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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중국(透視中國)】 신하오녠 선생 ‘구평(九評) 공산당’강연
이름 : 한덕희
2006-01-01
【투시중국(透視中國)】 신하오녠 선생 ‘구평(九評) 공산당’강연 《‘구평(九評) 공산당’ 토론회 기록》 (1)   대기원시보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신당인 기자 린단(林丹), 셰쭝옌(謝宗延) 보도] 2004년 11월 19일부터 12월 4일까지, 대기원시보에서는 ‘구평(九評) 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9편의 논설을 연재하였다. 대기원 편집부는 <공고>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舊)소련과 동유럽의 공산당 정권들이 무너진 지 10여 년이 지난 오늘,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이미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역겨운 존재일 뿐이며 중국 공산당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시기 또한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하게 되었다.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당 정권이 무너진 지 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에서 도태되었으며, 중국 공산당이 역사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이다.” [린단(林丹)] ‘구평(九評)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이 창립 이래 중국 인민들에게 범한 갖가지 악행에 대해서 사상, 문화, 역사, 경제 등 각 방면에서 체계적으로 총결했으며 공산당에 대해서 전면적인 평판을 했습니다. ‘구평(九評) 공산당’이 공개된 이후, 전 세계 각지에서 거대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세계 각지에서는 일련의 토론회를 열었고,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겪은 경험과 학술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공산당의 죄악을 비판하면서 공산당의 본질을 폭로했으며, 공산당이 무너진 후 중국이 나가야 할 길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투시중국》 프로그램에서는 특별히 - 《‘구평(九評) 공산당’토론회 기록》 편을 방송하여, 시청자 여러분께 세계 각지 전문가들이 ‘구평(九評) 공산당’토론회에서 발표한 훌륭한 강연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뉴스 보도] 2005년 3월 6일 필라델피아 대기원시보와 ‘자유종논단(自由鍾論壇)’에서 주최한 제3회 ‘구평(九評) 공산당’에 관한 일련의 토론회는 펜실베니아 대학 왓튼(Wharton) 경영대에서 진행되었다. 토론회에는 드렉셀(Drexel)대학 경영학과의 셰톈(謝田) 교수가 사회를 맞았고,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역사학자이며 <황화강(?花?)> 잡지 편집위원이자 《누가 신중국인가(誰是新中國)》의 저자인 신하오녠(辛?年) 선생, 대기원 컬럼니스트 장톈량(章天亮) 선생, ‘고별중공(告?中共)’ 사이트 대표 허빈(賀賓) 선생이 각각 《‘구평(九評) 공산당’에 대한 두 가지 견해와 네 가지 소감》, 《전통적 예언으로 본 중공의 운명》, 《굴기(?起)할 것인가 아니면 붕괴할 것인가? ? 중공 멸망의 조짐》이라는 주제로 열강을 했고, 이어 관중들과 질의응답을 나눴다. 이번 토론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만, 중국대륙, 홍콩에서 온 화교와 유학생들 외에도, 10여명의 서양 학자들이 중영(中英) 동시통역을 통해 토론회에 참가였다. 토론회는 장장 3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토론회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고 각자 신하오녠(辛?年) 선생의 저작 《누가 신중국인가 》와 그가 편집한 《황화강(?花?)》 을 구매하였고, 신하오녠 선생은 현장에서 독자들에게 친필 사인을 해주었다. [린단(林丹)] 금일 【투시중국(透視中國)】 신하오녠 선생님 강연 특별 방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선생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신하오녠 선생님의 본명은 가오얼핀(高?品)이고, 일찍이 중국작가협회 회원이자 동 협회 안후이(安徽)성 지부 전문 작가를 역임했습니다. 작품에서 중국 현실에 대한 진실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작품은 중국 대륙에서 발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선생은 역사소설 작가로 전향하셨습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은 중공 국정 교과서와는 판이하게 다른 역사적 사실을 다수 발견하셨고, 이로 인해 중공의 본질에 대해 잘 이해하실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고심 끝에, 단호하게 소설가로서의 창작을 포기하였고, 중국 현대사 연구를 시작하셨습니다. ‘6.4 천안문 사건’ 이후, 선생님은 용감하게 거리로 나가 중공의 폭정에 항의했고, 맡고 있던 사회적인 직책과 영예들을 모두 포기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떠나 해외에서 《누가 신중국인가》를 저술하는 힘든 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사학자로서의 책임감과 용기로, 40년 동안의 고생 끝에 마침내 1999년 10월 중국 역사의 진상을 밝히는 이 역사 대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신하오녠 선생님이 펜실베니아 대학 ‘구평(九評) 공산당’ 토론회에서 하신 강연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연 제목은 《‘구평(九評) 공산당’에 대한 두 가지 견해와 네 가지 소감》 입니다. [신하오녠] 우선 간단한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하는 연설은 ‘구평 공산당’ 9편의 글에 대한 본인의 견해와 소감이며, 이것은 어떤 개인과 단체에 대한 칭찬이나 악담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문장을 소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학문을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 방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전에 설명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해외는 아주 자유롭지만 배경이 몹시 복잡한 중국인의 세계에서는, 그래도 매사에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좋을 겁니다. 만약 당신의 적으로 하여금 당신에 대해 오판을 하게 한다면 저는 이를 문제 삼지 않겠지만,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오해하게 된다면 매우 괴로울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다만 글을 통해 이 <구평 공산당>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 구평(九評) 공산당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신하오녠] 우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평(九評) 공산당에 대한 두 가지 견해입니다. 첫 번째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래 혹은 1921년 공산당이 창당된 이래, 일평, 이평, 삼평에서 구평까지 ‘공산당을 평가하는데 이렇게 큰 규모로, 공산당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그것을 비판하고 악행을 폭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중시해야만 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번째 특징은, <구평 공산당>은 정면 공격이며 이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랜 세월동안 공산당이 반혁명(反革命)이라 말하면 곧 반혁명이 되고, 반동파(反動派)라고 말하면, 즉 반동파가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떤 사람이 나와서 “너희들 공산당 역시 반동파이고 반혁명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두렵습니다!! 공산당의 참혹한 전제(專制)정치 아래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용기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구평(九評) 공산당’은 공산당과 완전히 대립되는 입장에서 공산당을 비판한 것으로, 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1949년 이후의 중국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외국에서도,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고 반드시 인정해야 할 사실입니다. 