고르바초프가 이끌었던 소련 민주화의 거대한 변화와 거의 같은 시기 일어났지만 진보와 퇴보, 광명과 암흑의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6.4유혈진압 사건 이 하나만으로도 덩샤오핑의 모든 공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덩샤오핑 자신도 이를 알기에 임종 전에 바바오산(八寶山-중공 고위층들이 안장되는 공묘)은커녕, 골회마저도 남기지 말라고 당부했다.
경제 건설을 놓고 말한다면, 경제를 경시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태도로 임했던 사람은 동서고금의 통치자들 중 오직 마오쩌둥 밖에 없다. 중공 당내에도 경제건설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펑더화이(彭德懷), 저우언라이(周恩來), 린뱌오(林彪), 류사오치(劉少奇) 등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 이들 중 어느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 죽은 뒤 정권을 잡았다 하더라도 모두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덩샤오핑만이 특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판단이다.
오히려 경제를 건설하는 과정에, 덩샤오핑의 ‘인치(人治)’와 제한되고 독재적인 사고방식은 중국사회에 커다란 후환을 남겨 놓았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은 자신을 ‘돌을 두드리며 강을 건너는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는데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깊게 생각할 줄 모르는 그의 한계를 잘 설명해 줬다. 이로 인해 중국사회는 제도적인 개혁으로부터 시작해 순서 있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 한 가지만 봐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져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책임 없는 주장은 중국 사회에서 ‘명언’이 됐지만 권력 감독 체계가 잘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이 한 마디는 관리와 상인들의 결탁, 권력과 재물의 거래를 초래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부유해진 사람들은 중공 관리와 그들의 가족들뿐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부호들 중에 90%이상이 공산당 고위층 관리의 자녀라는 통계도 나와 있다.
현재 중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차이가 바로 덩샤오핑의 이 한마디 말이 초래한 악과이다. 어떤 탐관오리들은 감옥에 갇힌 후 심지어 ‘일부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져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이 말을 이용해 심문에 반항하고 있는데 코메디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인치(人治)와 독재가 동반된 덩샤오핑의 집권 방식은 외국인들마저도 모두 정확히 분석했다. 중국에 20여년 거주한 한 미국 관리는 “중국의 문제는 사실 매우 간단해 500여 개 특권층 가족들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이익 집단을 형성한 뒤, 이러한 국면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를 실현하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십 몇억 되는 중국인들의 모두 이 작은 집단의 인질이 되었다”고 간단명료하게 분석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덩샤오핑이 구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중공(중국공산당)이다. 사실 중공도 구하지 못했으며 중공이라는 방대한 몸체의 가장 꼭대기 부분만 구했을 뿐이다. 중공이 잠시 구원을 받아 연명하고 있을 때 중국 민중들은 오히려 도탄 속에서 헤매었고, 중공이 ‘굴기’를 외치고 있을 때 중국 민중들은 오히려 ‘세개의 큰 산’이라 불리는 의료, 교육 및 거주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실 중국 국민들이 부딪친 어려움이 어찌 이 세 가지 문제에 그치랴!
최근 마오쩌둥 탄생이나 사망 기념일 때마다 중공은 행사 규모를 축소해 왔는데 현재는 이미 쑨중산(孫中山) 기념행사보다도 규모가 작아졌다. 덩샤오핑도 이제는 중공이 극력 기피하는 인물이 됐으며 심지어 후야오방보다 뒷전에 놓이게 됐다. ‘인심은 자연히 공정함을 되찾게 할 것’이라는 속담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장쩌민이 죽은 뒤, 기념식을 치를 것인지 치르지 않을 것인지, 기념할 것인지 비판할 것인지는 더욱 예측하기 어렵다. 비열한 수단으로 중국 정권을 잡고 있는 중공은 이처럼 자신마저도 집권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자신이 없다.
‘수치를 아는 사람은 용감한 자’라는 속담도 있는데, 현재의 중공 고위층들이 수치를 알고 고치길 바라며 수치를 알고 행동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장쩌민과 같은 암담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길 희망해 본다.
소문에 의하면, 2년 전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의 생가를 방문하게 됐는데 기념식수 제안을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공 정치국의 9명 상무위원 중 기타 8명은 모두 덩샤오핑의 생가를 방문해 덩샤오핑의 조각상 앞에 기념식수를 심었다고 한다. 후진타오의 이러한 특별한 행동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진 것인지 아닌지 사람들은 매우 궁금해 하고 있다.
글/ 천포쿵(陳破空, RFA 특별해설원)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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