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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편에 대해서
이름 : 아나
2006-10-09
진수편(陳水扁: 천수이볜)은 1950년 음력 9월에 대만 대남현(臺南縣) 관전향(官田鄕)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제때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 출생신고를 하였기 때문에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은 1951년 2월 18일이다. 집안은 가난해도 그는 향학열을 굽히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전교 1등으로 졸업하였다. 1969년 국립대만대학 상경과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고민하던터에 우연히 민주인사 황신개(黃信介)의 강연을 듣고 법학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1970년 다시 대입시험에 응시하여 국립대만대학 법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대학 3학년 때 사법고등고시에 응시하여 역시 수석으로 합격, 전국 최연소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이미 그는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그후 그는 대만이 섬나라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다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당시 대만경제가 해운에 의존하여 국제무역을 발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법(海商法) 전문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75년 진수편은 오숙진(吳淑珍)과 결혼하여 변호사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일남일녀를 낳았다. 1979년 12월 10일 고웅(高雄)에서 세계인권의 날 기념행사를 기하여 반독재 민주화운동인 '미려도사건(美麗島事件)'이 발생했다. 당시 대만정부 당국에서는 이 사건에 연루된 민주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여 군사법정에 회부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 대만정국은 일시에 격랑에 술렁거렸다. 이때 진수편은 '미려도사건' 피고 변호인단의 일원이 되어 사건의 주동자 황신개(黃信介)의 변호를 맡았다. 이로써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진수편은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민주화의 길을 계승하여 대만의 자유,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1981년 진수편은 처음으로 공직자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 평등, 진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제4대 대북시(臺北市) 시의원에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1984년 '봉래도잡지사건(蓬萊島雜誌事件)'이 일어났을 때 이 잡지사 사장을 맡고 있던 진수편은 명예훼손으로 고발되었다. 1985년 이 사건의 일심 판결 후 의원직을 사임항고 고향으로 내려가 대남현(臺南縣) 현장(縣長)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아깝게 낙선하였다. 같은 해 11월 18일 유권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나갔다가 부인 오숙진여사가 골목에서 고속으로 달려나오던 중장비차에 부딪혀 중상을 입었다. 여러차례 수술을 거쳐 간신히 생명을 건지기는 하였지만 이 일로 오여사는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1986년 진수편은 법원으로부터 징역 8개월 확정 선고를 받았다. 6월 10일 동일 사건의 피고 황천복(黃天福), 이일양(李逸洋)과 함께 토성(土城)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 시기는 진수편의 전가족에게 있어 가장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다. 1986년말 오숙진여사는 입법위원에 당선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출옥한 진수편은 민진당(民進黨)에 입당하여 변호사업을 계속하면서 오여사의 국회보좌관을 맡았다. 1989년 12월 진수편은 '정의, 진보, 안전'의 이념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입법위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었으며, 1992년 12월 입법위원에 재선되었다. 원내에서 진수편은 '정책토론으로 정치항쟁을 대신하자'고 주장하여 야당의 대정부 질문 방식과 관념을 크게 변화시켰다. 회기가 시작되면 그는 국회 사무실에서 대정부 질문을 위해 전문적으로 연구활동을 하였으며, 야당의원 신분으로 최초로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군대의 국가화, 군정과 군령의 일원화, 군수물자 구입 공개화 등을 추진하였다. 이 외에도 군인의 권리와 의무 보장을 위해 여력을 아끼지 않아, 매년 전문단체와 국회기자단으로부터 최우수 의원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민진당 당무 방면에서 진수편은 당내의 대만 주권 독립 관련 주장을 부드럽게 조정하였다. 1988년 민진당은 '대만 주권 독립' 및 '주민 자결 동의론'에 대하여 정책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진수편은 의견의 조율을 거쳐, "만약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회담한다면, 만약 국민당이 대만인민들의 이익을 팔아먹는다면, 만약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통일한다면, 만약 국민당이 진정한 민주헌정을 실시하지 않는다면(如果國共片面和談、如果國民黨出賣臺灣人民之利益、如果中共統一臺灣、如果國民黨不實施真正的民主憲政)"이라는 '4개 만약'을 성명서 내용에 삽입하여 민진당의 대만독립 주장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다. 이것으로 민진당의 대만 주권 독립 주장은 더욱 넓은 변론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민진당은 국민주권 원칙에 입각하여 건국을 정당의 목표로 준비하였다. 