특히 1989년 이후 해외에서, 우리는 모국인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과 규탄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하였고, 또한 공산당의 진면목을 숨기고 붉은 깃발(?旗)를 흔들면서 그에 반대했으며, 이따금씩 마르크스 레닌주의란 겉옷을 입고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렇게 결단력 있게, 공산당과 대립해서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공산당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확실히 많지 않았고 매우 적었습니다. 이것이 <구평 공산당>에 대한 저의 첫 번째 견해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이에는 이로 맞대응한 것입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누가 감히 수용소(문화대혁명 시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연금되었던 장소)에서 공산당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반(反)우파 투쟁을 할 당시 및 문화대혁명 시기에 공산당에 대해서 비판을 하겠습니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모두 사후(事後)의 영웅, 배후(背後)의 영웅, 숨어있는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어느 수련 단체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이비교[邪敎]라고 말하지만,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사이비교이다!”라고. 정말 대단합니다! 어느 누가 공산당보다 더 흉악합니까? 없습니다! 이점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공공연히 문장 중에서 공산당의 이름을 들추어내어, 너희들은 깡패 집단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맞대응하는 방법은, 중화민족 50여년의 역사상 우리 모두는 틀림없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이 나서서, 진정한 깡패에 대항하여 “당신이야말로 깡패이며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상황은, 제 생각에, 중화민족이 변하기 시작했고, 중국인들이 중공의 속임수에서 빠져 나오고 있음을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의식, 우리의 정치적 각성은 이미 각종 방식으로 물결치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바로 대규모의 집중적 규탄 행위라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구평(九評) 공산당’의 9편 문장은 사상, 문화, 역사, 경제 등 각 방면에 걸쳐서 공산당에 대해 전면적인 평가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전의 수많은 중요한 연구 성과들을 포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독특한 신조와 정신세계를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각 방면에서 공산당에 대해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각심을 주었고, 깊은 반성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평범한 문화인으로서, 공산당의 80여 년 역사를 연구한 후에 《누가 신중국인갬라는 책을 쓴 제게 있어서도 여전히 대단한 놀라움과 존경심을 느끼게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저의 두 가지 견해를 간단히 말씀 드렸습니다. □‘구평’은 ‘전제(專制) 개량’ 불가능함을 증명 [신하오녠] 그러면 지금부터 저의 4가지 소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소감은 ‘구평(九評)’은 하나의 진리를 증명했는데, 그것은 바로 ‘전제(專制) 개량’이란 이 길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전제 개량일까요? 이것은 바로 전제 정권과 전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개량에 불과합니다. 민족, 국가, 인민의 입장에 서서 권리와 이익을 대중에게 분배해주지 않고, 국가의 미래만을 위해 분투하는 일종의 개혁, 이것이 바로 전제 개량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16세는 재위 16년 동안 수많은 대내 개혁과 대외 개방을 했으나 그 결과 그는 단두대에 올려져 처형당했습니다.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네(Minett)는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였습니다. “난폭하고 민의를 저버리는 군주와 개혁의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군주, 그들의 미래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1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즉, 1801년에서 1861년까지, 장장 60년 동안 개혁개방을 추진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1917년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의 포성이 울려 퍼졌고,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치는 이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10월 혁명(볼셰비키 혁명)이 아니라, 2월 혁명의 포성이라는 점입니다. 10월 혁명은 배반을 도모한 것이었지, 공화국을 위한 포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국은 어떻습니까? 100년 전, 우리의 청나라는 50여 년 동안 두 차례 희로애락이 교차된 개혁개방을 추진했습니다. 당시에는 이것을 양무(洋務)운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혁개방은 우리 무지몽매한 중국인들에게 전화와 전보, 군함과 기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고대 중국을 빠르게 근대화로 인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실행한 모든 것은 사실 덩샤오핑, 자오쯔양 등의 개혁가들이 100년 후 답습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태후 자신은 직접 ‘상하이도(上海道)’의 승급을 허락하고, 그곳을 경제개혁특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 상하이에 하나둘씩 세워진 고층 건물들이 청나라의 운명을 바꾸진 못했습니다. 왜 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 통치를 유지하는 범위에서 수행되는 개혁으로는 자신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 정권, 한 정부, 한 정당의 개혁이 단지 자신의 권리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서 실행되는 것이라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실패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제정치의 개량’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무슨 근거로 ‘구평(九評) 공산당’이 전제정치의 개량이 성공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고 말할까요? 그럼 먼저 문제의 핵심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전제 통치자든지 개혁개방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것은 모두 ‘국가태평, 민생안정’을 위해서 일 것입니다. 15년 전의 그 피비린내 나는 학살(6.4 천안문 사건)을 차치하더라도,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는 이미 태평한 국가와 안정된 민생의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25년의 개혁개방 성과를 과장 선전하고 난 후, 갑자기 해외에서 발표된 ‘구평 공산당’에서, 이 9편의 문장은 완전히 공산당과 대립되는 입장에서, 중국, 공산당, 그 정권과 그리고 오늘날 정치 현실에 대해서 철저하게 부정하였습니다. 이것이 ‘민생안정’인가요? 이는‘안정’이 아닐 뿐 아니라 바로‘위기’입니다! 국가태평과 민생안정이 비록 공산당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라도, 공산당의 손아귀에서 그것은 절대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평’은 위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진리를 증명했습니다. ‘중공장기집권, 민생장기안정’을 꿈꾸는 그런 전제정치 범주 내의 개혁은 절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첫 번째 소감입니다. □ 공산당은 중국인민을 강압하였다 [신하오녠] 두 번째 소감은 구평은 또한‘강압적으로 수행되는 혁명의 진리’을 증명하였습니다. 