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제패 70주년 다시보는 손기정] 그는 세계를 일깨운 한민족 브랜드
‘코리아’를 세계에 알린 손기정…그러나 ‘잊혀진 영웅’
[국민일보 2006-08-08 18:07]
슬픈 표정으로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 그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었던 건 일장기가 아니라 민족혼이었다.
당시 24세였던 조선 남아 손기정은 정확히 70년 전인 1936년 8월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가장 먼저 들어와 마지막 100뻍를 전력 질주했다. 2시간29분19초. 세계 신기록이었다. 일약 스타가 된 손기정은 사인 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쓰고 그 옆에 나라 이름을 ‘KOREA’라고 적었다.
2002년 세상을 뜬 손기정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획득 쾌거가 9일로 70주년을 맞았다. 손기정기념재단은 9일부터 12일까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평화의 길’이라는 주제로 손기정 동상 제막식과 기념 회고전을 연다. 손기정이 70년 전 달린 42.195㎞는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코리아 브랜드를 전 세계에 알리다=일제 강점기에 조국에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손기정의 쾌거는 한민족의 긍지를 높인 일대 사건이었다. 손기정이 세계 최초로 2시간 30분 벽을 깨고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를 빼앗기고 지기만 했던 우리 민족은 “조선이 이겼다! 조선이 세계를 이겼다”고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손기정의 우승으로 조선 땅은 일본을 이겼다는 기쁨으로 눈물바다를 이뤘다.
소설가 심훈은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오,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이제도 이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민족이라고 부를 터이냐!”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선수촌에서 외국인이 “어디에서 왔소?”라고 물어보면 서슴없이 “코리아에서 왔습니다”고 대답했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서명하기로 돼 있는 독일의 국빈 방명록에도 ‘손긔졍’이라고 한글로 적었다.
손 선생은 후에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대표 선수로 출전했던 김은배 선배가 현지에서 사인 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써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대로 따랐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글로 사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말했다.
◇잊혀지고 왜곡된 영웅이 되다=중·고교생 10명 중 4명은 손기정 선생을 모른다. 손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지난 봄에 소풍 나온 중학생 10명에게 손기정을 아느냐고 물어봤는데 놀랍게도 7명이나 모른다고 대답했다”며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재단에서 지난 5월15일부터 이틀간 서울시내 6개 중·고교생 462명을 대상으로 손기정 인지도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179명(39%)이 ‘손기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이 사무총장은 손기정 선생을 친일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사무총장은 “일부 사람들이 ‘손기정 선수가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고 한다. 손 선생이 개인 영리만 추구했다면 좋은 조건을 내걸었을 일본으로 귀화했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어 “이번 동상 제막식과 회고전을 통해 선생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바로잡고,젊은 세대에 생전 선생의 민족정신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동상은 12일까지 서울광장에서 전시한 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옮겨져 ‘올림픽 스타의 길’ 시작 부분에 세울 예정이다. 재단은 당초 서울과 베를린에서 동시에 동상을 제막하려 했지만 예산이 부족해 베를린 행사는 연기했다.
◇한국 마라톤 부흥할까=한국 마라톤은 황영조 이봉주(36·삼성전자) 등이 1990년대 올림픽과 국제 대회에서 잇따라 메달을 따면서 중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0년 이봉주가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에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한국 신기록을 달성한 이후 침체기로 빠져들었다.
한국 마라톤이 부진에 빠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소수의 천재 마라토너에게만 의존해 종종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데 안주했을 뿐 재능 있는 선수들을 꾸준히 육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를 맡고 있는 황규훈 건국대 감독은 “요즘 선수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며 “올림픽처럼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지도자를 믿고 지옥훈련을 소화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 “한국 마라톤이 침체한 데엔 지도자들의 책임도 크다. 지도자들이 황영조 이봉주를 키워낸 고(故) 정봉수 감독처럼 열정과 희생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마라톤이 최근 주춤하고 있지만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엄효석(22·건국대),전은회(18·배문고),조근영(26·대우자판) 등은 손기정 선생의 영광을 재현할 재목으로 꼽힌다. 특히 전은회는 지난해 10㎞ 구간 마라톤에서 황영조의 고등부 최고 기록을 16년 만에 경신하고 각종 고교대회에서 10여 차례 타이틀을 휩쓸어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