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안투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함형도씨가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소장품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만주국 군인 박정희를 보는 시각 [세계일보 2006-08-08 10:18]
“1940년 안투현 명월구에 일본수비대 대원들(일본인)이 자주 찾는 냉면옥이 있었다. 하루는 간도특설대 대원들(조선인)이 먼저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마 뒤 수비대 사람들이 들이닥쳐 ‘너희들 왜 우리 근거지에서 놀고 있느냐’며 따져 큰 싸움이 벌어졌다. 급기야 특설부대원들은 ‘야 이 새끼들아, 우린 오늘 내일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한번 해보자’며 부대에서 기관총을 들고와 펼쳤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다.”
중국 옌지(延吉), 안투(安圖) 지방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재야사학자 차상훈(70·중국 옌지)씨는 “1986년 한 영감이 ‘간도특설대 출신이 전해준 얘기’라며 들려준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안투의 함형도(70)씨 증언과 연결된다. 함씨는 “우리 외삼촌이 명월구에서 간도냉면옥을 운영했다. 거기에 ‘수월이’, ‘송월이’란 기생이 있었는데 정말 고왔다. 그 분(박정희)이 거기서 술도 마시고 노래하며 노는 것을 여러번 봤다”고 말했다.
함씨가 그를 ‘마쯔모도’로 기억하고 있고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만큼 ‘간도 냉면옥 사건’의 등장인물이 박정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드러나는 인물의 성격은 다른 여러 사건에서 감지되는 박정희의 성격과 매우 비슷하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이순희씨에 따르면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제자 이순희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60쪽)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의 ‘박정희’ 79쪽)
그랬던 그가 왜 일제의 괴뢰인 만주국 사관학교에 들어가 대륙침략전의 도구가 되길 자원했을까. 스스로의 물음에 언론인 조갑제는 “가장 큰 동기는 적성에 맞는 직종을 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며 “박정희는 당시의 식민지 정책에 인간적으로 또는 감정적 차원에서 반항하긴 했지만, 질곡의 구조를 꿰뚫어볼 체계적 안목과 그런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근원적 문제의식·결단력 등은 갖지 못했다”(‘박정희’ 83쪽)고 분석했다.
특별취재팀=류순열·김태훈 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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