무엇이 ‘핍박에 의해 양산박으로 들어간다[逼上梁山]’입니까? 우리 모두는 중국 고전소설 <수호전>을 본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추가적인 해석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혁명은 단지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가 혁명을 촉구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손중산(孫中山)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혁명이 아무렇게나 거행될 수 있는 것인가? 청나라 때 보수파의 무능함이 결국 만백성을 들고 일어나게 했고, 이에 신해혁명이 비로소 정당화되었으며 필연적인 역사 추세가 되었다.” 몇 년 전에 중국대륙에서 <수호전> 드라마를 찍었는데, 여러분 아직 기억하고 계시나요? 그 주제가의 일부분이 중국대륙 전역에서 유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손을 써야만 할 때, 바로 손을 쓴다(該出手時就出手)”는 것입니다. 이 글귀에 대한 해석을 하자면, ‘반드시’는 무언가에 의해 핍박 받았기 때문이고, ‘바로 손을 쓴다.’는 것은 핍박 받은 후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만 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해외와 국내에서, 그렇게 큰 수련단체(역주: 파룬궁)가 ‘장쩌민과 공산당에 반대하지 않는다.’에서 ‘장쩌민에 반대하고 공산당은 더욱 반대한다.’로 변한 것은 그들이 핍박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럼 누구에 의해서 핍박 받은 것일까요? 정답은 당연히 공산당의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혁명의 동기, 혁명의 발발, 군중의 심리변화, 이 모든 것은 군중이 먼저 혁명을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고, 통치자가 자신의 반동적이며 완고한 수단을 사용해 군중을 핍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철저히 정권을 전복시키고 사회 개혁을 도모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구평 공산당’을 읽고 난 후,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여 년 동안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혁명이란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두 살인방화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중국 공산당은 줄곧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제거했고 또 어디 살인방화에만 그쳤겠습니까! 그러나, 공산당에 의해 제거된 사람 중에 누가 살인방화를 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역사의 진실입니다. 1989년 이후, 해외에서는 먼저 손중산을 타도하고 손중산을 부정하며 캉유웨이(康有爲)를 찬양하는 개량 운동이 일어났으며 심지어 이런 말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만약 손중산이 혁명을 하지 않았다면 청나라의 개혁개방은 성공했을 것이다.”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는 변발을 하고 마고자를 입은 채 세계 현대화의 조류에 발맞추어 나갈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서태후는 <공화국으로 가는 길(走向共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애신각라(愛新覺羅, 청나라 황실)의 강산은 나의 것이며, 또한 만백성의 것이다.”라고. 그녀는 모든 강산의 근본적인 주인이 청나라 황실이길 원했고 또 이것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다음, ‘위대한’ 무산계급혁명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정권을 잡은 후, 수없이 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무산계급의 확고한 붉은 강산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지금은 도리어 무슨 색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최근 중국문제와 관련해서 완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그릇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각자의 안목과 시각을 중국사회의 현실적인 변화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2004년에 발생한 5만8천여 건의 데모와 시위는 사실상 이미 다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정국의 개선을 도모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통치 아래서 혁명의 바람이 정말로 불기 시작했으며 현재 이렇게 폭발해버렸다!’라고. 우리는 반드시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며, 비록 강요당한 것일 지라도 사상적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무엇을 준비하는가 하면, 책임감 있는 공화국민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중국에서는 아마도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이 혁명에 대해 반드시 충분한 계획, 기대, 제약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훗날 공산당이 무너지고 나서, 우리 조국이 신속하고 평화적으로 공화국으로 변모할 수 있도록 일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소감입니다. □ 중공은 ‘마르크스-레닌 사교(邪?)정치집단’   [신하오녠] 저의 세 번째 소감은 제가 개인적으로 ‘구평 공산당’에서 언급된 ‘공산당은 사교(邪?)’라는 말에 동감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좀 전에 말했듯이, 공산당이 사교(邪?)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왜 사교일까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야말로 사교이고, 공산당은 그들이 중국에서 만들어낸 ‘사교(邪?)정치집단’에 불과합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공산당의 교육을 받고 자라났는데, 오늘날 유행하는 말로 이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공산당의 이리(狼) 젖을 마시고 자라났다.” 우리가 공산당을 옹호하던 과거, 그리고 오늘날 공산당에 반대하는 방식 중에서 종종 공산당이 먹여준 이리의 젖이 끊임없이 몸속에서 발효되고 어떤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를 없애려면, 참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것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이에 대한 정답은 우리가 독일사람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사상적 아버지로 삼은데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말한 모든 것을 모범으로 삼고, 진리의 화신으로 삼은 것은 우리의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이 길고 긴 잘못된 역사 중에, 우리가 ‘중화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부지불식간에 ‘마르크스-레닌의 자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 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사교라고 말하는 걸까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첫째 여러분께 우선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한 대학 안에서, 즉 미국의 대학 안에서, 이곳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19세기 유럽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이 어느 노선을 걷고 있었는지 어떻게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로, 19세기의 유럽은 정치적으로 전제(專制)에서 공화(共和)로 변모하던 시기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죠? 그렇지 않다면, 입헌군주제의 영국과 유럽의 여러 공화국들, 프랑스 공화국, 러시아 공화국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이것은 모두 19세기 유럽이 전제에서 공화로 변했다는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19세기 유럽이 전제에서 민주로 그 정치체제를 바꾸고 있을 때, 1848년 발표된 공산당 선언은 무엇을 주장했습니까? 