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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2월 밀린 임금을 받으러 나갔다가 동사한 불법 체류 중국동포 김원섭씨의 장례식에서 아내
신금순씨(왼쪽에서 두번째)등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2년전 세밑을 앞두고 흥청거리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 골목통에서 한 조선족 동포가 동사한 채로 발견됐다. 경찰
지구대 사무실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장소였다.
고(故)김원섭씨. 그 날의 사건을 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법무부의 장기 불법체류자 단속을 피해 농성을 해오던 중국동포가 체불 임금을 받으러 나간 뒤 하루만인 9일 새벽 서울 도심
거리에서 동사한 채 발견됐다. 이 중국 동포는 숨지기 전에 112와 119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의 김씨에게 고국의 품은 차가웠다. ‘잘 살아보겠다’며 조국을 찾아와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김씨에게 고국의 기업은 임금을 체불했다. 정부는 장기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여 김씨를 강제추방 대상에 넣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
속에서 헤매던 그가 십여 차례 이상 119, 112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돼 구조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불법체류로 체불의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한 재중동포는 차디찬 골목바닥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죽어갔다.
그는
‘동포’였지만 ‘우리 안의 타자(他者)’였다. 차별과 소외가 내재화한 사회. 그런 엄혹한 현실은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어떻게 보면 김원섭씨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타살’을 당한 셈이다.
독립영화계의 대부이자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송환’의 김동원 감독이 이번에는 동사한
조선족의 흔적을 좇았다. 옴니버스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 중 '종로, 겨울'을 연출한 우리의 어떤 시선이 조선족 동포를 동사하게 만들었는지,
왜 그는 죽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짧지만 굵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 감독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불쌍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상황들을 스스로 인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한번쯤 돌아보게끔 하고 싶었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다음은 29일 서울
신대방동에 위치한 푸른영상에서 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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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감독[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 -이번 영화의 참여 제안은 언제
받았으며 중국동포에 대한 이야기를 찍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지난해 8월 인권위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제안을 받고 상계동
철거민(‘상계동 올림픽’)이나 비전향장기수(‘송환’) 뒷얘기 등 다른 것들도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전에 고김원섭씨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맺혀 있었고 이를 풀고 싶었다.
또 조선족동포를 바라보거나 우리의 역사에 대한 시선 때문에 이 문제를 택했다. 우리는 만주 땅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그 땅에 있는 동포한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이쪽 동포들은 다른 이주노동자보다 더 차별받는다. 재외동포법에서도 미국과
유럽과 같은 제1세계 동포보다 한국에서의 권리를 차별받고 있다.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처음 고김원섭씨에 대한 뉴스를
접하시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뉴스를 바로 접한 것은 아니다. 지구촌동포연대의 아는 친구에게 얘기를 들었다. 당시 날짜를 맞춰보니
독립영화제 기간이었고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독립영화를 한다는 것이 영화를 통해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선족
동포들이 주변의 시선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몰랐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다. -촬영하면서 조선족동포에 대한 어떤 실상을 알게
됐는가.
조선족 커뮤니티 사이트를 자주 들어가 보는데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가정과 마을공동체의 파괴를 실감할 수 있다. 부모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중국에 있는 아이들이 탈선하는 등 지역 사회에서도 컨트롤이 안 된다. 조선족 사회가 자치제를 인정받고 프라이드도 강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커뮤니티에도 중국 내 50여개 민족 중 열등한 민족으로 전락했다는 소리들이 많이 나온다.
한중수교 후
조선족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동포로서) 따뜻한 시선도 받기도 했고 그들도 한국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남한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밀입국을 비롯해 남한 여행객들에게 웅담을 팔고 여자를 소개하는 것과 같은 브로커문화가 유행했고 지저분해졌다. 그런 얘기까지 이번에 담고 싶었는데
남한 사회에서의 그들에게 집중하자는 쪽으로 정리됐다.
재외동포 간에도 드러나는 차별…“유전비차별 무전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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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감독[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 -오늘날 한국에서의 재외동포
차별은 어떤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가.
