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범학교’ 시절의 박정희
1932,4.1. 박정희는 15세의 나이로 대구사범학교 제4기로 입학했다. 입학정원 100명, 그 중 한국인은 90명, 일본인은10명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3개의 관립 사범학교가 있었고, 이들은 경성사범, 대구사범, 평양사범이었다. 경성사범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50:50으로 뽑았지만 나머지 2개 사범학교는 조선인9에 일본인 1을 뽑았다.
당시 사범학교에는 수재들이 몰렸고, 대구사범의 경우 응시자는 1,070명, 박정희는 51등에 합격하였다.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 11회 졸업생, 창설 이래 구미보통학교에서 사범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박정희가 처음이었다. 박정희의 합격은 구미보통학교의 경사이자 고을의 경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한 어머니는 학비를 댈 수 없어 박정희가 시험에 떨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합격하고 가지 못하면 한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학생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기숙사생활은 훈련과 감시로 일관됐다. 100명이 입학하면 70명 정도가 졸업했다. 이중 금서를 읽다가 퇴학당하는 학생이 가장 많았다. 감시가 심하여, 방학 때까지도 고등계 형사가 집에 찾아와 독서 경향과 언동을 체크했다. 민족차별은 급식에까지 반영되어 일본 학생은 쌀밥에 약간의 잡곡을 섞어 먹인 반면, 한국인 학생에는 잡곡과 고구마를 섞어 먹였다. 졸업 후의 봉급에서도 한국인 교사는 일본인 교사의 60%만 받았다.
이런 차별에 대해 반감을 품은 박정희는 일본인 상급생에게 경례를 하지 않고, 사진첩에도 단기연호(4270)를 사용하여 말썽이 된 적이 있었다.
1930년대는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던 시절, 교련과목이 매우 강화되었고, 이 때문에 사범학교는 준사관학교라 불렸다. 당시 대구사범에 파견 나온 교련장교는 ‘아리카와’ 대좌(대령)였는데 그는 일본육사와 육군대학을 나온 수재로 다른 일본인들도 아래로 내려보는 콧대 높은 인물이었다.
아리카와 대좌의 서열은 교장 다음, 다른 교사들도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런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를 좋아했다. 그가 박정희를 좋아했던 이유는 박정희가 교련과목에서 출중하여 늘 시범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몸이 날쌔고 구보, 사격, 검도, 총검술, 기계체조, 구령 동작에서 뛰어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말수가 적고 눈매가 날카로웠고, 정의감이 강했던 것도 대좌의 눈에 들었던 조건들이었다.
어느 날, 싸움 선수인 석광수가 자기보다 약한 동급생 머리를 깨진 유리병으로 찔러 피투성이를 만들었을 때,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자, 박정희가 나서서 석광수와 싸운 일이 있었고, 그 후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다.
당시 사범학교교육은 전인교육에 치중했다. 일본어, 조선어, 영어, 한문, 교육학, 경제학, 수학, 생물, 화학, 물상, 역사, 지리 음악, 미술, 서예, 체육 등이었다. 박정희의 문장력, 시적 표현력, 운동, 작곡, 미술, 피아노 실력은 이 시기에 기른 것이다.
당시 대구사범학교에는 6명의 한국인 교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은연중에 한국인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불어넣어주었다. 이 교사들 중 현준혁 선생은 학생들에게 한글을 널리 보급하여 문맹퇴치운동을 하도록 격려했고,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의 당위성을 가르치고 사상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28명의 학생들과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다른 한국 교사들 역시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에 대해 가르쳐 주기도 했고, 남이장군의 높은 기개와 호방함을 소개해주기도 했고, 김구, 이승만,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사항을 알려주면서 독립정신을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30명 정도의 한국인 학생들이 지하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고, 그 중 5명이 고문으로 옥사했다.
당시 면장이나 읍장도 일본인 순사에게 뺨을 얻어맞았고, 동네 사람들은 멀리에서라도 일본 순경만 보면 오금을 펴지 못했다.
일본인들의 민족차별은 학교 안에서도, 학교 밖에서도 노골화 됐고, 이렇게 할수록 한국인 학생들의 반감도 높아만 갔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는 결석이 많고, 성적도 하위권에 속했다. 반면 세계문학전집, 풀루타크영웅전, 고전, 역사, 소설, 전기 등 다양한 교양서적들에 심취했다. 생각이 크고, 감정이 섬세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독서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5년제 사범학교 졸업반인 19세였을 때, 박정희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강제에 못이겨 16세의 처녀 김호남과 결혼했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박정희는 그녀가 싫어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한 방을 쓰는 것 조차 거부했다.
