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화의 참극
캄보디아는 ‘킬링 필드’라는 영화로 이미 그들의 비극이 널리 알려진 상태이다.
1975년~1979년1월 사이에 캄보디아를 천둥과 비바람으로 휩쓸고 강타했던 공산혁명은
대략적으로 2백만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비극의 역사였다. 폴포트 정권 공산치하에서 캄보디아 전체인구의 1/3이 희생되었다
이 비극의 역사가 태동하게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본다
◇ 킬링필드( Killing Field )의 현장
우리는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되면 불과 20년 전의 생생한 현장을 방문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지금 언급하고있는 킬링필드의 현장이고. 또 한곳은 뚜올 슬랭 심문센터이다
프놈펜 관광의 스타트는 뚜올 슬랭(Tuol Slang)박물관으로 부터 시작한다. (추천장소)
뚜올 슬랭( Tuol Sleng )심문센터는 프놈펜 시내에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 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 되었다.
이 센터는 직원이 1백 여명이나 되었는데, 타자수, 사서, 사진사, 전기기사, 대필사,
전직교사, 심문관 등으로 구성되어 혁명 정부의 충직한 집행자로 활약 하였다.
심문관 들은 대체로 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농부로 전투요원으로 맹위를 떨쳤던
혁명군의 첨병 들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12세~16세로 사람들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를
나쁜 것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잔악한 행위를 하는 것이 지도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인식 하고 있었다.
이곳에 가면 이들의 일부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일부지만 여자 대원도 눈에 들어온다.
가슴에 번호표를 단 사진을 찍는 등 기록을 남긴 다음 살해하는 것을 보면
크메르루즈군들은 죄책감은 커녕 오히려 나름대로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1975년 이곳은 원래 고등학교였지만 킬링필드의 주역 '폴포트'가 형무소로 개조한후
s-21로 불리면서 17,000명의 인원을 수용했었다고 한다. 1979년 베트남군이 이곳을
점령했을때 이곳에는 단지 7명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
(그들은 폴포트동상 건립을 위해서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죽인 사람들을 수용했던 고등학교 건물을 가보았다
입장료 2불내고 들어가니 고문기구와 수천 명의 사망자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들은 그곳에 캄보디아 지도를 해골로 만들어 붙여 놓았다
복수를 우려한 폴포트는 그 가족과 친척까지 전부 학살했기 때문에 아기와 어린아이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 끝없는 사진들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들!! 한마디로 끔찍하다.
캄보디아인뿐만 아니라 미처 탈출하지 못한 서방기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물론 그들도 예외없이 학살당했다. -.-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것은 학살된 유해의 해골로 캄보디아지도를 만들어 놓았는데
뭐라 설명할수 없는 독특한 기분이 든다. 무서운것도 아니고 놀라운것도 아니고. ...
특별히 할 말이 없다.
솔직히 그당시 캄보디아에 태어나지 않은걸 감사했다.
이곳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귀신 소동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귀신이 나타났다는 신문 기사가 나기도 한다고 한다.
킬링필드는 두얼슬랭에서 죽은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다.
킬링필드 현장은 프놈펜에서 약20km 떨어져 있으며,
가는 도중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유해들이 발굴된 구덩이 10여개,
그 유해들을 모신탑 등.. 그 당시의 생생한 현장들이 눈에 보인다.
원래 과수원땅이었는데 개발도중 시체가 발견되어 발굴된 죽음의 땅이었다.
줄맞추어 묻힌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묻히었기 때문에 삭막하기 그지없다.
가로 세로 3미터 정도 되는 구덩이.. 높이는 1.5미터 정도 되는데
그 구덩이 안에 많은것은 200구 정도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에 사람이 다닐 수 있게끔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당시에 사람들이 입었던 옷가지와 뼈가 다 썩지않아서 나불거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나면 정말 잠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중앙에는 해골탑이 있는데 1층2층 층계로 되어 있어서
그곳에 해골들이 놓여있고 맨 밑 칸에는 옷가지들이 쌓여 있다. 정말 처참하다.
킬링필드 현장은 프놈펜의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이곳에 옮겨와 처형한 곳인데
총알을 아끼려고 생매장, 죽창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며 학살을 했다고 한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사격연습용 표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니 할말이없다.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 질수 있는걸까?