한일합병이나 해방 전부터 간도, 만주로 나가거나 일제 징용으로 귀국을 못한 분 등
광범위하게 재외동포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전의 재외동포법은 해방 후 발생한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동포들만 인정했다. 바뀐 재외동포법도 1922년
만든 호적법 기준상 동포로 인정하는 것으로 진일보했지만 호적이 남아있지 않거나 호적법을 만들기 전에 나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한편으로 우리는 독도나 동북아공정 얘기가 나오면 흥분하고 분노하는데 왜 무엇을 뺏기기 싫은가,를 알아보면 땅이다. 그 땅에 있는
사람·역사가 아니다. 이중적인 모습이다. 편파적인 애국심·민족주의이며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경제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그런 모습과 마음이
조선족동포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사회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중국을 응원하겠다면서 ‘한국이 도대체 뭐냐’며 정체성을
묻기도 한다.
-재외동포법상의 차별은 어떤 방향으로 개정돼야 할 것으로 보는가.
만주에 독립운동 등으로 나간 사람에
대한 배려나 보훈을 해 주지 않고 제도적으로 차별하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더 보살핌을 받고 정부 수립에 공이 있는 사람들이 더 차별받고 있다.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고 부자나라 동포만 동포로 생각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부잣집에 시집간 딸만 자식이고 나머지는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데 부모
심정이라면 못사는 집에 시집간 딸을 더 챙겨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지금 보면 그렇지 않다. 이것이 우리 의식의 현주소다.
재외동포법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으나 동포기 때문에 느끼는 설움도 더 클 것이다. 특히 체불, 산재, 강제추방과 같은 일이
부지기수다 보니 한국에 가기가 겁난다고도 말한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더 커지고 고립감도 느낀다. 그래서 타자화 하는 시선에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빛,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고 자격지심도 강하다. 남한사회에 대한 경계심도 강한데 이는 그분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야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프랑스의 소요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 역시 ‘자기안의 타자’에 취약하다. 차별관행을 차츰 없애고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선 우리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재외동포법은 조선족,
조선적(해방이후 일본에서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 연해주동포에 대해 차별하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적성국이거나 노동시장 교란, 외교 문제
등의 이유를 들고 있으나 이는 과거의 이유이거나 이기적인 처사다. 필요하면 부르고 필요 없으면 내쫓을 바에는 아예 불러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분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고 문화적으로 우월한 부분도 있다. 깔 볼만한 사람들이 아닌데 우리가 좀더 잘
산다고 그럴 자격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들의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면 그동안 우리가 가진 오해가 풀리고 인식 변화가 생길 것이다. 진지하게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곱씹을만한 글이 많다. 우리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잘 모르면서 경제적 논리 같은 것으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다.
우리만의 시선 말고 다른 시선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만난다면 당연히 공존도 가능하다. (우리보다)못 살기 때문에
도와줘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동포와의 연대감이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동포마다 이야기와 역사를
갖고 있고 이를 들으면 우리 삶도 풍부해질 수 있고 얘기만 나눠도 차별도 않고 깔보지도 않을 것이다. 기름진 문화적 토양이 있는데 무관심한 것이
안타깝다.
“자유·문화의 거리인 종로가 그분에겐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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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감독[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 -촬영하면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지난해 12월9일 1년 전 김원섭씨가 숨진 종로에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행인 기색 등에서 추운 느낌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김원섭씨의 시점에서 취하고자 추운 날을 골라서 다시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부족해서 잠바 같은 옷을 벗고 촬영하기도 했다.
또 현재 고김원섭씨의 부인이 국가배상소송을 진행 중인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분도 불법체류로 눌러 앉았다. 가까스로 연락이
닿아서 3번 정도 만나 뵙고 얘기를 듣긴 했는데 카메라 앞에는 결국 나서지 않으셨다.
-숨진 인물의 행적을 좇으면서 어려움이나
느낀 점이라면.
이전에도 돌아가신 분 작업을 해 봤는데 아는 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모르던 분이고 (조선족동포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였다는 것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었다.
21세기 서울 종로에서 사람이 동사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른 척 했을까, 혹은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동사한 김원섭씨 품에 ‘자유왕래’라는 쪽지가 있었는데 모든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웠으면 그랬겠는가. 종로는 자유·문화의 거리인데 그 분에겐 얼마나 두려움의 거리였겠는가. 같은 공간, 시간 속에 살면서 누구는 술 먹고
밤새는데 다른 누구는 택시 값이 없어 얼어 죽는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이는 빈부격차가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종로를 굉장히 좋아하고 친숙하고 푸근하다고 생각했는데 김원섭씨 사건을 영화로 만들고 나서 종로가 낯설어졌다.