그들은 도리어 무산계급의 전제정치(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정치 이념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습니다. 하나는 전제정치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선택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산계급 전제정치를 하자는 것이 있었습니다. 1926년 우리의 현명한 량치차오(梁啓超) 선생은 다음과 같은 매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무산계급 전제정치든 혹은 자산계급 전제정치든지, 전제정치는 모두 좋은 것이 아니다! 또 새로운 것도 아니다!”라고. 우리의 현명한 선조는 이렇게 너무나도 타당한 말을 하셨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매우 위험한 사상이 있었는데, 저는 줄곧 무산계급 전제정치에 대해서 들었고 이에 더해 저는 우파 교수의 아들로 전제통치를 받는 물건과 같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에게 전제통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밥주걱을 자기 손아귀에 쥔 주방장처럼, 그는 당신에게 밥을 떠줄 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신에게 어떤 옷을 입힐지 말지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당신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면 반드시 그것을 따라야 할 겁니다. 이런 절대 권력자가 과연 무산계급에 속할까요? 전체 사회와 국가인민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와 재산을 자기 손 안에 쥐고 있는 독재자가 여전히 무산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19세기 유럽은 전제정치에서 민주주의로 탈바꿈하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독일인 마르크스는 ‘전제정캄앞에 ‘무산계급’이라는 말을 붙였고, 이렇게 전제정치를 합리화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면, 이론적으로 말해서 무산계급 전제정치는 과연 전진일까요 아니면 퇴보일까요?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 사교(邪敎)는 정치적으로 ‘역사의 요구를 퇴보시키는 것’을 제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19세기 유럽의 발전방향과 정반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진실입니다. 우선 근 백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의 결과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더라도, 러시아나 중국 또 세계 기타 몇몇 국가의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정치, 그들의 극단적인 전제정치와 극심한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알고 있기에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이 모두 알다시피, 세계는 공화를 선택했고, 유럽과 미국을 시작으로 일어난 18, 19세기의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등은 단지 정치적으로 전제정치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봉건경제, 봉건권력경제, 봉건길드경제에서 자유시장경제로의 체제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전제는 바로 ‘사유제산 보호’가 됩니다. 사유재산제도의 확립이 없다면, 봉건 권력과 길드 경제를 전복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모든 자본의 작은 몫에는 무산계급 노동자들의 선혈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의 기치 아래에, 그는 더욱 분명하게 ‘사유제 소멸, 공유제 제창’을 주장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데,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봉건권력경제와 전제권력경제에서 해방되어 자유시장경제로 변환되는 과정은 바로 사유재산제도 또는 다시 말해 자유경제가 권력경제를 싸워 이긴 과정과 같습니다. 그래서 소위 ‘사회주의 공유제’의 아픔을 충분히 겪은 우리 중국인들은 다음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주장한 것처럼 공유제로 모든 자본주의 사유재산제도를 대체하는 것이, 19세기 유럽역사의 발전을 따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19세기 유럽의 역사발전에 위배되는 것입니까? 이는 정확히 역사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현재 어떤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일종의 권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모든 시장경제를 운용하고 있으니, 이것을 진정한 시장경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도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적인 후퇴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19세기 유럽의 자유경제와 반대 노선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경제적 퇴보를 가져왔다고 봐야 합니다. 이점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후진타오는 북한과 쿠바는 계속해서 올바른 정치를 하였지만, 다만 경제 방면에서 잠시 낙후되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르크스-레닌의 자손인 후진타오를 보십시오, 얼마나 우매하고 무지한지! 세 번째로, 더욱 중요한 것인데, 이곳에는 모두 사람들이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인권(人權)인지 모두 알 것입니다. 인권이란 우리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권리입니다. 그러면, 19세기의 유럽은 사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장기간 종교통치, 종교전제정치, 봉건통치와 왕권통치의 지배 아래서, 19세기 유럽인들은 인간성 해방에서부터 인권 추구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지요? 이 점은 서양역사를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소위 인간성 해방, 인간성 추구라 함은 ‘개성 해방’을 말하며, 개인의 자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리어 우리는 인간성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계급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급성으로 인간성의 해방과 개인의 자유를 대체하였습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에 이르러서야 저는 하나의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소위 ‘계급성’이라 함은, 봉건제도의 뿌리이고 계급성이 없다면 봉건제도도 없을 것이며 봉건제도가 있다면 반드시 계급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아래에서 또 언급할 것입니다. 봉건제는 등급제, 즉 계급에 의거해 생겨난 것입니다. 일단 이 계급을 무너뜨리면 즉, 계급성을 없애면 봉건제는 그것의 뿌리가 되는 사회적 기초와 인문적 기초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완전히 19세기 유럽의 발전 추세와 반대방향으로, 인간성 소멸을 도모하고 계급성으로 인간성을 압박했으며 마지막으로는 당성(黨性)으로 계급성을 대체했습니다. 레닌의 수많은 저작 중, ‘무산계급의 당성 원칙’ 등등 이러한 글들은 모두 개성과 인간성 소멸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반세기 혹은 수십 년을 생활한,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는 인간성과 개성이 공산당의 통치 아래 이미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히고 억눌렸는지 잘 알 것입니다! 