역사의 현장에 도착하면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위해 위령탑이 세워져 있는데
탑 내부에는 해골과 그 당시에 입었던 옷 가지 등의
유품들이 전시 되어있고,
주변을 둘러 보면 발굴 당시의 사진들과
발굴로 파헤쳐진 수 십 개의 웅덩이와
잔악한 현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 나무들은
관광객들의 쉼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주변을 살펴보면
주민들의 도주를 막기위해 철조망을 치고 그 밑으로
많은 양의 지뢰를 매설하여
이들의 도주를 이중 삼중 차단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탈주 행위가 여러번 있었으나
거의 실패로 돌아가고 그 중 한명이 탈주하여
그 간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외국 기자에게 소상이 알리어 캄보디아의 잔혹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진술에 의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킬링필드" 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게 했다.
여기에서 약 30만의 사람들이 처형 되었으며,
이곳 말고도 캄보디아 전역에 수 곳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공산혁명 지도부의 숙청작업
엄청난 민족 대 학살의 신호탄은 자기들간의 의견 조율 실패에서 일어 났다.
1976년 9월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 회의에서의 캄보디아 공산당 창설기념일에 대한
이견에서 시작되었다.
첫번째 의견은 폴포트 자신이 1960년 서열 2위로 캄보디아 노동당 KWP을 창설 했을 때를
희망 했으나, 또 다른 의견은 1951년 베트맹 공산당의 지배적인 영향하에 창설된 크메르
인민 혁명당 KPRP을 창설 일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이에 노한 폴포트는 1951년 안에 동조했던 두 명의 고위 간부 케오 미아스( Keo Meas )와
논 수온(Non Suon)이 당 지도부를 배반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혁명정권의 악명높은
심문센타 뚜올 슬랭(Tuol Sleng)으로 끌려가 처형 되었다.
폴포트는 두 명의 고위 당 간부를 숙청한 이후부터 미세균이 침투하여 당이 병들었다면서
악덕 세균 색출을 지시했다. 악덕 세균으로 간주되는 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
당내 반 혁명분자, 전 정권의 관리와 군인들, 전직 교수 및 교사, 지식인, 의사와 약사,
중산층 등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맹이 주도할 때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당원들,
그리고 베트남 국경지대인 동부지역에 연관된 관리나 그 지역 사령관이나 군인들등이
숙청되었고, 그리고 중국의 '문화혁명'에 자극을 받은 폴포트가 공무원, 교사, 영어를 하는자,
교육을 받은적이 있는 학생, 안경을 쓴 사람, 손에 못이 안 박힌 사람, 외국서적을 가진 사람,
양담배를 피웠던 사람 등은 부르주아로 분류되어 처형하였으며, 국내에 있던 외국인들과
월남인들도 간첩의 협의로 모두 처형되었다.
이 심문센터에 끌려온 사람은 거의 무고한 사람이었다. 심문을 받은 사람은 다른 3명의
이름을 자술서에 적었고, 또 들어오는 사람은 다시 3명을 불러야 했고 심문 받은
모든 사람은 반 혁명의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 되었다.
당시 이 심문센터 한 곳에서 약 2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심문센터 근처에 있는 노동자들은 이곳은 "들어가지만 나오지는 못 하는 곳" 이라고
이야기 하고있다. 이곳에 들어가 살아남은 사람은 약 10여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 도시민의 추방과 4년계획
크메르 루즈 공산 게릴라의 프놈펜 입성으로 내전은 끝나고 도시민들은 새로운 점령군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어 평온한 가운데 기쁨에 들떠 있었다.
베트남 스타일의 군복에 근엄하면서도 진지한 그들의 모습에 프놈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환영으로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15세 이하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그러나 그 환희도 잠시, 도시민들은 그날 오후부터 혁명군이 짜놓은 각본대로 농경지대와
시골지역으로 추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2개월간 전국적으로 2~3백만 명의 인구가 농부로 신분이 바뀌어 시골지역으로
이동되었다. 그들의 긴 이동행군은 정말 힘들었고 이동 중 노약자와 환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죽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하게도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짐승보다도 더 차갑게 대했다.
