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은 우리와 무엇이 비슷한가?
*과거의 역사(歷史)가 비슷하다.
우리는 월남의 역사와 너무나 닮은꼴이다. 너무나 닮은 나머지 어떤 사람들은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이라고 하는데, 월남은 [반만년, 황룡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국가 체제를 이룬 역사적 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朝貢)을 바치다가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주변 민족으로서 끝까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점 역시 같다. 또한 전 세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한 점은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과 더불어 한국과 월남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역사와 인명을 한자로 기록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 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양국이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보통 400-500년으로 긴 편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그것은 월남 민족이 우리 민족보다도 분열(分裂)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강대국의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 남북이 분단되어 있던 사실, 그리고 북에는 공산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樹立)되었고,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같다.
지역감정이 유난히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친일 친중파)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간의 끝없는 분파와 이합집산, 그리고 정쟁을 벌이는 것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결국 월남의 패망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월남 패망의 과정이 우리의 현상과 너무도 닮았다. 이를 분석함으로서 우리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조금이라도 현명(賢明)하게 대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 반공(反共)과 포용의 대립이 비슷하다.
1954년 7월 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 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수립됐다.
이후 월남은 월북과의 전쟁에서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되어 공산군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청렴결백했지만 독재였던 첫 번째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腐敗)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 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 전쟁비용과 간접 전쟁비용을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 전에 진저리 쳤고, 결국 이득 없는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맹과 비밀(秘密)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월남에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 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 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1월 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모 택동의 강한 군대와 통일전선 전술의 개념 적용이 똑 같다.
모 택동의 기본적인 사상은 “권력(權力)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개념으로 평소에 강한 군대를 준비하였다가, 통일전선전술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적이 힘을 집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했다가 시기가 무르익으면 준비한 강한 군대로 먹어치운다는 전략개념이 그 근본이다.
이 전략개념으로 월맹은 월맹 내에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는 강한 군대를 준비해 놓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공산당 특유의 선전선동으로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월남은 월남민족 간에 벌어진 내전이며 미국을 포함한 외국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고 선전하였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를 고립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이 전술은 성공했다.
또한 월남 내에는 많은 간첩을 파견하고 동조자를 포섭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각 분야에 침투하여 사회혼란을 조성하여 정부가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것이 성공한 것이다.
이 월남의 패망을 북의 김 일성이는 큰 교훈(敎訓)으로 삼아 대남적화전략을 더 구체화시켰으며 이를 그대로 적용했다고 본다.
북은 4대군사노선 즉 전국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인민의 무장화, 전장비의 과학화로 북의 혁명의 기지화를 사업을 완성하였다가 남쪽에 혁명의 성숙기가 도래하면 단기결전으로 적화통일을 달성한다. 라고 국가목표를 세워 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
화생무기나 핵도 강한 군대육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이는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협상용 무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무기의 표적은 대한민국이다. 남쪽에 무력을 사용 시, 월남에서의 선전선동과 같이 미국과 일본 등 우방국가에 대하여 “남의 나라 내전(內戰)에 간섭하지 말라.”는 위협용으로 사용된다.
우리 주변의 주사파나 북한찬양의 무리 그리고 대남단파방송, 간첩의 침투, 금강산 관광으로 대북 경계심 물 타기, 청년들이 주 고객인 사이버 세계에 대한 침투, 반공 주의자에 대한 공격, 이념전쟁의 종식 주장 등도 대남 통일전선전술인 혁명의 성숙기 도래의 시각으로 직시해야 한다.
방법은 다르나 그 기본노선은 월남패망 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 공산당과의 협상은 허상이다. 공산당 전술에 속는 것도 똑 같다.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 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등이 서명했다.
미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 소련, 프랑스, 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 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保證)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樂觀的)으로 생각했다.
변화무쌍한 북의 전술에 속은 것이다.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 세계에서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등으로 세계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생각은 송두리째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는 채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평화회담이 벌어지는 다른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 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 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差異)도 없다.
* 4.5%의 공산주의 지배지역이 95.5%의 자유 민주주의지역을 몰아냈다. 4.5%의 월맹 지지세력이 공산화를 성공시켰다.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과 높은 경제수준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전체인 44개의 성(城)중에 12개 성의 몇 군데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지역에 있었다.
