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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티베트 학살의 근원은 중공의 생존위기(上)

관리자  |  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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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영(문화평론가)


[SOH] 지난 3월 14일 티베트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평화적인 시위대에 중공군이 총격을 가해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유혈참극이 발생했다.


현재 이 문제는 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고 국내에서도 중공(중국공산당)의 학살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민중들의 자발적인 항의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나 언론에서는 중공의 만행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며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심지어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조차 이번 유혈사태의 근본이 중공의 생존위기에서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장족(藏族)과 한족(漢族)간의 민족모순으로 간주하거나 우발적인 폭력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본고에서는 이번 3.14 유혈학살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중공 체제위기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2008년 3월 티베트


2008년 3월 10일은 1959년 티베트인들이 중공의 폭정에 항거한 지 49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티베트의 3대 사원에서는 라마승들을 중심으로 수도인 라싸에서 평화행진을 벌였다. 당시 이들의 요구는 3가지로 첫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 둘째, 시짱(西藏)에 대해 명실상부한 민주화를 시행하라, 셋째, 티베트 고유의 전통문화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평화적이고 정당한 시위에 대해 현지 중공 정부는 ‘반혁명, 반사회주의, 분열주의’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운 채 바로 시위 가담자들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이렇게 평화적으로 해산했으며 첫날 행진은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되었다.


다음날인 3월 11일 티베트 대형 사찰의 고승들이 전날 시위대 체포에 대해 라싸 공안기관을 찾아가 항의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공은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거나 성실하게 대화에 나서는 대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11일과 12일에도 라마승들을 중심으로 한 티베트인들은 지방 정부 및 공안부문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다 시위 나흘째인 3월 14일 라싸 민중들이 시내에 모여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 철저한 민주와 자치의 실행, 티베트 문화를 보존할 것을 요구하며 평화적인 집회를 가졌다. 바로 이날 중공군이 전격 투입되었다. 중공군은 티베트 군구(軍區) 군인들과 무장경찰은 물론이고 탱크와 장갑차 등 기계화사단을 동원해 라싸 시내 중심가를 완전히 봉쇄했다. 봉쇄직후 불과 몇 분만에 중공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경고사격도 없이 본래 평화적으로 민중들의 의견을 표현하려던 집회에 대해 무차별적인 유혈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포시점이 중공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위 티베트인들의 방화와 약탈이 있은 후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곧바로 강경진압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번 유혈 사태의 모든 책임은 학살원흉인 중공에 있다.


그렇다면 티베트인들은 왜 끊임없이 중공 통치에 항쟁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2. 티베트 사태 주요 일지


본래 티베트 민족(藏族)은 몇 천 년 전부터 고유의 전통과 문화, 종교와 신앙을 유지해왔으며 1951년 중공에 의해 강제합병되기 전까지 사실상 독립국으로 존재해왔다. 몽골족의 원(元)나라와 만주족의 청(淸)나라 군주들은 모두 라마교를 아주 존중했으며 티베트 고승들에 대해 스승으로 모시고 깍듯이 예우했다. 예를 들어 청나라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건륭황제 당시 달라이 라마를 수도에 초빙해 황제와 동등한 대우를 했는가하면 황실 별장이 있던 열하(熱河)에는 라싸를 본따 만든 티베트 사찰 단지를 조성하기도 했다. 당(唐)나라 때 티베트와 중국의 교류가 시작된 이래 중공과 같이 무력을 앞세워 신앙을 파괴하고 경제를 파탄 내며 민족을 말살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중공은 1949년 정권을 찬탈한 이후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1951년 티베트를 강제로 합병해버렸다. 1959년에는 소위 ‘대약진(大躍進)’운동과 ‘인민공사화(人民公社化)'를 추진해 티베트인들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중공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반대가 격화되었다. 이때 티베트 사상 최대의 독립 봉기가 발생해 약 9만 명이 사망했다. 어쩔 수 없는 정황 하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달라이라마 14세는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을 이끌고 인도 다람살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1965년 중공은 기존의 티베트 영토를 조각내 서쪽 절반만 소위 시짱(西藏) 자치구로 정하고 나머지는 칭하이성이나 윈난성 등에 강제로 합병시켰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 시짱자치구란 티베트가 아니며 중공이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분열정책의 희생양일 뿐이다.

 

한편 1966부터 10년 동안 몰아친 미친 듯한 문화대혁명 기간에 거의 모든 티베트 불교 사찰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승려들이 학살당했다. 1988년과 89년, 동유럽과 구(舊) 소련의 붕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중국 전역에서 민주화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때 티베트에서도 대규모 독립운동이 발발했지만 중공에 의해 강제로 진압 당했다. 당시 달라이라마의 비폭력 평화노선에 감동 받은 서방에서는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2008년 현재, 앞서 언급한 것처럼 티베트 유혈학살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중공이 티베트를 강제 병탄한 후 2600개에 달했던 불교 사찰은 70개로 줄었으며, 11만 명에 달하던 승려는 7천명정도로 격감했다고 한다. 즉, 90%이상의 사찰과 승려들이 중공의 탄압에 의해 인위적으로 감소된 것이다. 이는 오천년 중국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종교탄압이다. 중국 역사상 불교에 대한 4대 법란(法亂)을 다 합해도 중공의 파괴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그런데 티베트의 사찰은 본래 티베트인들의 돈으로 건립된 티베트 고유의 문화유산인데 중공이 무슨 권리로 이것을 파괴하는가.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현재 티베트의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서는 티베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이는 티베트 젊은 세대들에게 티베트 고유문화를 빼앗아가는 것과 같다. 달라이라마가 중국 공산당의 이런 정책을 ‘문화도살(文化屠殺)’행위라고 부르는 것이 절대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계속..)


※ 외부 필자의 글은 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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