추방길을 인솔한 부대원은 대부분 시아누크 정부와 논놀 정권시대의 가난한 하층민들로
1970 ~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무산계급의 혁명을 교육 받으며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를 키웠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시민 추방 정책은 프놈펜 점령 수 개월 전에 당지도부에 의하여 결정 되었는데,
그 배후엔 몇 가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첫째는 당시 프놈펜의 인구는 각 지방에서 몰려던 피난민으로 2백만이 넘어 식량이
절대 부족 하였고 ,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 이상 도시민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가 없었다.
둘째는 혁명 지도부 인사들의 안정성이 고려되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지하활동과 산악생활에 익숙 하면서 노출된 도시 생활을 불안해 하였다.
세째는 혁명 지도부가 도시를 반 혁명의 토양과 혁명의 장애물로 인식 하면서
반 혁명의 온상을 갈아 업고 혁명정권의 기반을 다지려 했던 것이다.
4단계(?) 계획은 원래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 하기위한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의하면 모든 캄보디아의 농토를 집단 농장화 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대 시키고
잉여 생산물을 수출하여 얻은 이익금으로 1차 경공업을 육성시키고 2차로 중공업을
발전시켜 세상에서 하나뿐인 완전한 자립국가를 만들어 1980년까지는 모든 사람이
매일 휴식을 즐기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구 소련의 "집단 농장제도" 와 중국의 "대약진 운동"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 을
혼합한 공산혁명 정권의 야심찬 계획이었는데, 결국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 폴포트( Pol Pot:1928~1998))는 누구인가?
캄보디아 공산혁명의 지도자 폴포트는
1928년 5월 25일 프놈펜 북부에서 90여 마일 떨어진 캄퐁 톰
(Kompong Thom )주 프랙 스바우브(Prek Sbauv) 마을에서
양부모가 크메르족인 아버지 팬 살로쓰(Pen Saloth)와 어머니
속 넴(Sok Nen) 사이에서 9남매중 여덟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으로 마을의 유지였고 어머니는 자비심이 많아
마을에선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본래 이름은 살로쓰 사
(Saloth Sar)이며, 폴포트 라는 이름은 공산혁명 이후 1976년
"민주 캄푸치아" 국 선포와 함께 만든 이름이다.
그의 어린시절은 궁중의 무용수로 일하고 있는 누나의 자취 집으로 옮겨 생활하다
왕궁 근처에 있는 불교사원에 행자승으로 들어가 캄보디아 글과 불교 경전을 공부했다.
(당시는 초등학교 과정을 사원에서 거의 담당) 초등학교 시절은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조용하고 착한 학생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등학교를 맞이고 캄퐁참주에 있는 새로개교한 노르돔 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훗날 자기의 공산혁명 동반자인 동창생 후님(Hu Nim:폴포트 정권시절
공보부 장관)과 일년 후배인 키우삼판(Khieu Siphan :폴포트 정권의 상징적 국가원수)을
만났다.
또 그는 1948년 에꼴떼끄니끄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프랑스의 싸뜨 대학(Cite University) 전파전기학과에 입학, 첫 학기를 충실히 끝내고
1950년 그는 사회주의 서클조직에 매료되어 유고슬로비아를 위한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집단노동력의 힘을 느끼고, 20년이 지난 뒤 정권을 잡았을 때
전인민을 동원하여 식량증산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관측된다.
결국 살로쓰 사는 공산주의 사상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1952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학업 성적 불량으로 장학금이 취소되어 파리의 인도차이나 공산당클럽과 프랑스 공산당
사이를 배해하다가 1952년 12월 공산주의자가 되어 학위도 없이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그는 1953년 8월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
본격적인 캄보디아 공산당 활동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공산주의 사상의 캄보디아 최고의 이론가이며 캄보디아의 호지민
(Ho Chi Minh)에 비견되는 토우 사모쓰( Tou Samouth )를 만난다.
살로쓰 사는 토우 사모쓰를 통해서 공산주의 사상에 한층 정통하게 되고 그가 살해된 후
공산당의 지휘부를 물려 받게된다.
