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 三國의 무대는 中國대륙이었다2
- 이 글은 월간 신동아 97년 2월호에서 발췌-
(앞에서 계속)
3. 기상전문가의 또다른 증명
재야사학자들중 21년동안 기상청에서 근무한 기상관측 전문가 정용석씨는 기상학적 자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을 폈다. 먼저 홍수와 가뭄에 관한 삼국시대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사기에는 신라 파사왕 29년에
"홍수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로 사실을 보내 정부의 양곡을 풀어 구제하였고..."
로 기록돼 있다. 파사왕 29년은 서기로 108년. 바로 이 해는 백제 기루왕 32년인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엉뚱하게도 백제에서는
"봄,여름에 가뭄이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는 끔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같은 계절에 둘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빠져 있는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신라쪽은 홍수때문이라고 하고 백제는 가뭄 때문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반도에 삼국이 있었다고 할 때, 신라지역인 경상도와 강원도는 홍수로 난리가 났고, 백제지역인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는 약 6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다는 뜻이다.
정용석씨는 이 기록은 한반도의 기상원칙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구의 자전원칙과 전향력으로 볼 때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 따라서 한반도에서 위와 같은 상황이 되려면 대륙에서 습기가 많고 규모가 큰 저기압이 황해를 건너오는 동안 도중에 바다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받아 일단 백제 땅을 껑충 뛰어 넘은 뒤 경상도와 강원도땅에 포화상태가 된 수분에너지를 뿌릴 때, 신라지역에서는 홍수가 발생한다.
그럴 경우 같은 시기 6개월동안의 긴 가뭄을 일으킨 큰 고기압덩어리는 한반도에 있을 자리가 없게 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적인 가뭄 현상을 일으키는 기단은 그 규모가 최소한 수백km에서 수천km의 반경을 유지하며 요지부동이거나 이동속도가 아주 느린 특성이 있다. 기상학 용어로는 "블로킹 기단"이라고 하는데, 강수현상을 일으키는 공기덩어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범위가 크고 넓다. 즉 백제뿐 아니라 홍수상황에 있는 신라와 고구려까지 가뭄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공기의 흐름으로 볼 때, 백제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나고 신라지역에서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면, 억지로나마 해석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정반대 현상은 기상학상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이 기록은 기록 자체가 잘못 됐거나, 아니면 삼국의 위치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삼국의 기후현상이 현 한반도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증거는 더 많이 나타난다.
" 신라 벌휴왕 9년(서기192년)여름 4월에 서울에 눈이 3자나 내렸다(삼국사기)."
" 신라 눌지왕 41년(서기457년)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삼국사기)."
" 백제 기루왕23년(서기99년)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삼국사기)."
먼저 여름 4월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력 5월6일 입하가 지난 때이다. 한반도의 신라지역은 대체로 12월하순을 전후해 첫 눈이 내리고 늦어도 3월 초순이며 눈이 그치는 곳이다. 또 지금의 경주는 3,4개월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 눈이 내릴 수 있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곳이다.
그런데, 벌휴왕9년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눈이 3자(76cm로 추정)나 내려 극심한 피해를 주었다면 보통의 기상이변이 아니다. 옛날 제왕들은 때아닌 계절에 눈이나 서리가 내리서 곡식을 해치는 일이 생기면 정사(政事)를 잘못 처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판결한 죄인을 다시 심사하거나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는 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사서에서도 기상이변을 비중있게 다루는 것이다.
문제는 신라에 기상이변이 발생했다면 홍수 때의 공기이동처럼 백제땅에도 더 많은 눈이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백제의 기상현상은 신라지역보다 대개 1개월이상 빨리 내리고 또한 경주보다는 늦게까지 내리게 된다. 그런데 백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아예 기록이 누락됐거나 실제로 신라와는 강역이 달라 백제에서는 발생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서리현상은 더욱 그렇다. 눈의 경우 간혹 한반도 백제에 많이 내리고 신라에 적게 내릴 수는 있어도 서리는 그렇지 않다. 대륙에서 찬 공기가 이동해 와 한반도에서 그 성질을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리는 신라 따로 백제 따로 구분해서 내리지 않는다. 특히 곡식을 해칠 정도로 무서운 서리는 더 그렇다.
따라서, 곡식을 망가뜨릴 정도의 서리가 백제 지역에 내렸다면 경상도와 강원도 산악 지방에 서리가 내리지 않을 확률은 없다. 그러나, 백제에 피해를 준 서리가 신라에는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신라에 피해를 준 서리는 백제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역시 삼국이 한반도에서 인접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4. 토함산은 화산(火山)인가?
"...신라 진평왕 31년(서기509년) 봄 3월에 모지악산의 땅이 탔다. 구덩이 너비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고, 10월15일 꺼졌다..."
" ...신라 무열왕 4년(서기657년) 가을 7월에 동악(東岳) 토함산의 땅이 타서 3년만에 꺼졌다..."
국내 사학자들은 모지악 산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했고, 토함산은 현재 그대로 경주에 있는 토함산으로 본다. 또, 토함산의 화산활동에 대해 일부 사학자는 천연가스의 폭발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들 화석연료가 생기는 층이 경주 일대에 있어야 하는데, 세계지질학계 보고에 의하면 한반도는 석탄이외에는 화석연료가 없는 지층이라고 한다.
만약 경주 토함산에서 천연가스가 3년 동안이나 뿜었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발 750m의 평범한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진 경주 토함산은 천연가스가 나올 수 있는 산도 아니고, 더더욱 화산폭발에 의한 휴화산도 아니다. 한반도 어느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토질과 석질의 산인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은 분명히 토함산이 화산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먼저 화산활동에는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지진이 따라 붙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열왕때 토함산이 불기둥을 뿜기 241년전인 실성왕15년(서기416년)에 "토함산이 무너져 샘물이 솟았고 물기둥의 높이가 3장이나 되었다는 기록과 186넌전인 자비왕 14년(서기471년)에는 신라의 서울 땅이 갈라져 동서남북 넓이가 20장이나 되는 대규모 강진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즉, 토함산은 화산활동을 하기 전에 전주곡으로 지진현상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토함산은 어디에 있을까? 정용석씨는 중국 "안휘성 소호시 합비"라는 곳에 함산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토함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화산으로 용암을 뿜어내는 활화산일 때는 토함산이 되지만, 요즘 말하는 휴화산일때는 토(吐)하지 않기 때문에 함산(含山) 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지형지리지인 중국지에 이하면 함산은 화산활동을 한적이 있는 휴화산이고, 그 인근의 합비 지역은 화산활동의 여파로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 자란다고 한다.
고대사(高代史)의 수수께끼들
비단 천체현상이나 기상학적 개념으로 보지 않아도 우리나라 고대사에는 여전히 수수께끼들이 많다. 중국의 사서에 고구려가 당나라에 낙타등을 선물했다는 기록이나, "일본서기"(원본22권)에 "백제가 낙타, 노새, 양을 보냈다."등의 기록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보는 한 있을 수 없는 현상들인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창원에 보관돼 있는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은 백제가 보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바둑판 측면에 열대지방에느 있음직한 낙타그림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후략)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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