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임영(문화평론가)
[SOH] 지난 3월 14일 티베트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평화적인 시위대에 중공군이 총격을 가해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유혈참극이 발생했다.
현재 이 문제는 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고 국내에서도 중공(중국공산당)의 학살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민중들의 자발적인 항의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나 언론에서는 중공의 만행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며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심지어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조차 이번 유혈사태의 근본이 중공의 생존위기에서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장족(藏族)과 한족(漢族)간의 민족모순으로 간주하거나 우발적인 폭력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본고에서는 이번 3.14 유혈학살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중공 체제위기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전 편에 이어..)
3. 중공의 살인 역사
중공이 이번 티베트사태를 도발한 원인을 분석하기에 앞서 우선 정권 탈취 이후 중공이 걸어온 살인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1949년 중공 정권 탈취
→ 1950-1952년 토지개혁과 반혁명(反革命) 탄압: 약 5백만 명의 공무원 및 지주 학살
→ 1950년대 초: 삼반(三反)과 오반(五反): 도시의 상공업자,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약 32만 명 숙청
→ 대기근: 1959-61년 사이에 4천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
→ 1966-76 문화대혁명 : 중공 관방의 통계에 의하면 420만 명이 체포되어 172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7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사망.
→ 1989년 6.4 천안문 학살
→ 1999년 파룬궁 탄압 & 티베트 진압
→ 2008년 티베트 유혈진압
이상에서 보다시피 중공은 거의 8-10년을 주기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대량 학살을 자행해왔다. 이에 대해 일찍이 마오쩌둥(毛澤東)은 “7-8년에 한 번씩 문화혁명을 해야 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중공이 이렇게 끊임없이 살인과 폭력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태생 자체가 폭력혁명을 기반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폭력이 없으면 정권 자체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이 새로운 세대가 성장해 올라오면서 이전의 학살기억을 망각하기 마련이라, 중공은 끊임없이 새로운 구실을 만들어 학살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20년만 보자면 1989년 6.4 천안문학살이 있은 지 10년 후인 99년 파룬궁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자행했고, 9년 만인 2008년 3월 또 다시 학살을 시작했다.
문제는 사람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애호하며 폭력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폭력만으로는 정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에 중공은 그 폭력적인 본질을 거짓선전선동이란 껍데기로 포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때면 ‘혁명의 선봉대’, ‘영도계급’ 등으로 찬양하다가 그들의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대량 해고로 내몰았다. 정권을 잡기 전 농민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때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내세우며 온갖 사탕발림을 하다가 정권을 잡자마자 불과 몇 년도 안 돼 농민들에게 준 토지를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만들어 수탈했으며 최근에는 급기야 전 국토를 공산당의 사유물로 만들어 공산당 간부들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다.
중공이 자랑하는 소위 항일투쟁(抗日鬪爭)이란 것도 실상을 알고 보면 가소롭기 그지없다. 중공은 지금까지 줄곧 공산당이 항일투쟁을 주도해왔다고 역사를 왜곡해왔지만 실제 항일 전쟁의 주력은 국민당 군대였다. 국민당 군대는 당시 170여만 명의 군대가 있었고 전쟁 중 희생된 장군만도 200명이 넘는다. 하지만 공산당의 병력은 채 7만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적도 거의 없다. 단지, 배후에서 국민당 정부를 이간질하면서 끊임없는 거짓선전으로 공산당의 이익만을 챙겼을 뿐이다.
항일투쟁 성과의 80%이상은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 공로이며 공산당이 한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정권을 잡은 후 중공은 국민당이 항일에 나서지 않았다고 비난하면서 공산당이 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거짓 선전했다.
사실 중공의 주기적인 정치운동 폭력사용은 중공이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혁명투지를 흘러넘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폭력과 거짓말을 끊임없이 강화하며 익숙하게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공포감을 조성하고 통치를 유지해온 것이다. 이것이 지난 60년에 걸친 중공 통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89년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적수공권(赤手空拳)의 학생들이 자고 있는 텐트에 탱크를 밀고 들어가 피바다를 만들었음에도 단 한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고 뻔뻔하게 잡아뗐다. 뿐만 아리라 99년 파룬궁 탄압 때도 탄압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날조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번 티베트 사건은 그것의 재연에 불과하다.