그는 본부에서 정치 학습을 마치고 프놈펜의 좌경단체와 협조하기위해 프놈펜으로 돌아와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 1955년 총선이후 사아누크가 좌경 및 공산주의자 강경탄압을 하자
프놈펜의 사립고등학교 참라온 비치아(Chamraon Vichea)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가 1956년 초였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와 존경을 받았던 교사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크메르 루즈의 몰락과 폴포트의 최후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이든 그 주체가 자만 하거나 오만할 때는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폴프트 정권의 몰락의 주된 원인은 많으나 초기 베트남 령의 일부 도서를 점령 하므로 인해
이것이 나중에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략의 빌미를 제공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12월 24일 베트남은 해군과 공군을 위시하여 10만 명의 군사로 캄보디아에
전면 공격을 개시 하였다. 베트남의 입장에선 전쟁이 행군이나 다를 바 없었다.
미군이 철수 하면서 남기고간 전투기를 비롯해 수 많은 첨단 장비로 무장한 베트남군을
상대하기는 캄보디아군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부대였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당도하자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그때는 이미 전위를 상실한 상태로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고 그들의 환상의 공산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북부 산악 지대로 도피하여 게릴라전을 계속 하다가 간혹있는 게릴라 전으로 활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그리고 폴포트는 현대사의 새로운 비극을 연출해놓고
잔혹한 학살행위에 대한 사과 성명 한차례 발표하지도 않고
1998년 태국 국경의 한 정글 지역에서 이름도 없이 생을 마감하였다.
한때 캄보디아 전역을 살육의 광란으로 몰아 넣었던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사라져 갔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아직도 대학살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백만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킬링필드'의 진실마저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여론입니다.
킬링필드는 인류사의 오욕으로 기록될 이런 참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겨줬지만 그 댓가는 너무나도 큰 것이었습니다.
www.vietvet.co.kr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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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수출과 해외 살인
국내와 당내 살인을 신바람 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한 것 외에도 중국 공산당은 혁명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해외 화인(華人)을 살해하는데 참여하였다. 크메르루주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에서 단 4년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975년에서 1978년 까지 인구 800만도 되지 않는 작은 국가에서 200만 명을 학살했으며 그중에는 중국인 20만 명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잠시 크메르루주의 죄행을 낱낱이 밝히기에 앞서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폴 포트(Pol Pot 1925~1998)는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숭배자였다. 그는 1965년부터 4차례나 중국에 와서 직접 마오쩌둥의 교시를 들었다. 1965년 11월, 폴 포트가 3개월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천보다(陳伯達)와 장춘차오(張春橋) 등이 그에게 “정권은 총끝에서 나온다.”고 알려주면서,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의 이론과 경험을 소개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그가 정권을 탈취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다스린 바탕이 되었다. 캄보디아로 돌아간 후, 그는 원래의 당을 캄보디아 공산당이라고 개명하고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혁명근거지를 건립하였다.
1968년 캄보디아 공산당은 정식으로 군대를 만들었다. 1969년 말 군사는 3천명 밖에 안 되었으나 1975년 진볜(金邊)을 공격할 때는 이미 “우수한 장비와 용감한 작전을 펼치는” 8만의 무장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중국 공산당의 지지에 의한 것이었다. 왕셴건(王賢根)의 『월남지원과 반미항전 실록』 기록에 의하면 1970년 중국은 폴 포트의 3만 부대에게 무기와 장비를 지원해 주었다. 1975년 4월 폴 포트는 캄보디아 수도를 공략했으며, 두 달 후에는 베이징에 와서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크메르루주의 살인은 중국 공산당의 이론과 물질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결코 발생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예만 들겠다. 시아누크 국왕의 두 아들이 캄보디아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후 저우언라이의 한 마디 말에 캄보디아 공산당은 시아누크를 순순히 베이징으로 보냈다. 캄보디아 공산당은 살인할 때 뱃속의 태아조차 죽여 버린다. 앞으로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우언라이의 요구에 대해서는 두말없이 집행한 것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한 마디가 시아누크를 구하긴 했으나, 캄보디아 공산당이 20만 화인을 도살할 때 중국 공산당은 한 마디 항의도 없었고 화인들이 중국 대사관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대사관은 수수방관하면서 상관하지 않았다. 1998년 5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인(華人) 학살과 강간에 대해서도 중국 공산당은 아무 말도 없었고 구원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중국 내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소식을 봉쇄하였다. 마치 해외 화인들의 생사는 중국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인도적인 원조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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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평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개 평론) 제 7 평 중국 공산당의 살인역사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