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전 우리 선배들이 피흘려 싸웠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5월말 전북 순창군 회문산 일대에서 열린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라는 ‘빨치산’ 추모행사에서 통일연대의 모 간부가 한 발언이다. 300여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는 통일연대 한상렬 상임대표의장을 비롯해 전국연합, 범민련남측본부 간부들이 연사로 나섰다.
한 빨치산 출신자는 ‘사령부를 목숨으로 끝까지 수호하자’ ‘제국주의 양키군대를 한 놈도 남김없이 섬멸하자’ ‘미국과 이승만 괴뢰정부를 타도하자’는 등 빨치산 시절의 구호를 제창했고, ‘해방 60돌, 당 창건 60돌, 6·15 5돌을 맞아 통일을 달성하자’는 등 북한의 조선노동당 창건 60년 기념구호도 외쳤다.
미국의 개입으로 북한 주도의 통일이 좌절된 것이 역사의 불행이라고 한탄해 우리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강정구 교수는 이들에 비하면 차라리 온건한 편이다.
‘통일’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북한 주도의 통일을 공공연하게 염원하는 통일연대는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라는 긴 명칭으로 2001년 3월 결성됐다.
통일연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 단체의 성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시작화면에 “부시 체포하러 11월18일 부산으로 모입시다”라는 구호가 보이고, ‘아펙반대국민행동’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 등 각종 반미(反美) 투쟁기구의 홈페이지가 링크돼 있다.
통일연대는 친북운동권단체들의 총본산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에 민노당,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민주노총 등의 노동계와 친일(親日)인사 명단발표를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조국통일범민주연합(범민련) 등 40여 개 단체가 가세해 만든 연대기구다.
전주고백교회의 한상렬 목사가 상임대표의장을 맡고 있으며, 전국연합의 오종렬 상임의장, 민노당 김혜경 전 대표, 민주노총 이수호 전 대표 등이 상임대표다. 상임집행위원장은 한충목 전국연합 집행위원장이 겸임하고 있다.
통일연대는 다른 진보적인 시민단체나 연대기구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극명한 차이가 드러나는 사안이 바로 북한 인권 문제다.
진보를 자처하는 상당수 시민단체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통일연대는 오히려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세력을 향해 신랄한 공격을 퍼붓는다.
“북한에 인권 문제 없다”
지난해 6월 한상렬 대표를 비롯한 통일연대 소속회원 30여 명은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인터넷라디오방송국 ‘자유북한방송국(FNK)’을 찾아가 방송 중단을 요구하면서 방송 운영자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당시 통일연대측은 FNK의 탈북자들을 향해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라며 “통일조국이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서 북측을 비방하는 따위의 방송은 설 자리가 없다”고 비난했다.
또 올 2월에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주최한 ‘북한인권 난민국제회의’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7월에는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미국 워싱턴에서 주최한 ‘북한인권국제회의’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미 대사관 근처에서 했다.
최근에는 유럽연합(EU)이 대북인권결의안을 유엔에 상정하자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이 성명에 따르면 통일연대는 “‘영아살해’ ‘강제유산’ ‘고문’ ‘정치범 수용소’ 등 북한 인권침해의 근거들은 이른바 기획탈북자의 과장된 증언과 확인되지 않은 선정적 사실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정권의 인권침해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단체는 7000여 명에 달하는 한국 내 탈북자와 수만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내 탈북자의 일관되고 구체적인 증언과 영상 등 북한 내 인권 상황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믿을 수 없는 왜곡’이라고 반박한다. 결국 세 차례에 걸친 유엔인권위의 북한인권결의를 주도한 EU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얘기다.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경기 때 북한에서 온 여성 응원단이 남북정상회담 사진이 담긴 현수막이 비에 젖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차에서 뛰어내려 현수막을 걷어 행진하는 소동을 벌인 적이 있다. 이 여성의 행동이 진심에서든 아니든, 모든 인민이 수령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인권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을까.
지금은 중단된 신포 경수로 현장에선 남한 직원이 김정일의 사진이 실린 노동신문을 무심코 깔고 앉았다는 이유로 공사가 중단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이 남한 사람에게 이럴 정도면 과연 자국민은 얼마나 혹독하게 통제하며 노예화하고 있을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통일연대는 ‘북한에 인권 문제는 없다’는 자세로 일관해왔다. 통일연대는 이번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제출을 EU가 주도했음에도 “미국, 영국, 일본이 유엔 총회 상정을 주도하고 있다”며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미국의 음모로 몰아가는 형국이다.
