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보고가 반도사람인가 ? >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장보고가 반도에서 활동한 흔적을 찾기어렵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는 너무나 민감하고 상당한 증빙을 요한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사안임에는 분명하나 어찌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무시하고 넘어갈수 있으리요
근거가 불충분함은 인정하나 장보고는 대륙신라의 사람이었음을 사서가 말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란 말인가 ?
어찌하였건 장보고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가들에게 약간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반도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그 역사가 중국역사가 되는 게 아니다, 우리땅(대륙신라)에서 활동하였던 자랑스런 우리선조였다는 것이다
< 장보고 관련 지명도 >
< 지명설명 >
무령 : 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되었던 곳
정해위 : 청해진 추정
법화원 : 정해위 북쪽에 장보고 관련 절인 법화원이 현존
진해 : 염장에게 피살당한 장소
사, 연수 : 절친한 친구였던 정연 살았던 곳
서주 : 장보고 관련 지명
무주 : 염장은 무주사람
장보고에 대한 기록
장보고(? ~ 841)에 대한 기록은 두목(杜牧)의 『번천집』과 『당서』에 있었고 『삼국사기』는 중국 기록을 인용했다.
1.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이 고려강역에는 없었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3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고보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다.(수서인용)"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
현재는 장보고(? ~ 841)의 기록을 고려땅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으나
김부식(1075 -1151) 은 『삼국사기』 김유신전에서 高麗땅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혹자는 김부식이 조사를 아니해서 그럴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장보고가 유명하였다면 소문이 없을 수가 없다.
장보고와 김부식의 사이 연대차이는 310년으로 이순신(1545∼1598)과 현재 우리와의 년대 차이(403년)보다 적다.
만약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이 없어서 일본에서 이순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
이로 미루어 보면 장보고가 반도에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은 그만두고 소문도 없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 반도에서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었다고 하였으니 『당서』東夷 강역내에 있었을 것이다.
반도에는 소문도 기록도 없어서 중국 기록을 인용했다 하였는데 중국 기록에는 어디에 있는가 ?
중국 기록에는 『당서』 신라 기록에 있고 두목의 『번천집』에 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같은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신라본기의 기록은 어떤 중국 기록을 인용하였을까 ?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영호징이 쓴 『신라국기』를 인용하였을 것이다.
『당서』에 있다는 것은 『당서』의 동이전을 포함한 『25사』의 동이강역을 벗어나서 장보고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3. 장보고 기록에 있는 지명은 중국에만 있다.
장보고와 관련된 기록에 있는 지명이 중국에는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무령은 덕안 서쪽에 있고,
서주는 항성 주류성 동쪽에 있고,
泗와 漣水는 동명 백마하 항서 덕안 동쪽에 있고,
진해는 덕안 동쪽에 있다.
武州와 발음이 같은 撫州는 무령 덕안 남쪽에 있으며,
완도는 산동성에 있는데 백제의 諸城 城陽의 동쪽에 있다.
4. 淸海鎭은 장보고 때 생긴 이름이 아니라 신라에서 제사 지내는 곳 중의하나.
우리가 청해진하면 장보고의 군사 주둔지로써만 살펴온게 사실이다.
또 문성왕 13년 2월 청해진을 파하고 그 곳 백성들을 碧骨郡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아주 청해진이 황무지로써 인식되어 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군사적인 것이었다면 신라에 있어서는 청해진은 사독제를 지내던 곳 중의 하나였으니 예사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사적인 것은 상쇠되어도 제사를 지내는 것조차 폐지하겠는가? 또 제사지내는 것을 폐지하였으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四瀆祭를 지내는 곳이 동쪽으로는 吐只河 남쪽으로는 黃山河, 서쪽으로는 웅천하, 북쪽으로는 한산하 그리고 俗離岳 推心 上助音居西 鳥西岳 北兄山城 淸海鎭에서 지냈다.]고 하여 청해진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정에서 지내는 제사의 풍습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던 청해진이 사독제를 지내던 곳이므로 신라의 본래 관경(영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百濟땅으로 추정되어온 지금의 완도가 제사를 지내는 신라의 신성한 곳이었을까 ?
