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형 사회주의의 실험
1947 년 독립에서부터 1991년의 경제자유화까지 40여 년의 인도경제의 성장과정을 돌아보면서 경제자유화에 발을 내디딘 직접적 이유와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구조적 배경을 고찰하고자 한다. 독립 후의 인도의 나아갈 방향으로써 네루가 지향한 것은 국가주도의 혼합경제(mixed economy)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형 사회(socialistic pattern of society)였다.
이 체제는 중국과 같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와는 달리 선거제도에 기초한 정권교체를 전제로 한 의회제 민주주의와 함께, 사회주의를 전제로 하면서도 시장메커니즘도 도입한 독자적 인도형 경제모델로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도달목표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닌 사회주의 '型' 사회가 되는 것은 이 인도형 모델을 반영한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빈곤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앞에 두고 사회주의라는 이상적 슬로건이 필요불가결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한편 인도형 혼합경제의 특징을 통해 인도경제를 피폐시키는 매크로불균형 확대의 구조적 요인이 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도형 혼합경제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공공부문의 우선정책이다. 1948년과 56년에 나온 2가지의 '산업정책결의'(Industrial Policy Resolution)가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위치한 것은 민간기업의 육성이 아닌 공공부문의 확충이었다. 특히 1956년의 산업 정책 결의에서는 공기업과 민간기업이 담당할 수 있는 각각의 전담 산업분야가 설정됨으로써 전략적 기간산업은 모두 공공부문이 담당했다. 따라서 모든 산업은 기업 신설 전체를 국가가 책임지는 분야, 국가가 전적으로 참여하되 민간 기업도 동시에 활동하는 산업, 민간의 주도에 의해 개발되는 부문 등으로 나누었는데, 기간 산업은 일체의 국가 부문을 관장하고 소비재 산업과 서비스산업은 민간에게 넘기는 혼합 경제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공적 부문은 지정산업의 틀에 그치지 않고, 점점 자기증식을 이루어 그 활동범위는 오늘날 소비재, 서비스업, 관광업, 금융업과 같은 분야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공기업 수는 중앙정부계와 주정부계를 합쳐 1200개 기업 이상으로 증가하는 등 공적부문의 비대화가 문제가 되었다.
공기업은 기간산업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이나 유지에 막대한 자금이 든다. 그 뿐만 아니라 외자를 포함하는 민간산업의 참여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며 높은 코스트 체질이 배어있어 적자기업도 적지 않다. 정부는 이러한 적자기업도 없애지 않고 구제해 왔기 때문에 재정부담이 컸고, 재정적자 확대의 큰 요인이 되었다.
1956 년 '산업정책 결의'는 결국 '사회주의형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공공부문의 전면적 확대 조치 및 사기업의 국유화조치 보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특징은 산업인허가제도에서 보여지는 민간 부문에 대한 엄격한 규제이다. 민간 부문은 공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기간산업에 참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1951년의 '산업 개발 규제법'(Industry Development and Regulation Act)에 규정된 산업인허가제도를 근거로, 기간산업 이외의 산업에 있어서도 그 활동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 '산업 개발 규제법'에 따라 ① 새로운 공장의 설립 ② 기존 공장에서의 생산능력 확장 ③ 기존 공장에서의 신제품 제조 ④ 공장 입지 변경 등의 4개 영역에서 정부 허가의 취득이 의무화되었다.
이 외에도 1955년의 '중요물자법'(Essential Commodities Act)에서 철광, 석탄, 비료, 면직물 등 중요물자에 대해서는 가격, 공급, 유통에 있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되는 것 외에, 1969년의 '독점금지법'(Monopolies and Restrictive Trade Practices Act)에서는 재벌계를 비롯한 대기업의 생산활동에 더욱 엄격한 규제를 가했다. 외자계 기업에 대해서는 73년의 '외환관리법'(Foreign Exchange Regulation)에 기초해 외국인 지주비율의 상한은 원칙적으로 40%로 억제되었다. 이렇게 그물처럼 둘러쳐진 민간 부문에 대한 엄격한 규제는 당초의 목적에 반해 경제 전체의 자원배분을 비효율적으로 하고, 또한 경제적 합리성 추구의 인센티브를 깎아내 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경제개발 목표가 성장 우선의 집중주의(集中主義)가 아니라 개발독재의 색채가 없는 다원주의(多元主義)적인 것이었다는 것도 이전의 인도 경제정책의 큰 특징이었다.
