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동터키스탄」에서 재연된 카리스마 없는 독립운동의 위협 王柯(OU
Ka) 고베대학교수
「터키인의 땅」을 의미하는 터키스탄 중에서도 우즈베크스탄 등 5공화국이 서터키스탄으로 불리는데 대하여 동터키스탄은 중국의 신강(신강)위구르自治區와 넓게 겹치는 지역을 지칭한다.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80년대 이후 지난날의 독립운동이 재연되었다.
2004년 9월 13일 「동 터키스탄 망명정권」이 미국회의사당에서 수립을 선언했다. 동터키스탄협회(호주)의 아메드 에겐베르디主席(테러리스트로서 현재 중국공안성이 지명수배중)이 대통령을 동터키스탄 민족자유센터(미국)의 안와르 유스프 트로니 주석이 수상을 맡은 망명정권은 10수명의 위구르족으로 구성되어 금후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한다.
「동터키스탄 독립운동」의 원류는 청조의 「번부체제」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주족이 세운 청조는 중국내지의 한족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이원적으로 지배하여「번부」로 지정된 변경지대에 거주하는 몽골, 티베트, 위구르족에 대한 중화문화학습의 금지 등 그 중국인의식의 형성을 방해했다. 청조말기부터 위구르사회에 중국내지와 동일한 모양의 제도가 도입되니 이곳은 터키계 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위구르족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원망이 강해졌다.
1933년 11월에「독립운동이 발발되어「동터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외부의 進攻과 내부의 분쟁에 의하여 정권이 몇 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그 후 소련의 지원받아 신강에서 10년 이상에 걸쳐 독재를 계속한 한족 군벌 盛世才는 현지 주민에 대하여 박해를 계속했다. 40년대에 들어와서는 盛世才가 소련과 반목하였기 때문에 소련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44~46년에는 제2차 운동기를 맞아「동터키스탄공화국」이라는 정권이 수립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기에 들어와서는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없어졌기 때문은 아니지만 중국정부의 종교와 민족문제에 대한 엄격한 정책아래서 큰 사건에는 이르지 않았다.
80년대부터 독립운동은 다시 고양되었다. 81년의「10?30 사건」 90년의「바린鄕 폭동」, 97년의「이리 폭동」등 수차례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다. 먼저 세계적인 이슬람 복흥(復興) 붐이며 다음으로는 위구르족과 같은 터키계의 이슬람민족인 중앙아시아 제국의 독립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지원해 온 소련의 붕괴를 계기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미국 등 서방측 제국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은 중국에 대한 정치적 카드로 변신되었다.
중국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하여 삼엄한 규제정책을 취했다. 그 이유는 독립파세력이 이슬람 원리주의세력과 결속하여 테러라고 하는 수단을 사용하여「테러리즘 분리주의 극단주의」라고 하는 삼위일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1월에 중국정부가 발표한 백서「동터키스탄 테러조직의 죄」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지역의 이슬람 원리주의와의 연결을 가진 독립 세력은 신강 각지에서 90년부터 2001년까지의 어간에 200건 이상의 폭발, 방화, 암살, 습격 등의 테러사건을 일으켜 162명이 희생되었다. 중국공안성은「동터키스탄 이슬람운동」 등 4개의 조직을 테러조직으로 인정했다. 2002년 8월에 주키르기스 미국대사관에 대한테러계획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미국은「동터키스탄 이슬람운동」을 테러조직 리스트에 넣었지만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붙잡힌 위구르족 포로의 중국으로의 인도는 거부했다.
독립운동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같은 카리스마성을 지닌 종교지도자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통합해서 큰 힘이 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역으로 말한다면 종교적 요구를 일단 폭력에 호소하면 그것을 유효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브레이크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근년의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신강의 사회정세는 안정되어 있으나 미국 등 국제사회의 뜻에 농락되어「동터키스탄 독립운동」문제는 복잡화되어 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