월남 내에서는 공산세력이 열세하여 시간이 지나면 소멸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미국과 자유우방이 있고 휴전회담에서 약속한 사항들이 있어서 월맹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정치적 싸움만하면서 소모전만 되풀이 했다. 그 사이에 틈에 끼어든 간첩에 의하여 내부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정치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염증(厭症)이 퍼지면서 북에 대한 경계심이 흔들리고 정부의 노력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 했다.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안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자유민주주의는 피를 흘린 투쟁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남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경제력(經濟力)은 정치적 안정과 튼튼한 안보가 보장되어야 성취될 수 있다.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고 안보가 불안하면 경제발전은 불가능하며 이는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 했다. 돈과 사람들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제일 안전한 곳이 미국이다. 미국으로 안전을 찾아 이동한다. 이 사실을 역시 깨닫지 못 했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100만 톤의 식량부족,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 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아래쪽에서 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 작은 세력들이 공갈과 협박 및 회유로 점점 늘어났다. 굶으면서 줄기차게 대남적화 전략을 전개하는 북한과 어쩌면 이 것도 우리와 너무나 비슷하다.
* 정보기관이 잡히면 나라가 잡힌다. 나라가 망하려면 간첩을 잡지 않는다. 호 지명을 큰 민족지도자로 믿고 있었다. 그것도 비슷하다.
당시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 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가 될 정도로 월남 정권의 핵심(核心)에 공산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대 월맹 정보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를 검거조차도 무기력했다. 여기서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방침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우려(憂慮)하지 않을 수 없다.
간첩과 간첩의 활동과 지령을 보내기 위해 송수신 되는 수많은 대남 단파방송과 북을 찬양하는 문서와 글 서적을 조사하고 분석하여 대한민국을 적의 대남적화전략의 마수에서 구해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보기관은 이 임무를 포기했다. 서적과 간행물의 이적성을 연구하고 판단하던 경찰대학의 공안문제 연구소도 그 임무가 중지되었다. 안보의 공백이고 정신적 무장이 해제(解除)되었다.
이제 보안법이 폐기되면 전선을 지키는 병사는 무장간첩이 휴전선을 침투해도 발포를 할 이유가 없어질 수도 있다. 백주의 대 낮에 북을 찬양하고 적기가를 불러도 잡지를 못 한다. 싸워야 할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월남은 호 지명을 큰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월남의 지도자는 부정부패와 무능한 사람들로 매도되어 국가의 중심을 잡지 못 하고 분열을 가져 왔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을 부정부패와 독재자로만 매도하고 김 일성을 정통성을 지닌 지도자로 추켜세우는 이 땅의 친북 세력의 양상과 너무도 유사하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월남패망 당시, 외적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현재 상황이 너무나 흡사하다.
* 안보(安保)와 국방을 강조한 사람을 미친+놈으로 취급했다.
후방이 무너지면 강한 군사력도 다 물거품이다.
그것도 비슷하다.
다시 월남으로 돌아가서, 휴전협정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섰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월맹에 대해서 경제원조도 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火力)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념(理念)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이를 이야기 하면 정신이 없는 바보 병신 취급을 한다. 공산주의 보다 더 나쁜 종교적 성격이면서 대남적화전략의 마수인 북의 주체사상과 국가목표에 대항하여 피 말리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이 것을 모르고 있다. 알면서도 아는 체를 안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쩌면 이 것도 월남과 그리도 비슷한지 모르겠다.
* 부정부패, 나라를 말아 먹는다.
100여 개의 좌익단체 선전선동에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했다.
청년은 개인을 위해서는 일을 해도 나라를 위해서는 일을 하지도 싸우지도 않는다. 청년은 미래를 갖지 못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 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 모든 것의 근본은 지도층의 부패였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等閑視)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지도층 인사의 엄청난 금액의 부정과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로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30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 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하며 전의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 나가자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부정부패와 내부 정쟁과 갈등은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 군대가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崩壞)된 가장 큰 원인이다.