방대한 과잉노동력을 안고, 2%를 상회하는 속도로 인구가 증가하는 인도에서는 국민을 먹여 살릴 농업을 경시할 수 없다. 현재에도 취업인구의 3분의 2가 농업에 종사하고, 국내 총 생산의 약 3%을 제 1차 산업이 차지하는 농업대국이다. 따라서 초기의 공업중시의 개발정책에 있어서도, 항상 농업과의 밸런스가 중시되었다. 동시에 지역간의 균형적 발전도 항상 염두에 두었다.
이와 같이 개발목표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일없이 다원적이 된 배경에는, 인도는 이해관계가 다른 다양한 사회계층과 언어 그리고 습관도 다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회제 민주주의가 정착으로 선거제도를 통해 국민 각 계층의 이해가 경제정책에 반영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개발에 있어서도 대중영합적인 정책운영이 채용되기 쉽게 마련이다. 특히 인도에서는 부유한 농민층이 은근히 정치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층은 농산물의 상대적 가격인상이나 농업투입재로의 보조금 증액에 강한 압력을 행사해 왔다. 한편 빈곤층에 대해서는 공공배급제도 하에서, 정부가 시장에서 사들인 가격보다도 싼 가격으로 식량곡물을 판매하고, 차액을 정부보조금으로 보충해 왔다. 이러한 다층적인 보조금 정책은 70년대 이후 재정적자를 확대시키는 주원인이 되었다.
인도형 혼합경제의 또 다른 특징은 내향적인 수입대체화 정책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식민지 지배의 괴로운 경험을 가진 인도는 독립 후의 개발정책으로 외국의 영향을 적극 배척하는 자급자족(self-reliance)의 이념을 상당히 반영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수입대체에 의한 내향형의 공업을 목표로 하고, 수입에 대해서는 고율(高率)의 관세나 사전면허제에 따른 수량제한을 통해 엄격한 정책을 취했다.
수입 라이선스(license)를 취득하려면 수입품은 모두 필수품목이어야 한다는 원칙과, 수입품은 국산품과 경합하지 않는다는 2대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일부의 자본재나 중간재를 제외하고 인도에 있어 소비재 등의 수입이 인가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결과 인도의 대외무역 의존도는 극히 낮아졌다. 경제적 자립과 국내산업 확보라는 당초의 목적에 대해서는 성과가 있었다해도, 기본적으로는 산업인허가제도와 함께 인도 국내산업의 비효율성과 저생산성을 조장했다. 거기에서 발생한 국제경쟁력의 결여는 수출산업 육성의 큰 족쇄가 되어 이후의 경상수지 적자 확대의 온상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거대한 국내시장 충족이 최대의 목표이며, 여력이 발생한 경우에만 수출을 행한다는 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초의 목표였던 발전적인 수출주도형 경제로의 전환은 볼 수 없었다. NIES(신흥공업경제국 또는 그 지역)나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이 수출확대를 원동력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실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인도의 경우에는 거대한 국내시장과 너무 강한 자립의식으로 수출 산업의 육성이 크게 뒤쳐져 버렸다. 수출 산업이 신장되지 않아 생산성 향상이나 경제효율성 추구로의 인센티브도 생기지 않았다. 또한 인도시장이 해외기업에 개방되지 않아 경제성장은 인도국내의 기초적 조건에 얽매여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 결과 자금부족에서 인프라 정비가 늦어져 발전이 없었다. 이러한 환경이 국제경쟁력의 축적을 저해하고, 수출산업이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인도경제는 정말로 악순환에 빠져 버렸다.
지금까지 독립 후의 경제정책의 특색과 그것이 야기한 결과를 간단하게 개관해 보았다. 이들 경제정책은 독립 후 오랫동안 내향적 인도 경제의 근저를 형성하였고, 동시에 상한을 계속 규정했다. 그러나 잠든 거대한 코끼리라도 세계경제의 큰 변화의 흐름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