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은 어디에?
-정용석님의 "고구려,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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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가 만들어진 때가 12세기 중엽 고려 인종 23년이다. 고려는 신라의 강역에서 옛 고구려의 회복을 의미하는 국가로 신라의 제도와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은 신라의 연속된 왕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는 신라의 문화 속에 고려의 왕조 창건 타당성에 입각한 시각으로 쓰여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반란군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고려태조 왕건도 옛 군주인 신라의 여러 성과 주, 군, 현을 공략하여 직,간접으로 신라를 위협하였다.
힘이 있던 없던 신라조정의 신하로써 중앙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해서 정부를 배반하고 도적의 무리로 전화되고 반란세력에 있었던 입장은 고려태조 왕건이나 궁예나, 견훤이나 양길이나 다 같다고 볼 수 있다.
후백제가 한반도 완산에서 발흥하여 지금의 전라도 지역을 강역으로 하여 대국으로 섬길 국가가 있었다면 당시 대륙의 5대 10국 중에서 후백제와 가까운 강소성 양주의 회남 오국이나 안휘성에 있었던 남당과 교류를 하여야 함이 타당한 것이지 절강성에 있는 훨씬 남쪽 뱃길로 수천 리의 오월국과 국교를 맺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후삼국도 당연히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왕건의 기반인 浿西州의 군현들이 위치도 문제다. 패서주는 패수의 서쪽의 군현을 말하는 것이 되는데 패수(浿水)는 수경주소에 의하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고 설명을 하였고, 평양성과 장안성을 돌아 흐른다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패서주를 평안남도나 황해도 북부로 본다면 패수가 흘러가는 강줄기가 달라져야 한다. 만일 패수를 대동강으로 본다면 개성은 패서지방이 아니라 패남지방이 된다.
이제는 후삼국이 막을 내리는 과정에까지도 패수가 나온다면 그 패수가 있고 그 곳에 평양성과 장안성이 있고 한성이 있었다고 하는 곳으로 우리의 역사무대를 옮겨보자. 그 곳은 다름이 아닌 지금의 서안이자 당나라때 장안이 있었던 곳이다.
경애왕3년(A.D 926)가을 9월에 견훤이 고을부에서 우리 군사(고려군)를 침노하므로 신라왕이 태조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니 강한 군사 1만으로 구원하였으나, 구원병이 오기 전에 견훤이 11월에 신라의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때 경애왕이 왕비와 첩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어 즐겁게 놀다가 적군이 오는지 몰랐다.
신라왕을 위해 구원병을 보냈다가 후백제에 선수를 놓쳤다면 병력을 돌려 후백제의 본거지 완산을 공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 기록이 없다. 그때의 겨울 11월이면 지금의 1월달로 엄동설한의 혹한에 나대지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였다는 것도 신라는 어차피 무능하고 왕들이 주색 잡기에 빠져 멸망하는 것으로 만들어져 대륙의 하나라의 걸왕,은나라의 주왕, 당나라의 현종에게 대비시켜 누가 침략하지 않아도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말기 현상을 잘 피력해 놓은 각색에 불과한 내용이다.
한반도에 후삼국이 발흥하여 옛날 삼국의 땅에 분거하였다면 척박하고 산이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궁예나 왕건보다는 평야지대가 많아 군량미 비축이 많고 당연히 사람이 많이 살았어야 할 후백제가 후삼국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함에도 고려 왕건이 승리한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먹을 것이 풍부한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中國측 사서에 의하면 당나라가 몰락하고 다시 군웅이 할거한 오대 십국의 중원대륙의 기술에서 황하 상류지방인 감숙성 일부지방과 지금의 사천성의 전부를 관장하였던 군주가 왕건이라는 사실도 눈여겨 봐야 한다.
경순왕4년(A.D 930)에 가을 9월에 나라 동쪽의 바닷가의 주 군 부락들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의 태조세가에 의하면 신라의 동쪽 연해 주군과 부락이 와서 항복하니 명주로부터 흥례부까지 항복한 성이 1백 10성이다.
한반도에 심어진 명주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쪽이 되고 흥례부를 지금의 경남 울산이라고 한다. 경순왕 3년(A.D.929)에 동해안 전부가 태조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명주군 관내 일부는 진성여왕 5년(A.D 891)에 이미 궁예에게 항복하였고 그 나머지는 항복하지 않은 고을로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반도의 동쪽 태백산백 너머에 모든 주군이 항복하였는데, 이때의 고을부까지 즉 지금의 강릉에서 울산가지 항복한 성의 수가 110개라고 한다. 우리나라 태백산맥 너머에 급경사 지역에 토지도 척박한 지역의 해안가에 후삼국의 쟁패시기에 10개의 성이 있다는 것도 황당무계한 일인데 그언 사실이 삼국사기와 고려사 태조세가에 쓰여 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대륙의 동해안에서 일어난 일로 볼 수밖에 없으니 후삼국의실존도 대륙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1-01 1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