진수편은 절차상에서 "국민주권 원칙에 입각하여 대만의 전체 주민에 의한 국민투표 방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삽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로써 민진당의 '대만독립 강령'도 '국민투표 강령'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다원적이고 이성적인 노력을 통하여 이념이 서로 다른 종족간의 대화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 양안관계에 대한 진수편의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태도와 고차원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1993년 8월 진수편은 94년말에 시행될 제1대 대북시장 선거에 출마할 준비를 하였다. 진수편은 먼저 '진수편 시정 센터'를 설립한 후 각종 강좌와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시정 파악에 힘쓰면서 기획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당내에서 후보자로 추천받은 진수편은 '희망의 도시, 즐거운 도시'라는 경선 구호를 내걸고 4대민족 화해협력의 '대북 신고향'을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시민주의' 시대의 도래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수도 대북의 초대 민선시장에 당선되었다. 대북시 정부의 정당 교체를 최초로 이룩한 진수편은 민족과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새로운 시정부의 조직을 구성하였다. 대북시의회 1차 시정보고에서 그는 "시정의 기업화 경영"으로 의식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청렴, 효율, 대민봉사"를 3대 주요 시정방침으로 삼고 도시 발전과 시정의 개혁을 선도할 것을 강조하였다. 대북시장 재임시에 그는 '에누리 없는 정책, 코미션 없는 정부'를 신념으로 삼고 '관념혁명, 효율혁신, 서비스개혁'의 '3혁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시정 전반에 걸쳐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1998년 <<아주주간(亞洲周刊)>>은 아시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를 선정하였는데 대북시는 10위에서 5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 전에 진수편은 미국 잡지 <<시대(時代)>>의 세기를 뛰어넘은 세계 지도자 베스트 100명에 선정되었으며, <<아주주간>>의 아시아 미래의 지도자 50명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8년 12월 그는 제2대 대북시장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시장에서 물러난 후 1999년부터 그는 대북에서 출발하여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면서 민심을 파악하고 국가의 장래를 설정하는데 주력하였다. 그후에는 한국과 일본, 몽골 등지로 가서 아태지역 안보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만의 안전이 전지구 안정의 한 요소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그는 양안관계와 국제정치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국내외 각계에서 점차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999년 7월 진수편은 민진당의 추천을 받아 새천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만의 새정치, 백년의 좋은 토대"를 주제로 연설을 하면서, 독재체제의 종식과 정권교체의 실현을 달성하자고 주장였다. 그후에 다시 '젊은 대만, 활기찬 정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만의 생명력과 국가 발전의 원동력을 응집시켰다. 대선 과정에서 진수편은 양안관계에 대해 "선의의 화해, 적극적 협력, 영원한 평화"를 고수한다는 원칙을 주장하여 양안관계 정상화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양안의 영원한 평화 추구는 이성적인 최대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국가 지도자의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에, 진수편은 대만의 주권과 존엄성, 안전을 수호한다는 전제하에서 지속적으로 대륙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하면서 대화와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2000년 3월 18일 진수편은 여수련(呂秀蓮) 여사와 함께 대만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중화민국 제10대 총통과 부총통에 당선되어 5월 20일 취임하였다. 이것은 중화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여 대만인의 민주적 역량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총통에 취임한 후 진수편은 투명한 정치와 전문적 경영을 시정 이념으로 삼고 국내의 정치 경제와 양안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다각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쳐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위상을 더욱 제고시고 경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확보하였다. 작으면서도 능력있는 고효율 정부를 구성하여 '젊은 대만, 활기찬 정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진수편의 일관된 주장이다. 진수편의 새로운 저서로는 <<대만의 아들(台灣之子)>>, <<세기적 첫 항해 - 정당교체 5백일의 심사(世紀首航-政黨輸替五百天的沈思)>> 등이 있다. 그는 또 한국 경남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한국 용인대학 명예 정치학박사, 러시아 경제대학 명예 경제학박사, 온두라스 자치대학 명예박사 및 파라과이 야숭선대학 명예박사 등의 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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