넷째, 19세기 유럽이 전제정치에서 민주정치로 전향하는 과도기 중에, 유럽의 모든 문화는 다원화(多元化)의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더 추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다양한 사상문화 유파가 왕성하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이때 주장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마르크스는 일원론을 무기로 삼고 다원론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 사교를 따르는 국가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두 다원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레닌은 자신의 저작 ‘당의 조직과 당의 문학’에서 문학조차도 무산계급, 공산주의혁명이라는 기계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나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4가지 사실에 근거해, 우리는 19세기 유럽이 전제정치에서 민주공화정으로 바뀌는 과정 중에,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은 도리어 정치적으로는 전제로 민주를 몰아냈고, 경제적으로는 공유제로 사유제를 대체했으며, 인간성 면에서는 계급성으로 개성을 소멸하였고, 문화적으로는 일원화, 독재화로 다원화를 거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선진적입니까? 이것은 완전히 19세기에 생겨난 사교(邪敎)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과 후진타오는 중국 대륙에서 무슨‘공산당의 선진성 유지’를 목표로 하는 교육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럼 무엇이 선진적인 것입니까, 공산당 자체의 뿌리가 잘못된 것이데, 과연 선진화될 수 있겠습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퇴보를 주장하는 사교라고 주장할 때, 공산당은 사교 정치집단이라고 비판할 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선진적이 아니며 극단적 반동사상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은 또 매우 사교적인 특징 두 가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사악한 정치적 이론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정치적 이론 고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폭력혁명, 폭력투쟁, 무산계급전제정캄입니다. 레닌은 계급투쟁만을 인정하고 무산계급전제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폭력혁명은 과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계급투쟁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역시 마르크스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무산계급전제정치를 처음으로 제안했는데, 이것이 다른 것들보다 더욱 위험한 이유는 근대 사회과학을 이용해 폭력혁명, 계급투쟁과 무산계급전제정치 이 세 가지를 한데 연결시켜, 사악하고 공포감마저 주는 이론 고리를 만들어냈다는데 있습니다. 폭력혁명을 통해서 계급투쟁을 도발하고, 더욱이 폭력혁명과 계급투쟁 도발을 통해서 무산계급전제정치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근본적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 고리로 정권을 얻고 그것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지요. 비록 레닌이 한 말을 인용한 것이긴 하지만, 마오쩌동은 계급투쟁은 조절할 수 있고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계급투쟁을 크게 하려면 커지는 것이고 작게 만들려면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평’에서 말한 것처럼, 공산당은 살인을 수단으로 정권을 얻고 그 통치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 정치이론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공산당의 진실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두 번째, 폭력혁명, 계급투쟁, 무산계급전제정치를 구호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기본이론의 정치 고리는 ‘혁명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 이 시대의 사람들은 ‘혁명의 이름’이라는 러시아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당시 우리는 얼마나 숭고한 마음으로 무산계급의 위대한 지도자, 러시아의 혁명 지도자 레닌을 바라보았습니까! ‘혁명의 이름으로’ 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입니까! 그러나 참담하게도 십 여 년 후에, 우리는 비로소 ‘혁명의 이름으로’ 거짓, 기만, 살인 등 온갖 나쁜 짓거리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혁명의 이름’! 공산당은 ‘혁명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자행했고, ‘혁명의 이름으로’ 진정한 혁명성과를 뒤로 밀어냈으며, ‘혁명의 이름으로’ 반동적인 전제통치에 힘을 실어주었고 소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지요. ‘혁명의 이름으로’ 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정교(政敎)일체식의 극단적인 암흑통치를 실행하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렇게 유럽의 발전 추세에 역행하고, 인류의 진보적 사상과 동떨어지게, 우리 중화민족의 국가인 중국대륙서 전제정치제도를 재현했습니다. 또 현재 당(黨)조직의 전제정치를 실현시켰으며, 수 천 년 중국 역사상 나타난 적이 없었던 정교일체의 극단적 암흑통치를 구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련화 된 중세 유럽식의 정교합일통캄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야 비로소 근본적으로 문화, 정치, 사상, 경제, 기타 방면에서 ‘구평 공산당’이 이미 폭로한 것처럼, 마르크스-레닌의 사교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고, 공산당이란 이 사교집단이 우리 민족, 국가, 인민에게 가져온 크나큰 역사적 손실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화민족이 마르크스-레닌을 막무가내로 타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중화민족에 해를 끼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인 도리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미래에, 장톈량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공산당이 대규모 붕괴를 시작한 후, 허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대규모 붕괴가 도래할 때쯤, 더욱이 공산당 전제 통치를 전복시키는 힘든 과정 중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갈망하는 공화정을 실현시킬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중국 대륙에서 특히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과 다음 세대의 사람들 중에서 사상적으로 공산당의 잔재를 밖으로 완전히 밀어낼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중국 공산당이 이를 잘못 실행한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사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 공산당이 그것을 왜곡해서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공산당은 사교정치집단으로 충실하게 마르크스 사교가 요구하는 것을 수행해왔고, 이로써 중국에서 전례가 없는 이렇게 큰 어려움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반드시 파악해야만 다시는 그 사교에게 미혹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의 사상적 굴레에서 우리 자신을 먼저 해방시켜야만 비로소 우리 민족과 민족문화의 해방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세 번째 소감입니다. □ 중공은 반(反)민족역사, 반(反)민족진보, 반(反)민족단결 [신하오녠] 네 번째 소감은 개인적으로 저는 ‘구평 공산당’ 9편 중에서, ‘공산당이 민족문화를 파괴했다’는 글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아주 우연히 제 생각과 같은 글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황화강(?花?)》 잡지에 《마르크스주의를 몰아내고, 중화의 민족정신을 회복하자》라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의 모티브는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공산당이 민족문화를 훼손하였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연세가 있는 분들은 공산당이 어떻게 ‘사구(四舊: 옛 사상, 문화, 풍속, 습관) 타파’를 했고, 어떻게 ‘반(反)봉건’을 진행했는지, 또한 그들이 어떻게 각종 민족문화를 훼손하는 전례 없는 죄악을 저질렀는지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왜 우리의 민족문화를 파괴하려고 한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원인입니다. 