보통학교 교사, 박정희
1937년3월25일, 20세 되던 해에 박정희는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월1일에 문경공립보통학교 4학년 담임교사가 됐다. 월급 45원, 대구 일대에서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자자했다. 그는 체조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체육훈련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월급 45원 중 하숙비 8원을 내고 가난한 집 아이 3명에 대한 월사금 3원, 본인 용돈 10원을 빼고 그는 나머지 월급을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도 가끔 늙고 병든 아버지가 학교를 찾아왔다. 처를 돌보지 않는 자식을 타이르기 위해 찾은 것이다. 아버지가 그럴수록 박정희는 아내가 더욱 싫어 방학 때에도 집을 찾지 않았다. 교사가 된지 만 1년 만에 그런 아버지도 세상을 떴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더욱 노골화했다. 그럴수록 박정희에게는 반골기질이 발동했다. “학생 여러분, 전 세계를 다 얻는다 해도 민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다.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범학교에서 한국인 교사들로부터 배운 정신을 학생들에 가르쳤다.
박정희는 늘 허름한 옷을 입고 교무실 출입문 가까지에 앉아 있어서 가끔 사환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그의 하숙방에는 나폴레옹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었다. 소풍을 갔을 때, 한 학생이 물에 빠져 고함을 치고 있었다. 다른 교사들은 어 어 소리만 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박정희가 뛰어들어 아이를 건져내 인공호흡을 시켰다.
박정희 옆에서 일본 교사 한 사람이 여학생들에게 조선여성에 대해 흉을 보았다. 예의가 없다, 젖가슴을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닌다는 등이었다. 이 때 박정희는 따로 학생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저 말 잘 새겨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받는 것이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에는 조선말을 해라”
말은 간단명료했고, 청소와 정돈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학생들에게 위인전 이야기를 해주면서 큰 사람이 되라 꿈을 키워주었다. 나팔 불기를 좋아해 합창반과 악대를 조직하여 행사를 열기도 했다. 소풍 시에는 도시락이 없는 학생과 자기 도시락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발목을 삐어 걸음을 걷지 못하는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온 적도 있었다.
일본 교사들과 싸움하는 일이 잦았다. 말다툼 끝에 ‘조선놈’이라는 소리를 듣자 박정희는 의자를 던진 일도 있었다.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물고 교무실로 들어와 박정희에게 “어이, 교장 게신가”하고 물었다. 박정희는 그 일본인을 한번 희끗 쳐다본 후 아무 말 없이 일을 했다. 일본인이 재차 똑같은 말로 묻자 박정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런 언동을 할 수 있는가? 일등국민을 자처하고 싶거든 교양이 있어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 온 것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 없다. 어서 나가 봐”
박정희는 한 학생을 시켜 일본 교사가 오는지 망을 보게 한 후 조선어, 역사, 시조, 위인들에 대해 가르쳤다. 그의 영향을 받아 한 학생은 사진 속에 있는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칠해 혼난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다가 친구들, 하숙집 주인이랑 마시면 평소에 말이 없던 그는 ‘왜놈들’이라는 말을 자주하면서 분노를 표했다. 이순신을 좋아했고, 황성옛터가 18번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는 어김 없이 학교운동장에 나가 나팔을 불었다.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기상나팔이었다.
“왜놈이면 다여! 그 새끼 때려죽이려다 놔두었다”.
‘아리마’ 교장을 패주고 들어와 식식거리며 한 말이었다. 박정희는 일본교장에 대한 반항으로 장발을 했다. 당시 장발은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이요 반발로 인식됐다. 이를 장학사가 와서 지적했고, 교장은 교사들을 초대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두발문제를 거론하며 장학사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모욕감에 박정희는 술잔을 던져 버렸다. 아리마 교장의 입에서 “조선인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박정희의 주먹이 교장의 면상에 꽂혔다.
이어서 사표를 내고 3년간의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마감한 후, 군인의 길을 찾아 정처 없이 북만주로 떠났다.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에 간 박정희
1911년, 300여 년간 이어온 청나라에 신해혁명이라는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났다. 전제정치가 끝나고 공화정치가 시작됐다. 이 혼란기를 틈타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배후 조종하여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 민주국을 세웠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만주국 황제로 삼아 괴뢰정부를 세운 것이다. 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불릴 만큼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야망에 불타는 군인, 관료, 엘리트, 일본군, 만주군, 장개석군, 팔로군, 조선독립군, 아편장사, 마적, 첩자 등 온갖 종류의 군상들이 몰려와 있었다.
보통학교에서 일본교장을 때려주고 사표를 내던진 박정희 역시 갈 곳이라고는 동양의 신천지 만주 밖에 없었다. 상주의 학교를 떠난 박정희는 잠시 고향에 들려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만주로 가서 그를 좋아했던 ‘아리가와' 대좌를 찾았다.
