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레오나르도 빈티니(대기원 영문판 과학칼럼니스트)
[SOH] 플라톤은 ‘시간은 영원에 대한 움직이는 영상이다’ 고 말했다.
우리는 운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과거는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믿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단순히 환상일 수 있을까? 저명한 영국의 물리학자는 어떤 특별한 차원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시간의 종말: 물리학의 다음 혁명”의 작가 줄리안 바버는 에지 재단과의 인터뷰에서 ‘시간을 정확하게 잡으려 한다면, 시간은 항상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이 시적인 말이 방안에 울려 퍼지는 동안에도 바버와 그 인터뷰어는 1초 전의 그 자신들과 어떤 관계도 없다.
바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시간을 잡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것이 새로운 이론은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끈 이론(string theory)처럼 대중성을 가져본 적은 없다.
시간이 없는 우주에 대한 개념은 수많은 과학자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고, 그런 모델은 현대 물리학인 우주를 설명하면서 부딪히는 많은 패러독스를 설명하는 발판이 되었다.
우리는 시간이 본질적으로 선형적이며,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고 또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인식일 뿐만 아니라, 고전 역학이 우주 내의 모든 수학적인 함수들을 동원해서 분석하여 얻은 것이다. 그러한 개념이 없었다면 인과율이나 두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은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 다뤄졌을 것이다.
바버에 의해 제안된 시간의 불연속성에 대한 이론은 그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많은 점들로 구성된 우주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지금들’은 과거로부터 오고 미래에서 사망할, 휙 지나가는 순간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지금’은 감지할 수 없는 특별한 차원으로 구성된 영원한 우주의 모자이크 내에 존재하고 있는 수백만의 지금들 사이의 하나일 뿐일 것이고, 각각의 ‘지금’은 다른 ‘지금들’과 미묘한 방법으로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며, 그 관계는 이웃의 ‘지금’과 가장 돈독할 것이다. 그들 모두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단순성과 복잡성이 혼합된 바버의 이론은 빅뱅 이전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바버는 시간의 개념이 정수(整數) 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수는 동시에 존재하고 숫자 1이 숫자 20 앞에 존재한다는 것에는 무슨 특별한 것이 없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지금 팔을 움직이는 이동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아주 작은 ‘지금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이 기사의 처음을 기억하겠는가? 어떻게 내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겠는가? 왜 내가 아침에 일어나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에게 속하는 일을 하러 가겠는가? 미래가 이미 거기에 있다면 왜 지금 이렇게 애쓰며 살아가겠는가?”
그런 딜레마들은 강에서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간다는 환각때문에 일어난다. 우리는 시간이 없는 우주를 가운데가 초콜릿으로 채워진 긴 바닐라 과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 과자를 얇은 조각으로 잘게 자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하나의 ‘지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운데 있는 초콜릿 부분이 우리를 나타낸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우리의 조각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며, 그 전후의 조각들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그 과자를 보고있는 관찰자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조각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예를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내’가 이 문장을 쓰기 시작했던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단락의 앞부분부터 여러 단어들을 썼던 사람들과 명백한 관계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서로 독립적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들’조차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문장 구조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한 뭉텅이로, 부스러기가 없이 전체 과자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버의 이론이다. 우주 공간에서 미래는 이미 거기에서 전개되어 있고, 우리의 과거의 매 순간 역시 존재한다. 기억 속에서가 아닌 살아있는 현재로서..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철학처럼 고정된 틀을 부수는 것일 것이다.
미리 결정된 과정을 따라오는 현명한 자는 우주 초콜릿 과자 가운데에서 행복한 얼굴을 하며, 우리의 이 독특하고 극히 작은 ‘지금들’을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거대한 우주시계 바늘이 우주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공간의 매 초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초,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미 시간이 공간과는 분리될 수 없는 ‘사물’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세계의 표준 시각을 표시하는 전문가조차도, 시계가 결코 시간을 측정할 수 없는 것처럼 세계의 시간은 임의로 규정된 시계바늘의 째깍거림으로 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일한 대안은, 우리의 과거가 여전히 존재하는 공간이 있으며 우리가 행한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영원을 ‘일시적인 환상’으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인슈타인도 말할 것이다.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구분이라는 것이 고집스럽게 지속되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 對중국 단파라디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