‘미군 강점 60년 청산’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 대남선전기구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이 이름을 바꾼 반제민족민주전선(반민전) 기관지 ‘구국전선’ 신년사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강조했다.
그런데 친북운동단체들이 올해 반미운동의 일환으로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강정구 교수는 모 인터넷사이트에 이를 옹호하는 내용의 칼럼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를 써서 파문이 일었다.
통일연대도 지난 8·15를 전후해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8·15 광복과 더불어 미군은 원초적으로 우리에게 불행을 강요했고, 그 대표적인 상징물이 바로 맥아더 동상이라는 역사인식에 따른 결과다. 근래 반미정서가 높아졌음에도 일반 국민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시도이며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좌경모험주의’에 가깝다.
북한의 경제 파탄과 극도의 정치 통제가 널리 알려진 지금, 6·25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미군의 개입이 역사의 불행이었다고 하는 주장이 공감을 얻을 리 없다. 맥아더 동상철거운동을 벌이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통일연대의 활동방향은 이 연대기구의 핵심단체인 전국연합이 지난 8월 중앙위원회에서 결의한 내용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결의내용 중 일부다.
‘치욕의 미군 강점 60년을 더는 연장할 수 없다는 민족적 결의로 9·11 미군 강점 60년 청산을 위한 인천투쟁(맥아더 동상철거)에 총력 결집할 것을 특별히 결의한다. 우리는 5·15 광주투쟁, 7·10 평택투쟁, 8·15대회를 거치며 승리해온 반미자주화투쟁이 9·11 인천투쟁에서 더욱 상승 발전해 11월 부산 아펙투쟁과 12월 2차 평택투쟁으로 폭발하도록 총력을 다할 것이다.’
이후 통일연대는 9월11일 인천에서 벌어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집회를 앞두고 ‘맥아더는 주한미군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상징’이라고 규정하고, 한총련 등과 함께 집회에 참여해 동상 철거에 반대하는 보수단체 회원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친북운동권인 전국연합, 범민련, 한총련이 북한 인권 논의를 원천봉쇄하고 미군철수와 한미군사동맹 해체를 목표로 한 반미운동을 벌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통일연대는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민변이나 노동계가 참여한 연대기구다. 그런데도 통일연대가 사실상 전국연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외곽 투쟁기구 노릇을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그동안 북한과 거리를 두던 노동계와 시민운동 단체들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세(大勢)를 의식해 친북운동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단체가 민노총과 민노당이다.
이런 흐름은 주사파 최대의 지하조직 ‘민족민주혁명당’이 수사기관에 의해 그 존재가 밝혀지자, 그중 일부 세력이 조직적으로 민노당에 가입하면서 나타난 변화로 보인다.
지난 2월 민노당 중앙위원회는 북한 핵무기 보유선언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밝히려는 결의를 시도하다 실패한 바 있다. 민노당 내부에 주사파 계열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또 최근 10·26 재보궐선거 패배로 인한 지도부 교체 이후 친북편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기존의 전국연합, 한총련 등에 국한됐던 반미친북 운동에 노동계와 시민운동 단체가 가세하면서 그 세가 커졌고, 그것이 통일연대라는 이름으로 조직된 것이다. 이후 반미친북 활동의 대부분이 통일연대의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통일연대의 실질적 활동은 전국연합과 범민련 회원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40여 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지만 대부분 이름만 걸고 있을 뿐, 전국연합과 범민련측에서 집행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통상 연대기구는 초기에 여러 단체가 모이지만 집행부를 주도하는 단체나 인사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데, 통일연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자신이 가입한 연대기구가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나 행동을 하면 문제 제기를 하고 그래도 시정되지 않으면 탈퇴하는 게 상식이지만, ‘의견차이’니 ‘분열’이니 하는 구설이 꺼림칙해 대충 넘어가는 것이 어느샌가 습관처럼 돼버렸다.
진보단체들이 내부에서 벌어지는 비민주성과 전횡을 오랜 기간 온정주의로 대하면서 비판능력을 상실하고, 이런 치부를 건드리는 것을 오히려 내부의 단합을 해치는 이적행위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무슨 사안이 터지면 마치 자판기에서 커피가 나오듯이 연대투쟁기구들이 만들어지고, 이 기구는 참여한 단체들의 공유된 의사를 대변하기보다는 소수 주도세력의 기획대로 선명성만 추구하는 전철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친북운동권은 이런 담합 분위기를 악용해 폭넓은 연대기구를 만들어 세(勢)를 과시하면서 자신들의 뜻대로 주도하고 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5 2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