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본이 대만을 중국에 반환하였으므로, 그 귀속문제는 해결된 것 같았다. 그러나 공산당에게 국토를 통째로 내어준 장개석[蔣介石]의 국민정부가 1949년 12월 대만으로 옮기고, 거기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존속을 주장함으로써 사태가 달라졌다. 그러나 1950년 1월 미국대통령 H.S.트루먼이 불간섭을 선언하였으므로, 그 무렵까지는 대만 문제가 아직 중국의 국내문제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 양국이 대만은 중국의 어느 정권에도 넘기지 않고 대일강화회의에서 그 귀속을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특히, 한국에서 6 ·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고, 대통령 트루먼은 “대만의 지위는 안전의 회복, 대일강화조약, UN에 의한 검토 등을 기다려야 한다”고 성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만의 국민정부가 정통적인 중국정부라 하여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으므로, 중공은 이것을 영토에 대한 침략이며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게 되어 대만귀속문제는 큰 국제문제가 되었다.
1951년의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은 일본이 대만과 팽호[澎湖]제도를 포기한다는 것만 규정하고 그 귀속은 결정하지 않았고, 1952년 4월 일본과 대만의 중국정부가 맺은 중일평화조약(中日平和條約)도 대만의 귀속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1955년 8월 미국과 중공과의 대사급 회의에서 대만 문제가 중요 의제로 되었으나 토의는 진전되지 않았고, 1958년 대만해협 위기를 겪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대만의 중국정부가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라는 미국의 입장이 크게 달라져서, 미국 내에 두 개의 중국론, 하나의 중국론, 하나의 대만론 등이 나왔다. 1970년대에는 정세가 더욱 크게 달라졌다. 캐나다 ·이태리 등 중공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가 많아지고, 1971년 10월 중공의 UN가입과 중국정부의 UN탈퇴 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2월 중공을 방문한 미국대통령 닉슨은 대만이 중공의 영토라는 중공의 입장에 이의를 주장하지 않을 것과 대만에서 미군을 철수하는 것이 미국의 최종목표임을 인정하였다. 그해 9월 중공을 방문한 일본수상 다나카[田中]도 대만이 중공의 영토라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였고, 중일평화조약의 실효를 선언하였으므로,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국교를 끊었다. 이리하여 중국정부의 국제적 고립화가 진행되고, 대만문제는 대만의 중국정부와 북경의 중공당국이 상호간에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는 국제여론과 외적(外的) 조건이 성숙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