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본사는 곧 매춘사 이다 (1)
Lawrence H. Summers(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이 지난 1일, 한 공식석상에서 연설 중 "1970년(70년대) 서울엔 미성년 창녀들(child prostitutes)이 100 만에 달했다. 오늘날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경제성장이 가져다 준 굉장한 기회 때문"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인터넷 dkbnews.com(도깨비뉴스)이 9일 보도했다.
우리나라 문제가 언급된 것은, 그가 한창 세계화로 인해 달라진 인간생활에 대해 역설하고 있던 중이었다 (70년대 서울 소녀는 모두 창녀였다, 2004-07-09, 한국일보).
日本을 韓國으로 바꾼 것이다. 日本의 賣春史는 헤이안(平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戰後 日本 에서는 賣春이 國策 이었다. 후지메 유끼(藤目ゆき)의 ‘帝國主義와 性暴力’에도 戰後 賣春 실상이 소개되어 있다. 1945년 8월 26일자 日本의 主要新聞에는 駐屯軍을 위한 慰安婦 참가를 독려하는 광고가 일제히 떴다.
광고주는 RAA였다. 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의 약자로 오락 및 위락 협회 즉 日本女子를 메군(米軍)의 오락과 위락으로 제공하는 단체라는 의미이다. RAA 간부들은 皇宮 앞에서 선서식을 갖고 “新日本 재건과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킬 초석 사업임을 자각,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진다”고 선언하고 ‘천황폐하 만세’ 삼창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킨다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未婚, 旣婚을 불문하고 모든 일본여자들이 賣春에 발벗고 아니 옷벗고 나섰다.
서머스(Lawrence H. Summers)의 경력에 비추어볼 때, 日本의 賣春史와 戰後 賣春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저 발언은 의도적으로 日本을 韓國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서머스는 문제가 커지자 “문제의 발언은 통계를 잘못 기억한 탓으로 한 세대가 바뀌면서 미성년 매춘이 빠르게 줄었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1970 년 한국에는 未成年 賣春이 없었다. 1990 년대 日本에서 원조교제가 수입 되면서 한국에서 미성년 매춘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미성년 매춘은 번창일로에 있지, 세대가 바뀌면서 줄어 들지도 않았다.
일본은 난잡한 성 개방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나라이다. 일본이 만든 상품 중에서도 가장 추잡하고 성공한 상품이 성(性)이다. 이런 자신들의 더러운 반인륜적인 행동을 타당화하기 위해 ‘색을 밝힌다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적인 욕구다’라고 애써 변명한다.
◀ 일본의 춘화도에서
日本史는 곧 賣春史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모든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도 그것만은 자신들 스스로 개발, 발전시킨 것이다. 일본의 매춘사는 中國倭가 이주 하면서 부터 시작됐다.
2차 대전 당시 日本은 조선인, 중국인, 기타 국가들의 소녀들을 종군 위안부로 강제 연행 하면서 자국의 여자 수십만은 本土의 賣春婦로 만들었다. 이것은 2차 대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책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왜구(倭寇), 임진왜란 등으로 누천년 우리나라의 國富를 빼앗아 수백 년간 자신들을 살찌운 일본은 그것도 모자라 자국의 여자들 까지 상품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賣春의 역사는 그야말로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저 유구한 전통을 발전 시키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차 대전 전후에 부모가 자식의 손을 잡고 매춘소굴에 팔아 넘기는 것은 일본에서 공공연히 벌어졌던 풍속이다.
서양인이 일본을 맨 처음 방문한 1543 년 부터 시작된 일본민족과의 생물학적 교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처음 400 년간 일본민족에게 유전자를 제공한 유럽 국가는 특정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을 오가며 무역하던 유럽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메국(米國)과 유럽 각국은 일본민족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끼리라 본다. 우리의 유전자가 저 민족에게 이식 되었구나 하고 말이다.
메이지(明治) 이후 공개장소 에서의 집단섹스를 금지시키는 대신 매춘조직을 거대화 하기 시작했다. 이들 매춘부의 상당수가 서양인들을 상대했다. 중세부터 개별적으로 해온 일본민족 개량 사업이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국가 주도로 더욱 확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국가 재원까지 챙기는 이점이 있었다. 어쩌면 한민족 에게서 더욱 떨어져 나간다는 생각에서 일본민족 개량 사업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패전 이후 메군(米軍)이 일본에 진주 하면서 메국은 列島의 일본민족에게 유전자를 제공하는 주류국가로 떠올랐다. 일본은 한국 전쟁에서 메국의 병참기지이자, 메군의 휴양기지로서 그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메군의 휴양기지란 매춘시설이다. 매춘은 전후 일본의 최대국책 사업이다. 여기서 벌어들인 달러가 오늘날의 일본 경제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賣春으로 벌어들인 달러가 오늘날 세계 일본사 전공자들의 연구비로 제공되고 있는 셈이다. 2 차 대전 동안 히로히토(裕人)의 지시로 수행한 생체실험의 결과도 이때 이시이(石井) 등이 메국에 넘겼다. 한국전쟁 에서의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고도성장을 달성해 일본은 경제부국으로 올라섰다. 한국전쟁이 있었기에 패전 후 최빈국의 나락에서 일본이 빠져나오고 오늘날의 일본 경제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하늘이 돕고 신이 도왔다고 한다.
저 민족은 20 세기 후반에도 우리민족을 등쳐먹고 살았던 것이다. 메국은 지난 수 십 년간 피, 땀 흘려 전쟁 하면서 엉뚱한 인간들을 살찌웠다는 것을 간신히 자각 했는지, 요즘은 아무리 먼 곳에서 전쟁을 해도 무기 및 전쟁물자를 모두 다 메국에서 수송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런 추잡한 일본이 한일병탄 이후 한국에다 일본식 매춘을 도입 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한국의 妓女는 높은 교양과 학식으로 지배계층과 학문과 예술을 논하는 여자들 이었다. 이것이 日本式 賣春의 도입으로 오늘날과 같은 單純娼女로 전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