3. 날조의 대가, 중국공산당
중공은 정권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드는 대가이다. 이때 중공의 기만술책에는 95:5의 법칙이 통용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민대중을 95%:5%로 분열시키고 공산당에 반대하는 5%에 속하면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며 이를 통해 나머지 95%의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유발해 이후 공산당의 명령에 굴복하게 하는 수법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6.4, 파룬궁, 티베트이다.
그럼 여기서는 89년 6.4와 99년 파룬궁 탄압 시 중공이 실제로 행한 악랄한 수법에 대해 알아보자.
1) 89년 6.4 학살의 예
89년 6.4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탕바이차오(唐柏橋)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중공은 유혈진압을 개시하기 전에 자신들이 투입한 사복경찰들을 이용해 민중들의 폭력난동을 유발하고 이를 빌미로 유혈진압을 합리화시켰다고 한다.
마치 1933년 히틀러가 독일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르고 나서 그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후 탄압한 수법과 동일하다. 이것은 중공이 폭력탄압을 개시하기 전에 사용해온 일관적인 수법이다.
89년 당시 시위대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감을 유발한 사건이 소위 4.22 폭력사태이다. 이는 쉽게 말해 시위대가 상점을 약탈하고 살인방화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중공도 어쩔 수 없이 폭력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의 근거가 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떠했을까? 4.22 당시 분명 시안(西安)에서는 경찰차가 불에 탔고 상점이 파괴되었으며 창사(長沙)에서도 여러 상점이 파괴되었다. 중공 매체에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시위대와 학생들의 폭력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런데 시위 장면을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상점을 파괴하고 방화할 때 현장에는 정복을 입은 경찰이 단 한 사람도 없고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명의 폭도들(사실은 특수 임무를 띠고 잠입한 사복경찰)이 앞장서서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면 분위기에 편승한 일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폭력을 사용한다. 이후 앞장서서 파괴하던 중공 특무들이 빠져나가고 난 후 뒤에서 따라했던 순진한 시위대들은 모조리 체포되었다.
이후 중공은 모든 책임을 이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이들을 폭도(暴徒)로 규정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전면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이것이 중공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더 심한 것은 89년 6.4 당시 중공 매체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불에 타죽은 병사들이 있는 것처럼 크게 보도한 적이 있다. 당시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사병이 나중에 살아서 귀향한 일이 있는데 사실 그는 다른 곳에 격리된 채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중공 매체에서는 이들이 불에 타 죽었다면서 시위대의 폭력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당시 중공이 처한 상황을 분석해보면, 전 세계 공산진영이 순식간에 붕괴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철저하게 파탄되자 중공은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무언가 정권을 연장할 희생양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중공의 마수에 걸려든 것이 부정부패 척결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순진한 대학생들이었다. 덩샤오핑이 6.4 학살을 명령하면서 “20만 명을 죽여서라도 20년의 (중공의)안정을 가져오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위기감이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중공의 무리한 탄압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고 이후 중국인들은 더 이상 공산당의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와 중공에 대한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중공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개혁개방의 길로 매진해 돈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라면 계급의 적이라면서 치를 떨던 공산당 간부들이 공공연히 인민의 재산을 수탈해 부자가 되었으며 현재 중국 재벌의 90% 이상이 공산당 고위 간부와 그 자제들(소위 태자당)이다.
도덕이 극심하게 타락하던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진선인(眞善忍)을 강조하는 파룬궁(法輪功)이었다.
2) 99년 파룬궁 탄압의 예
92년 중국 길림성 장춘(長春)시에서 시작된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이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선양하는 심신(心身)수련법이다. 이때는 ‘인간천당’ 건설이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벗어던진 공산당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각박한 현실에 염증을 느낀 수많은 중국인들이 무언가 정신적인 대안을 찾고 있을 때였다. 5천년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인 진선인(眞善忍)을 근본 가르침으로 하는 파룬궁은 뛰어난 건강효과와 더불어 중국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단기간에 1억 명 이상이 수련하는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공산당원보다 더 많은 수련인들의 숫자에 놀란 장쩌민 일당은 인성을 강조하는 파룬궁의 가르침이 중공의 당성(黨性)에 위배된다고 보고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물론 이 이면에는 약 10년을 주기로 돌아오는 중공의 생존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5%에 해당하는 희생양이 필요한 것과 맞물려 있다.