당시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은 좌익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마저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교묘한 마수에 걸려 하수인(下手人) 노릇을 한 것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모여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문화운동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월남 정권 타도(打倒)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 측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이 회의에서 월맹의 남침이 결정되었다.
* 지도자의 솔선수범, 국민의 통합(統合)과 조화가 없는 나라는 썩은 고목이다. 썩은 나무에는 아무도 물을 주지 않는다.
월남이 망한 것은 연합군의 철수가 아니다. 지식인의 몸보신과 침묵이다. 이것도 비슷하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그 당시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각 정당은 대통령 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이때 벌써 베트남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우익 학생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철수하고 북의 첩자와 베트공이 준동하자 불안을 느낀 월남 사람들과 많은 자본이 빠져 나갔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左派)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30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 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전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가 않았다.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되었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부패한 정치 지도자와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남침 후 한달이 지난 이때 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 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은 포로가 되었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부자의 나라 월남군은 가난한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주한 미군의 구호는 “같이 갑시다. Let's go together."이다. 같이 갈 가치가 없을 때, 그리고 같이 가려고 하지 않을 때 그들은 떠날 수도 있다. 미군이 떠나고 친북주의자들이 준동하면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불안을 느끼면 사람도 돈도 안전한 곳으로 떠난다.
월남에서 발생했던 사람과 돈의 대 탈주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 패망 후 그들은 인간개조 수용소로 보내졌다.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없으면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허상이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해상의 항공모함으로 철수 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 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세계와 8년간 문을 닫고 인간재교육을 실시했다.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었다. 이중 대부분은 살아오지 못했다.
공산정권은 수많은 공무원들을 잡아넣은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 부대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마다 2000명 규모의 수용소를 밀림에 설치하여 외부와 연락을 단절하고 월 9kg의 쌀만 지급하고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화폐를 개혁하고 전쟁 상환비를 거두어 들였다. 희망을 잃은 지식인들이 자살을 했다. 외부의 비판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거해 버렸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처형됐다. 그들의 수감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것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 이었고, 살아서 해외에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월남으로서는 미국 밖에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없었지만,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 분열에 빠진 월남에 고개를 가로 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적 앞에서 분열을 거듭하는 나라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썩어가는 고목에는 물을 주지 않는다.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자국의 군사력이 담보할 따름이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도래하지 않을까 모두가 불안하다. 우리가 월남과 비슷한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월남은 월북에 비해 매우 뛰어난 무기와 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서부터 시작된 정치인들 및 사회전반의 부패함과 출처를 알길 없는 자만심과 설마 하는 생각 때문에 ‘거지군대’인 월맹군에 무릎을 꿇고 적화통일을 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한국과 미국의 원군이 있을 때에는 근근이 버티다가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썩은 고목처럼 쓰러지고 만 것이다.
* 그렇다면 이렇게 쓰러져간 월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우선 월북과의 전쟁 도중에 미군과 연합군이 월북과 평화조약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간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주한미군의 철수 및 축소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월남에서 미군과 연합군은 완전한 철수를 한 반면에 우리나라에서의 주한미군 축소는 부분적인 축소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월남에서는 주월미군의 우월한 장비를 모두 남겨서 월북에 비해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북한에 비해 객관적인 군비가 떨어지는 현 상황이 낫다고는 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유사한 상황에서 월남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 때문에 맥없이 월북에 전쟁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패망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든 면에서 월맹에 뒤질 것이 없었던 월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후방 정치인들과 사회 전체의 부패와 정쟁 및 친북세력의 방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방에서 부패를 일삼고, 정치 싸움으로 내부는 혼란하고, 친북세력의 준동과 사이비 언론의 좌경화 등은 전방에서 직접전투를 치르는 군인들도 싸우고자 하는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군 내에서 조차 부패가 일어나면서 월맹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또한 당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낙관적으로만 정세를 바라봄으로써 미래에 대한 확실한 대비를 하지 못한 것도 패망의 한 원인이라 할 것이다.
우리도 지금처럼 낙관적인 자세로만 일관하고 너무 안심한 나머지 계속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월남처럼 북한과의 전쟁이 벌어져 패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 좀 더 비판적으로 현재 정세을 바라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우리가 주창하는 평화통일도 아무런 장애 없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