공산당은 어떻게 우리의 민족문화를 훼손한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조국이 없고, 조상이 없으며 조국과 조상 모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중국 공산당은 근본적으로 반민족을 지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산당의 80여년의 행적은 바로 반민족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공산당이 어떤 면에서 반민족적인 행동을 했는지 소개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그들은 민족역사를 억압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마르크스가 살았던 당시 주변 환경에 대해서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을 하겠습니다. 영국은 서기 1295년 처음으로 국회를 소집하고, 이를 ‘모범의회(Model Parliament)’라고 칭했습니다. 영국은 이를 통해 비로소 봉건제에서 점차 군주제로 그 정치체제가 변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의 기간인 5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청교도 혁명이라는 공화혁명이 발발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봉건제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매우 심원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찬양하는 영국 신사의 매너는, 사실상 영국 봉건사회의 일종 생활태도가 역사에 남겨준 풍속과 영향입니다. 두 번째로 프랑스를 예로 들겠습니다. 프랑스는 서기 1302년 처음으로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를 소집하였고 매수를 통해서 봉건 문제를 해결하여 비로소 군주전제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300년이 조금 지나, 프랑스는 개혁개방을 추진하였고 이어서 공화혁명이 일어나 군주전제정권을 몰아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에서 우리가 명확히 느낄 수 있는 것은, 귀족, 성직자의 지위와 권리가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프랑스 국왕이 특권을 이용해 귀족과 성직자를 매수한 후에 비로소 자신의 군주전제정치를 실행했고 프랑스의 봉건제도를 점점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러시아를 예로 들겠습니다. 러시아는 1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주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군주제를 실행했고 이때부터 차르(러시아 황제)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1861년에 이르러 러시아에서는 농노제 개혁이 일어났고 이전 300여 년의 시간 동안, 러시아에서는 사실 왕권과 농촌봉건제도가 밀접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수많은 러시아 문학작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러시아가 농노제 국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농노제는 무엇인가요? 농노제는 바로 농촌 봉건제도를 뜻합니다. 1861년 알렉산더 2세는 개혁개방의 ‘아주 양호한 형세’ 중에, 마침내 정치개혁의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농노해방입니다. 러시아가 농노해방을 한 1861년을 기억해주시기 바라며, 이로써 러시아의 농노제도는 비로소 정식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러시아의 민족 역사상 봉건제의 영향은 상당히 심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독일은 11세기에 봉건화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까지 즉, 1871년 1월 18일에야 비로소 프로이센 제국이 성립되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연대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봉건제도는 800여 년 동안 유지되었고, 11세기 중엽부터 1871년에서야 비로소 통일되었으며 군주제가 확립되었습니다. 1848년 마르크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혹은 자신의 모든 저작에서 있는 힘껏 반(反)봉건을 주장했을까요? 이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할 때, 독일은 아직 봉건국가였고 봉건 계급제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통일되어 본 적이 없는 분열 국가였던 셈입니다. 당시 독일에는 작고 작은 봉건정권이 800여 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리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국가들이 있었던 셈이죠.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렇게 반봉건을 외쳤던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 것은 결코 저 개인의 학식을 자랑하려고 함이 아니라 어떤 한 문제 대한 설명을 해드리기 위함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를 자만에 빠뜨릴 수도 있고, 우리로 중국의 마르크스 레닌의 자손들에 대해 그 조상과 역사에 대한 무지를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중국 주(周)나라 800년 중, 초기 300년은 봉건화의 전기(前期)로, 봉건제도를 만들어가는 시기였으며 보통 서주(西周)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 단계로, 봉건제도가 공고히 되고 부패되는 시기인데, 이를 춘추시기라고 부르며 기간은 250년 정도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전국 시대라고 하는데, 이때는 봉건제가 와해되고 평민제가 흥성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이 주나라 800여 년 동안 봉건제도의 흥기, 공고, 부패, 와해의 전 과정을 거쳤습니다. 다음과 같은 비교를 해봅시다. 우리의 진시황은 봉건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세웠는데 그가 봉건제도를 폐지한 것은 기원전 209년의 일입니다. 그러니 2200여 년 전에 중국의 봉건제도는 이미 진시황에 의해서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중국인은 이미 아주 오래 전에 봉건제도에 반대했고, 또한 이것이 벌써 20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을 시작으로 해서, 한나라 개국부터 한무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93년 동안, 중국은 마침내 봉건귀족제도를 철저히 몰아내었고, 군주제인 군주전제정치를 확립했으며, 군주의 평민정치제도를 건립했습니다. 그러므로 독일인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봉건통치체제 아래서 생활할 때, 그들이 소리 높여 반봉건을 주장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공산당선언과 모든 저작물이 하나같이 반봉건을 주장한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기타 몇몇 국가에서, 즉 모든 유럽에서 봉건제도가 사라질 때쯤, 실제로 그들은 근대화에 매우 근접하였기 때문에, 봉건제도와 그 잔재에 반대하는 것은 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일고 있었던 반봉건 요구를 하나의 역사적인 추세로 파악했고, 전 세계가 자신과 함께 반봉건을 주장하길 희망했고, 그 당시까지 모든 인류의 역사를 봉건제도의 역사라 말했는데 심지어 이를 공산주의 사교의 경전과도 같은 교조(??)로 삼은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위 반봉건 요구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서 열심히 반봉건을 외쳤으며 반봉건의 기치아래, 선조들을 모함, 비판, 부정하고 그 흔적을 소멸했으며, 우리의 모든 문화를 봉건시대의 잔재로 삼았으며, 모든 사상과 신앙 역시 봉건시대의 유물로 귀속시켰습니다. 봉건제도가 무너진 후 2000여 년 동안 발전한 우수한 문화를 싸잡아 부정하는 것이, 우리 중화 자손이 할 짓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무지한 마르크스-레닌 자손의 반동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는 그들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들은 죽어서 마르크스에게 보고를 하지, 손중산이나 진시황 혹은 한무제에게 보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죠? 좋습니다. 