만약 완도가 청해진이라면 군사적인 유적지 뿐만 아니라 제를 지낸 유적지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
5. 신라방은 반도신라에서 진출한 신라인의 진출지가 아니고 [25사]동이전에있는 사로신라를 숨기기위한 명칭
지금까지는 신라방은 반도에서 신라인이 진출하여 모여사는 거류지로 알려왔으나
동이전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삽입하고 古今지도에 맞추어 보면 사로신라가 중국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일식관측지와 5월이전 홍수기록과 일치하는 신라를 감추기위하여 반도에서 진출한 신라방으로 왜곡한것은 아닐까 ?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반도에서 진출한것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민족은 고조선 이전 九黎시대 부터 신라말까지 요의 동쪽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인것이다.
더이상 사로신라를 숨기고 황해 동쪽신라인의 활동으로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6. 전남 완도가 청해진이 아니라 산동성 완도(灣島)나 그 북쪽 靖海衛가 청해진일 가능성이 있다.
청해진을 '淸海今之莞島'라는 기록에서 전라남도 완도로 비정하여 왔는데 청해진의 기록과 일관성을 보이는 곳은 전남완도가 아니라 산동성 완도에 가깝다 할것이다.
그러나 완도보다는 동북쪽에 있는 청해위가 청해진에 가깝지 않은가 ?
靖海衛를 淸海鎭으로 볼수 있는 것은
첫째 衛 나 鎭은 군사적인 명칭이다
둘째 靖海衛 의 靖海가 淸海鎭의 淸海와 비슷하다.
셋째 정해위 북쪽에는 적산원의 흔적이 있고 자급자족을 할수 있는 전답이 있다고 한다.
넷째 정해위 서쪽에 百濟지명이 있다.
다섯째 정해위 서쪽에 고조선 九黎관계 지명이 있다
이로 미루어 산동성 완도 동북쪽에 있는 정해위가 전남 완도보다 청해진의 조건에 합당한 것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7. 『삼국사기』 잡지 地理에 今이란 어느때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 현존 필사본의 필사시대는 조선시대인가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단어의 시대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본기에는 유일하게 청해진에만 今이 표기되어 있으나 지리에는 今이란 단어가 기록된것을 볼수 있는것은 15세기 필사본이니 그 때를 나타내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많은 지명중에 유일하게 "淸海今之莞島"라는 기록이 있으니 필사시대로 의심을 할수도 있다.
( 주 : 中宗 壬申年刊本(世稱 正德本) )
현재를 나타내는 今이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고려시대인가 ?
『삼국사기』가 김부식시대에 편찬되었으니 이 시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
( 주 :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서기1145년) )
今이란 ? 『삼국사기』가 원본을 인용했으니 원본의 집필시대인가.?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참고한 사료가 집필될때 그 시대를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今이란 ? 唐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집필할때의 당시인가.?
당나라때 당나라 사람인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집필하였으니 그 시대의 今일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되어 있는데 당나라말기 인물인지 아니면 후당의 인물인지 알수 없으나 장보고 기록으로 보아 후당인물로 보이는데 이때의 今일수도 있다.
왜 유독 청해진만 今이라는 표현을 빌어 완도라고 표현 하였을까 ?
혹여 대륙신라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필한 것은 아닐까 ?
이또한 "삼국사" 정본이 발견될 수 있다면 쉽게 풀릴수 있는 부분 일진데 ~ ~
< 장보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
1.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의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대입하고 고지도 (송나라대의 우적도 )에 맞추어 본결과 현재의 중국에 동이의 나라 韓이 있고 駟盧, 斯盧, 伯濟가 있으니 바로 신라가 있다는 뜻이다
2. '당서' 동이전 위치배열도에 삽입한 것이 현대 중국지도에는 일치하지만 반도에는 백제 및 高句麗 패망때의 지명이 없다는 것이다.
3. 김부식의 高麗에는 '삼국사기'가 쓰여지기 이전에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도 소문도 없다고 한점
4.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당서' 및 杜牧의 '樊川集'에 있는것이 원본이라는점
< 결 론 >
왜는 7세기이전 양자강 이남에서 삼국과 같이 활동하였던 같은 동이족의 일부였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의 합작품으로 우리는 지금 지리적 개념에 혼돈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장보고 시절 왜구가 출몰하였다고 하는 바 그왜가 현재의 일본이 아니다는 것이다
당연히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가 지금의 대만으로 축출당하면서 잃어버린 왜국의 땅을 찾기위해 양자강 유역으로 다시진출할려고 하는 수복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대만으로 축출을 당하였으니 양자강 유역의 고토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
장보고를 더 이상 반도에서 산둥반도로 진출한 인물로 변경시키지 말고 우리민족의 활동 강역이 대륙임을 떳떳히 밝혀 위대한 동이민족의 후예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4 2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