“너 웬 일이냐?”
“만주군관학교에 다니고 싶어 왔습니다”
“그래, 너는 군인이 돼야 해”
아리가와 대좌는 입학에 필요한 추천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었고, 이로써 박정희는 1940년 봄, 만주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2기생은 총 470명, 일본인 240명, 만주인(한족, 몽고족) 228명, 조선인 12명, 박정희의 입학성적은 470명 중 15등이었다.
조선인 중에는 이한림, 이재기, 이섭준, 김재풍, 김묵 등이며 이들 신입생들은 4년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입교한 사람들인 반면, 박정희는 3년제 사범학교에다 교직 생활 3년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이나 성숙도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만주군관학교는 2년제 예과에 해당하며, 윤리, 법학, 철학, 역사 그리고 중국어를 가르쳤다. 오전에는 학과시간, 오후에는 군사훈련 시간이었다. 취침시간 직전에는 오성(五省)을 외웠다.
1. 지성에 위배된 점은 없는가?
2. 언행에 부끄러운 점은 없는가?
3. 기력(氣力)이 부족한 점은 없었는가?
4. 노력에 아쉬운 점은 없었는가?
5. 부정(不精)에 손을 댄 점은 없었는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과 무자비한 구타였다. 1기생은 2기생에게 기강을 세운다며 구타했고, 조선인 1기생은 조선인 2기생에게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뒤지지 말라고 구타했다. 이런 1기생으로는 박임항, 최창륜, 이기건, 방원철 등이었다.
박정희에 대해 방원철은 이렇게 히고했다. “내가 박정희를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휘청거리는데 박정희는 딱 버티고 서서 맞았다. 돌같이 단단했다.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 자리로 돌아와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의 동기생 이재기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기생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이가 너 댓살 아래인 1기생들로부터 구타 등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과묵한 인내심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국인 중에 홍사익이라는 중장이 있었다. 그는 일본 육사 26기를 졸업하였고, 2차 대전 후 전범자로 처형되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찾아와 조선인들만 모아놓고 훈화를 한 적이 있었다. ‘민족적 차별대우의 비통함을 극복하여 조선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과묵하기만 했던 박정희가 감동적인 열변으로 답사를 하여 모두가 놀란 적이 있다”
1기생 중에 이기건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민군 소좌로 있다가 6.25 때 국군으로 전향하여 사단장을 마치고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만주에서 그를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왜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왜놈 보기 싫어 왔다고 말하더라. 나는 그 때 왜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이북에서는 일본놈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정일권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로 있었다. 박정희 생도는 일요일이면 내 관사로 찾아와 놀다가 갔다. 가난했던 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무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담배와 술을 매우 좋아 해서 나는 배급표로 정종으로 바꾸어 대작하곤 했다. 그는 일본놈들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우리는 곧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박기병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만군 준위였고, 와세다 대학,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정일권 상위는 만군 헌병사령부에 근무하였는데 자주 박정희 생도를 불러내 저녁을 사주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박정희는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의 노래를 불렀다.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 했다.”
1940년부터 창씨개명작업이 시작됐다. 성을 일본성으로 바꾸지 않으면 배급도 주지 않고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41년 창씨 개명되어 ‘오카모도 미누루’ 혹은 ‘다가키 마사오’로 불리게 됐다. 그는 검도, 유도, 승마, 교련은 물론 모든 과목에서 출중했고, 1942년 3월, 420명 중 1등으로 졸업, 만주국 황제의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아울러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재학생 송사에 대한 답사를 했다. 그 모습이 뉴스영화로 쵤영되어 많은 한국인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이 모습을 보고 고무되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 간 생도 중에는 강문봉이 있다. 그 역시 만주군관학교-일본군육사를 거쳐 군사령관을 마치고 3성 장군으로 예편했다.
동기생 김종길은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 생애 중 가장 흥겨웠던 때가 일본육사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학 때가 되면 일본 전국을 돌아다녔다. 술을 잔뜩 마시고 귀교시간을 어겨 외출금지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의 작은 누나 박재희가 동경에 살면서 박정희의 뒷바라지를 잘 해 주었다. 동기생 이섭준의 누이동생이 일본에서 자취를 하며 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식량시정이 어려웠다. 박정희는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싸다가 여동생에게 주기도 했다,”
동기생 이섭준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 때 나는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한문성생님은 박정희의 글 속에 무엇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군사학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유시간이면 운동장을 혼자 걸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동기생 이한림 장관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놈을 배워야 왜놈을 이긴다고 하더라"
1944년,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위치한 관동군 635부대로 배치됐다가 이어서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됐다. 만주에 산재한 공비 즉 모택동의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