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로 날아간 쓸모있는 바보들
독재자의 방패막이로 나선 어이없는 바보들
원정비 2억4천만원, 24만 북한 가정에 쌀 3kg씩 줄 수 있는 돈
[ 최홍재 / 2006-03-22 09:56 ] 조회 : 275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서방의 진보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우유부단하고 미련한 지식인들은 적어도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의 역할을 할 것이다." 레닌이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대로 3월 20일 브뤼셀로 출발한 80여 명은 김정일에게 ‘쓸모있는 바보들’의 역할을 하게 될까?
결과적으로 그들은 김정일씨에게 어이없는 바보들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북한동포들을 비롯해서 보편적 인권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쓸모있는 바보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 갈 것이다. 이는 브뤼셀로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확실해졌다.
위조지폐, 마약, 외국인 납치 문제, 공개총살, 영유아 살해, 강제 낙태, 불법 구금과 고문, 강제노동, 테러 등 이런 인권문제들은 김정일씨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약점에 속한다. 핵문제가 나오면 국가주권 운운하며 큰 소리를 치는 김정일씨도 이 문제는 가급적 피해가려 한다. 겨우 내미는 이야기가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고, 증거를 하나씩 내 놓으면 말꼬리를 흐리기 일쑤이다. 그건 ‘김정일동지가 모르는 일이고, 아랫것들이 영웅망동주의로 저지른 일’이라고 둘러댄다. 경칩도 안 된 개구리가 웃다 배 터질 일이다.
나의 장점에 기초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은 싸움에서 첫 번째 원칙이다. 김정일씨는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해서, 가급적 인권문제에서 전선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하면서 쟁점을 주권론이나 공멸론으로 만들고자 무진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 김정일씨의 가련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세력이 있으니 이름하여 ‘한반도 평화원정대’이다. 곽대중기자(DailyNK)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2명의 대표단이 브뤼셀에 다녀오면 한국에서 그저 단신으로 끝날 소식을 대규모 이벤트로’ 만들어 놓았다. 80명이 넘는 원정시위대가 브뤼셀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초미의 관심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새롭고 자극적인 소식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언론에 기가 막힌 취재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이러니 김정일에게는 ‘어이없는 바보짓’을 한 것으로 되고, 북한동포들과 북한인권개선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특하게도 ‘쓸모있는 바보짓’을 충실하게 하게 되었다. 이같이 기특한 역할은 비단 한국에서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은 한국이나 미국보다 더하다. 이미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애시당초에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사태가 북한을 덮쳤을 때 온갖 정성을 들여 북한동포를 도와 왔던 ‘국경없는 의사회’나 ‘OXFAM'(영국), ’기아추방행동 ACF'(프랑스) 등은 김정일씨의 극심한 방해에 분노하여 규탄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단체는 우파나 좌파단체도 아니며 모든 인민들의 벗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2000년 2월 2일자 리베라시옹에서는 국제인권협회가 ‘북한에 대한 침묵을 깨자’며 각국 정상의 참여를 호소해 나섰다. 리베라시옹은 좌파의 길을 걸었던 싸르트르가 창간한 신문이다. 그리고 2000년 5월 17일에는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기관지인 ‘뤼마니떼’에 김정일씨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한마디로 유럽에서 북한 인권문제는 끝난 이야기이다. 그것도 이미 1999년, 2000년에 마무리된 사안인 것이다. 유엔총회에 북한 인권문제를 상정하기 전 유럽연합이 줄기차게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온데는 그만한 사연과 축적된 동의가 존재했었다.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북한인권문제가 논란거리로 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일 뿐이다.
희대의 인권탄압에 대해 인간방패로 나서는 모습이 유럽의 지성인들과 유럽의 인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가끔씩 출몰하는 스킨헤드나 책속에서 혁명을 하려는 스탈린주의자 정도로 여겨지지 않을까? 평화원정대의 동료라는 브뤼셀 노동당은 스킨헤드 보다 영향력이 없다.
어쨌든 원정대의 일거수 일투족은 만화처럼 희화화되어 북한인권문제를 확대시킬 것이니. 그 또한 쓸모가 많지 않겠는가. 김정일씨 입장에서는 ‘억’소리도 못할 정도로 어이없는 짓이겠지만 말이다.
그들의 행동자체도 오래되고 식상한 만화이겠지만 그들의 구호자체는 완전히 블랙코미디일 것이다. 유럽의회에서 탈북자들의 피해 사례를 듣는데 느닷없이 왠 반미구호인가? 통일연대 싸이트에 떠 있는 팝업에 보면 “인권을 패권정책의 도구로 활용하는 미국을 반대한다”는 구호가 적혀 있다. ‘가자 브뤼셀로, 반미하러’ 이런 구호를 해석해야 하는 유럽연합 인민들은 참 난해하겠다.
인권문제는 유럽인들이 먼저 제기했고,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엄청난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앞에서 ‘당신들은 미제의 앞잡이’라고 떠드는 격이니, 저러다 사고나 나지 않을까 싶다. 하기야 모든 세상문제를 ‘반미’라는 깔대기로 모아내니, 원정대에 항의하는 유럽의 인민들마저 미제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로 치부하면 편하기는 할 것이다. 맑스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한다"고 했다. 맑스가 봐도 참 희한 유령이겠다. 야구로 국위 선양 해 놓으니, 별 이상한 짓으로 나라 망신을 시키는구만...
아무튼 한국이나, 유럽에서 그들은 톡톡히 한 몫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나라에 좀 망신살이 들더라도 그들의 브뤼셀 행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잘 갔다. 혁혁한 공을 세울 것이다. 그런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바로 돈이다. 5박 6일의 유럽행이니 비행기 삯만 2백만원이 넘고, 아껴써도 1인당 3백만원은 될 터인데 80명이 갔으니, 2억 4천만원이다.
2억 4천만원... 24만불! 필자가 통일연대의 핵심조직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서 활동하던 1996년 이 해에는 북한동포운동을 처음으로 전개했다. 동포돕기운동 첫 해 1억 모금액을 세웠고 다음해에 10억의 모금액을 목표로 세웠다. 다들 꿈같은 계획이라고 했다. 그때에는 그게 불가능에 가까운 돈이었다. 우선 상근활동가들부터 내기 시작했다. 아내와 같이 월 20만원의 활동비를 받던 필자는 첫 해에는 1만원을 냈고, 다음해에는 10만원을 냈다. 대학마다 모금함을 설치하고, 거리에 나가 모금활동도 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피땀 흘려 모은 돈이 1억이었다. 얼마나 감격이었는지...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브뤼셀에 간다니 2억 4천만원이 순식간에 모였다. 상근활동가들이 부자가 된 것일까? 아니면 어찌된 것일까? 부자가 되었다면 한국경제가 발전한 덕이겠고, 아니라면 어디선가 몫돈이 들어왔겠지. 정작 가슴아픈 것은 그 돈이 필요한 곳은 여행사나 항공사보다 북한 동포들일 것이라는 사실의 자각이다.
1달러를 가지면 최근 기준으로 북한 돈 3천원 가량을 살 수 있다. 3천원이면, 노동자 평균 임금에서 천원 모자란다. 이 1달러면 쌀 3킬로그램을 살 수 있다. 24만 달러면 얼마나 많은 동포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을 것인가!
24만 가정에 쌀 3킬로를 선물할 수 있는 돈을 가지고 독재자의 방패막이로 나섰다. 쓸모있는 바보들, 어이없는 바보들, 그대들의 행동을 필자는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김정일씨도 그대들의 행동을 참기 힘들 것이니, 이처럼 완벽한 고립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