이 근본적인 도리를 이해한 후에야 우리는 마르크스 사교가 중국에서 만들어낸 사교정치집단이 자신의 조상과 민족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도리어 반봉건이란 기치를 내걸었고 모든 중화민족의 역사를 억압, 제거, 심지어 매장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외의 어느 중화민족 자손에 대해서든지, 이 사실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공산당은 민족의 발전을 저해했습니다. 방금 까지 저는 공산당이 어떻게 민족역사에 저해되는 짓을 했는지 설명 드렸고, 지금부터는 민족 발전의 저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기원전 209년 진나라를 세우고, 한나라가 그 뒤를 이으면서 약 2000여 년 동안 군주제가 이어졌고 송나라 전까지 중국에는 민주적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시간 관계상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북송(北宋) 이후에 유교정치 사상의 변화와 두 차례 오랑캐의 침입으로, 또한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재상제도를 없애고(행정부를 없앤 것과 같음) 황권을 강화시켜, 비로소 700여 년간 중국전제통치의 강화를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 전을 돌이켜보면, 1840년 이후 상황에 직면하여, 즉 서구 열강의 침입과 약탈에 직면하여, 내환이 끊이지 않는 국면에서 중국인들은 마침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우리가 나서서 반드시 정치제도를 바꿔야겠다. 2000년 동안 유지된 우리의 군주제는 너무 낡고 낙후되어 서구가 이를 얕보기 시작했으니 마땅히 그것을 갈아 치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공화혁명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에 손중산이란 인물이 등장한 것입니다. 중국은 비로소 공화정에 대한 이론을 가지게 되었고, 스스로 공화혁명을 일으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 ‘중화민국’을 건립했습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 반드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날 중화민국을 말할 때 제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외몽고를 포함한 진정한 대(大) 중화민국이지, 오늘날과 같은 가짜 중화민국 소위 소(小) 중화민국, 즉 중국으로부터 독립과 분리를 도모하고 있는 중화민국(역주 : 대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이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사실은 무엇을 설명할까요? 이는 우리 민족이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군주제가 매우 낡았다는 것을 알고, 시대의 요구에 순응해 전제정치제도를 버리고 재빨리 공화국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대(大) 중화민국이 건립된 후에, 중국은 국회, 법제가 생겼고, 인민들은 출판 및 언론의 자유를 가졌으니 그들에게 ‘공화국으로 가는 길’이란 드라마를 보게 하는 것은 어떠했을 까요! 그 하나하나의 화면은 신해혁명 이후 중국인들이 민주자유를 누리고 있는 상황을 얼마나 흥분되고 감동적으로 표현했을 까요! 그러나 마르크스-레닌 사교의 이론에 따르면, 신해혁명은 ‘자산계급혁명’이고, 이는 무산계급혁명이 반드시 몰아내야 될 혁명에 불과합니다. 마르크스-레닌 사교의 요구에 따르면, 중화민국은 무산계급의 공화국이 반드시 전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레닌은 마르크스 교주의 지도 아래, 러시아 2월 혁명을 비난하며 소위 공산 러시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것을 구심점으로 삼고 전 세계 공산혁명 발동을 도모했으며, 그 첫 번째 목표 기점으로 베이징을 생각했습니다. 그가 말한 명언이 있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레닌은 “유럽으로 가는 지름길은 베이징과 캘커타(인도의 항구도시)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가 유럽에 있는데, 유럽으로 가는 길로 베이징으로 우회해서, 캘커타를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설명할까요? 그것은 러시아 제정이 우리 중화대지에 보인 야심을 계승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새로운 황제인 레닌, 스탈린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우리의 중화민국, 즉 대중화민국을 전복시켜야만 했고, 우리의 손중산 선생과 그의 중국 공화혁명이 세운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전복시켜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중국을 진보하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 민족을 찬란한 미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공화혁명이 일어난 중국을 다시 전제정치라는 구식 체제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는 자연적으로 매우 비관적인 것이었습니다. 공산당이 우리 민족의 진보를 저해한 두 번째 요점은, 1949년 이후,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경전으로 삼아, 서양의 진정한 발전을 자산계급의 정신적 오염물로 삼았으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모두 봉건 잔재로 여겨 중국 인민이 자신의 조상과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서양의 진정한 문명발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공산당은 우리의 사상과 육체를 태평양 동쪽에 엄격히 국한시켜놓고, 선조들의 공화국에 대한 업적과 세계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성과를 이해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승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민족 최대의 비애가 될 것입니다. 또한 1949년 이후, 그들은 정말로 반동적인 행동을 다수 거행했습니다. 중공이 1949년 정권을 빼앗은 후,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이 당시 세계 발전과 우리 중화민족의 역행과 진보만을 비교해본다면, 마르크스-레닌 사교가 중국에 건립한 이 사교정치집단이 우리 민족의 발전을 얼마나 심각하게 저해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크게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공산당의 반민족역사와 반민족진보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이제 공산당이 우리 민족의 단결을 저해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따르면 공산당은 중화민족이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통일된 진정한 공화국이 되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세워졌을 당시, 그들은 ‘중국의 소수민족은 모두 중국에서 분리되어 세계의 선진적인 민주연합에 가입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진적 ‘민주’연합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맹’, 즉 구소련이었습니다. 1925년 리다자오는 모스크바 연설 중, “우리는 외몽고가 중국에서 독립하는 것에 찬성하고 소련이 외몽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외몽고는 공산당 소련에 의해 침입과 점거 당한 후에 비로소 ‘독립’되었습니다. 1928년, 중국 공산당은 상해 샤페이루(霞飛路), 지금의 화이하이쫑루(淮海中路)의 한 사진관 2층에서 회의를 열었고, 이때 중국 공산당의 대만문제에 대한 ‘삼대주장’이 정식으로 제안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1928년 4월 15일, 상해 샤페이루 사진관 2층에서 결정된 삼대주장은 무엇인가요? 바로 ‘대만민주, 대만혁명, 대만독립’입니다. 대만독립은 이때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대만독립에 대해 거론되기 시작한 그날은, 바로 공산당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이 대만독립에 대해 직접적으로 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무산계급혁명의 민족주의이론에 따르면 대만민족이 생겨날 수 있다.”이것이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우리 중화민족을 분열시킨 사례입니다. 1928년, 스탈린은 자금을 대주며, 중국 공산당이 모스크바에서 제 6차 대표회의를 열도록 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이 또 어떤 선언을 했는지 아십니까? “중국 국경 내 소수민족과 그들의 거주지가 만약 중국에서 분리되지 않는 다면 중국은 영원히 통일되지 못할 것이다.” 