장쩌민 집단은 파룬궁 탄압을 위해 다음과 같은 수법들을 총동원했다.
(가) 파룬궁의 명예 실추: 전면적인 정보 통제(매체 봉쇄)와 중공에 유리한 언론만 일방적으로 보도해 파룬궁과 수련생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실례로 1999년 7월 이후 중공 CCTV에서는 매일 7시간에 걸쳐 파룬궁을 비방하는 방송을 했다. 비방 내용은 주로 파룬궁 창시인인 리훙쯔(李洪志)선생에 대한 중상모략, 온갖 악독한 사건에 모두 파룬궁이란 이름표를 붙이는 것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신병을 비관해 자살한 사람에 대해 파룬궁을 수련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거짓을 날조했고 수십 명을 죽인 미치광이 살인마 푸이빈 사건 때는 푸이빈이 파룬궁을 수련해서 이런 짓을 하게 되었다고 날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날조된 내용을 중공 통제하의 2천여 개 매체와 통신사를 통해 중국 국내외에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99년 하반기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무려 30만 건에 달하는 파룬궁 비방 보도가 있었다.
이중 가장 악랄한 사건이 바로 2001년 1월 천안문에서 발생한 소위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파룬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음)을 등장시켜 천안문에서 분신자살연극을 벌인 뒤 이중 몇 명은 사복경찰이 때려죽였다. 그리고는 이를 촬영해 국내외에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파룬궁을 수련하면 이렇게 된다고 떠벌렸다.
▲2001년 중공 당국이 천안문에서 분신자살했다고 주장하는 파룬궁수련자들은 모두 수련자가 아닌 당국이 매수한 인물로 밝혀졌다. 좌측 인물은 앉는 자세로 보아 중공 공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오른쪽 어린이는 분신자살시도로 화상을 입어 기도를 절제했다며 기자의 인터뷰를 받고 있다.(명혜망)
그런데 화면을 유심히 보면 금방 자작극임을 알 수 있다. 그 넓은 천안문 광장에서 유독 자살사건이 벌어진 장소 부근에만 경찰들이 소화기와 담요를 들고 준비하고 있고, 카메라는 아주 안정적으로 미리 예측하고 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다. 슬로우 비디오 화면을 보면 자살극에 참여한 여인(류춘잉)을 때려죽이는 괴한이 등장하고 소위 수련생이란 사람이 파룬궁의 기본적인 동작도 이해하지 못한다. 심한 화상으로 기도를 절제한 아이가 병원에서 말을 하는가 하면 CCTV 기자가 생명이 위태로운 중환자를 인터뷰 한다면서 일상복을 입고 중환자실에 들어가 마이크를 들이댄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모순들은 이 사건이 모두 중공이 날조한 자작극임을 분명히 한다. 실제로 이 사건은 나중에 유엔 국제교육발전기구에 의해 중공의 자작극임이 판명되었다.
(나) 재산몰수, 벌금 부과 등으로 생존권을 박탈: 파룬궁을 수련하는 수련생들에게 재산압류, 차압, 해고 등의 방법을 동원해 경제적으로 파탄시켰다.
(다) 고문과 무차별적인 살육을 자행: 육체적인 소멸.
현재까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것만 3천명이 넘으며 수만 명의 수련생이 비공식적으로 장기가 적출된 후 화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직간접적으로 중공의 박해를 받은 사람만 수천만 명에 달하며 이들의 가족까지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라) 국가재정과 군대를 동원 : 파룬궁 탄압을 위해 중공이 동원한 것은 공안, 검찰, 사법, 행정은 물론이고 외교, 군대 등 거의 모든 국가기구와 재정이 총동원되었다. 이를 위해 중공은 파룬궁 탄압을 전문적으로 추진하는 초헌법적인 조직인 ‘610’사무실을 만들어 각급 공산당 조직을 총동원했다.
이상이 9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공의 파룬궁 탄압사례이다. 처음에는 중공의 보도에 반신반의 하던 많은 사람들이 계속되는 중공의 거짓선전에 속아 넘어갔고 아직까지도 수많은 중국인들 및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중공에 속아 진상을 모르면서 파룬궁을 오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파룬궁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중공의 이런 거짓선전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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