“조선족도 실상 보면 우리보다 가진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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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감독[사진=미디어다음 김준진] | -‘가난’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상계동 철거민(‘상계동 올림픽’)을 만나면서부터라고 들었다. 당시는 88올림픽 등으로 한국사회가 팽창의 욕망으로 가득할 때인데 정반대되는
길을 택한 이유가 있는가.
종교적인 뿌리가 이유가 아닌가 싶다. 상계동 철거촌 현장에서 많이 생각하게 됐는데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부족하지만 굶거나 얼어 죽지만 않는다면, 물론 그런 일이 없도록 정책이 세워져야 하지만, 밥 세끼만 먹을 수 있으면 소유와 욕망을
멈추는 것이 낫다. 그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족도 실상 보면 우리보다 가진 것이 많다. 우리는 별로 필요 없는
것을 잔뜩 가지고 있고 정작 필요한 것을 박탈당한 존재다. 가난한 자의 심성·시각으로 세상을 볼 때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이해도 높아진다.
상계동 철거민들도 언어적으로 풍부하고 생명력이 강했다. 기본적으로 사는 곳을 철거당하거나 구조적 모순이 없어야 되지만 4평짜리에 살아도 내버려만
둔다면 압구정에 사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향후 작품 계획은 어떤가.
‘상계동 올림픽’이나
‘송환’ 뒷이야기도 해야 하고 원진레이온 산업재해를 다룬 ‘원진별곡’도 해야 하는데... 글쎄, 언제 하느냐가 문제인데 현재는 송환 2차 문제가
더 진전돼서 그 쪽이 될 것 같다. 이번에는 연출을 직접 않고 프로듀서나 총감독을 할 계획이다. 지난 9월 비전향장기수인 정순택씨가 돌아가시고
며칠 뒤 유해가 북으로 송환됐고 또 2차 송환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2차 송환과 맞물려 평양을 가고
싶었으나 내년 2월경 송환이 이뤄진다면 영화는 내년 말이나 내후년쯤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종로, 겨울’은 어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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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겨울의 한 장면 | 김동원 감독이 연출한 ‘종로, 겨울’은 내년 1월13일 개봉 예정인 옴니버스 영화 ‘다섯개의 시선’ 중
한편이다. ‘다섯개의 시선’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002년 시작 인권영화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섯개의 시선’에 이은 것이다. 이번 영화는
장애인(‘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 감독 박경희), 남성우월주의(‘남자니까 아시잖아요?’, 류승완), 탈북자(‘배낭을 멘 소년’, 정지우),
비정규직(‘고마운 사람’, 장진), 조선족(‘종로, 겨울’, 김동원) 등의 차별문제에 대해 다뤘다.
이번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법상의 19가지 ‘차별’ 사유 가운데 각 감독들이 한 가지씩 소재를 선택, 자신만의 시각과 방식으로 풀어갔다. ‘차이는 인정하면서
차별은 반대하는’ 것이 이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제작을 총괄한 이현승 감독은 지난 28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영화는 영화대로
즐기면서 상영이 끝난 뒤 관객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종로, 겨울’은
김원섭씨가 동사할 당시의 상황을 추론, 그의 행적을 좇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김씨와 막노동현장에서 일했던 조선족동포들을 비롯, 헤이장룽성 현지
가족과 이웃, 시민사회단체 관계자의 인터뷰 등이 곳곳에 삽입돼 있다. 차별의 굴레에 희생당한 김씨의 흔적을 통해 소수자의 인권과 사회의 무관심을
돌아보게 만든다.
김원섭씨의 수첩에 남겨진 ‘자유왕래’. 그 ‘유언’처럼 남겨진 네 글자가 드러나는 순간, 우리가 그를 얼마나
옥죄어 왔는지 문득 돌아보게 된다. ‘동포’란 같은 이름 앞에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차별’을 해 왔던 것일까. ‘종로, 겨울’은 ‘우리안의
타자’에 가혹한 우리의 자화상 같은 영화이자 부인할 수 없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