현재 대만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그 중국분열파의 말과 ‘중화민족이지만, 중국인은 아닌’것 같은 말들은, 모두 공산당의 망언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1931년, 일본인이 우리 중국의 동북(東北) 3성을 침입(918 만주사변)했을 때, 9월 20일 코민테른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호기를 이용해 중국에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공산당에 명령하였습니다. 두 달 후, 소련의 국경절인 11월 7일, 공산당은 중국 장시(江西) 루이진(瑞金)에서, 소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창립하였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뜻을 보면, ‘소비에트’는 무엇입니까? 소비에트는 러시아어 SOVIET의 역음입니다. 중국 어느 지역에 ‘소비에트’가 있단 말입니까! ‘소비에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나 오늘날까지, 중국 공산당이 건립한 중국혁명역사박물관에는 여전히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매우 높게 떠받들어져 있습니다! 사실, 중공은 중화민족이 침략을 받을 시기에, 중국을 분열하고 두개의 중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건립될 당시 선언한 ‘헌법’ 제14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중국 국경 내의 모든 소수민족과 그 지역은 중국을 벗어나, 독립된 국가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 모두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 제14조’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대만독립은 중국 공산혁명과 같이 태어난 것이고 중국 공산당이 바로 대만독립을 조성한 것입니다. 1997년 토론토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어떤 노년 청중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서, 그는 저를 붙잡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는 저에게 어떻게 대만 2.28 중공지도위원회(228사건 조직위원회)를 아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이를 알고 있고, 당신이 2.28 중공지도위원회의 위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이것을 말하지 마세요, 절대로 말하면 안돼요!”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탄압때문에, 공산혁명의 대만독립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육칠십 년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에서 이미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대중화민국을 전복시킨 후, 즉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에서 공화정을 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을 전복시킨 후(제가 말씀드리는 중국 국민당은 지금의 국민당은 별개입니다), 대만에서는 대만독립의 조류가 일기 시작했고 그 목적은 중공이 대만을 ‘해방’시키려는 데 협력해 내부의 중화민국 대만정권을 전복시키려는데 있었습니다. 무엇이 대만 독립이냐 하면, 즉 이것은 ‘사회주의 대만의 독립’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만 중앙연구원의 원장 리위안저(李遠哲)는 1996년, 1999년 두 차례의 담화를 발표할 때, “우리처럼 초기에 대만독립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과 가장 근접해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쉬신량(許信良)의 밀입국을 누가 주도한 것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공산당이 작은 군함 804으로 그를 해협 중간선까지 데려다 놓고, 그로 하여금 밀입국해 민주대사가 되게 한 것입니다. 70년대 해외에서 활동하던 대만독립 세력들은 모두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해외 대만독립운동의 주요 인물은 마르크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베이징에 가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단순하게 대만독립세력이 우리 동족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시 우리 동족이긴 하지만, 그들은 공산당이란 이 ‘마르크스-레닌 당족(黨族)’에 더 가까울 뿐입니다! 미국에 있는 수많은 제 연배의 대만독립운동 인사들은, 모두 스스로를 영광스런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고 자칭합니다. 오늘날, 공산당은 자기 꾀에 발등이 찍힌 것에 불과합니다. 공산당이 대만독립운동을 조직, 육성하여 대만독립운동 세력이 커졌고, 결국 ‘중국에서 독립’ 해 중국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공산당과 맞장구를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공산당이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대만독립에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평화적 통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전쟁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국대륙 사람들도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극단적인 대만독립운동 세력이 반공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중화민족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만독립운동의 진상입니다. 우리는 중국인, 중화민족의 자손, 중화의 자식으로서, 반드시 강경하게 공산당을 타도해야 하고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반민족 대만독립운동세력을 몰아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만의 대다수 사람들이 중공에 의한 전제정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뿐 아니라 동정심마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산당과 같은 대만독립운동세력을 용서할 수 없고, 공산당의 그런 반(反)민족문화전통을 계승하여 우리 민족을 부정하고 우리 민족을 비난하고 우리 중국 인민의 모든 애국적 언행을 부정하는 것을 절대 용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전심전력으로 중화민족의 자손이 되어야 하며, 어떤 형식으로든지 마르크스-레닌의 자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말들을 종합하여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반(反)민족역사, 반(反)민족발전, 반(反)민족단결을 도모하고, 국가통일을 저해하는 정당입니다.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역사에 대한 저의 천박한 이해와 인상에 비추어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반드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수많은 공화국 사람들처럼 믿음을 가지고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 두려움을 모르고 책임감 있는 공화국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린단] 시청자 여러분, <투시중국> 은 여기서 마칩니다. 다음 번에는 <‘구평 공산당 토론회 기록’> 편을 통해, 계속해서 여러분들에게 장톈량(章天亮) 선생과 허빈 선생이 펜실베니아 대학 ‘구평 공산당’토론회에서 발표한 강연을 소개하고, 신하오녠 선생을 포함한 위 세 분 전문가들이 청중들의 질문에 답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다음 회에도 시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까지 <투시중국>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투시중국 홈페이지 (中文, VIDEO):http://www.ntdtv.com/xtr/gb/aProgPage.jsp?prog=13 투시중국 이메일 :insidechina@ntdtv.com 中文:  http://www.dajiyuan.com/gb/5/3/25/n864321.htm 2005년 12월 23일 대기원시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http://www.epochtimes.co.kr/news/search.php?qrel=5&query1=epochtimes 관련기사: 해외 망명 학자들이 말하는 중국공산당 http://www.dailychina.co.kr/bbs/zboard.php?id=dang&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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