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일단은 오늘날 중국의 실질적으로 유일한 영역인 대만에 한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만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한족이라고 하며 그에 관한 중국의 기록문헌 《임해수토지(臨海水土志)》는 3세기 중엽의 것이다. 7세기 초 수(隋) 때부터 한족이 대만의 정찰정략(偵察征略)을 시도했다고 한다. 원(元)은 1360년 팽호도에 처음으로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명대(明代)에 이르자 한족의 도래가 증가하고 동시에 서구의 열강도 대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mosa)라고 명명하였다. 네덜란드는 대만 남부의 한족을 누르고, 일찍이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제란디아성(城)을 구축하였다. 스페인 또한 1626년 기륭[基隆] 지방의 사료도[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담수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성을 각각 축조하고 대만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델란드는 1642년에 스페인을 구축(驅逐)하고 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661년 명의 유신 정성공(鄭成功)이 부하를 이끌고 대남[臺南]에 상륙하여 제란디아성을 점령해서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이곳을 항청복명(抗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1683년 6월 청(淸)은 대만에 진격하여 정군(鄭軍)을 무조건 항복시켰으므로 정(鄭)의 대만 지배는 불과 3대, 23년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대만을 복건성에 예속시키고 대남에 대만부(府)를 설치하였다.
그후 대륙으로부터의 이민이 격증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신천지를 개척하고 1885년 대만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다.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1895]에 의하여 대만은 213년간 계속되었던 청나라의 통치를 벗어나 일본 최초의 해외 식민지가 되었다. 그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에 복귀할 때까지 대만은 51년간 일본치하에 놓여 있었으며, 1949년에는 공산 반란군에게 밀려 국토의 대부분을 빼앗긴 중국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와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 및 여야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화와 자유화를 이룩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변화 "이등휘 총통"
타이베이시[臺北市] 북쪽 교외에서 출생. 일본 통치하에서 타이베이고교를 마치고, 일본 교토[京都]대학에 입학, 일본 패망 후에는 대만[臺灣]대학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이어 미국의 아이오와주립대학에 유학, 1968년 코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20년 간 중화민국 국립대만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농촌개혁에 공헌하였다. 그 수완을 장경국[蔣經國]이 인정하여 1978년 타이베이시장, 1981년 대만성(省) 주석(主席)이 되고, 1984년 부총통에 취임하였다. 이어 1988년 1월 장경국이 죽자, 대만 출신 최초의 총통이 되었으며, 그해 7월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중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힘쓴 학자 정치가로서 명성이 높다.
[陳水扁(진수편), 1951. 2. 18~]
대만성 대남현 [臺南縣]에서 출생했다. 일용잡부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대남현 마두[麻豆]의 증문[曾文]중학교를 나와 1969년 중화민국 국립대만대학 상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시 타이베이[臺北] 시의원이었던 황신개[黃信介]가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비판하는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전공을 법학으로 바꿨다. 법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최우수 성적으로 법률고시에 합격했다.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던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79년 선동 혐의로 군법재판정에 선 황신개의 변론을 맡으면서부터였다.
1981년 타이베이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85년 고향인 남부 대남에서 출마한 선거에서는 낙선했다.
1986년에는 반체제 잡지인 《자유시대》의 편집에 참여한 혐의로 투옥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87년에는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약칭 민진당)에 입당하였는데, 지속적인 민주화을 바탕으로 당 중앙상임위원회 위원ㆍ정당협상위원회 주임위원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입법의원을 지낸 다음 1994년 실시된 타이베이 시장선거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민진당의 차기 총통 후보로 떠올랐다.
타이베이 시장 재직시 퇴폐이발소와 매춘 등 8대 업종을 일소하는 등의 과감한 행정을 펼쳐 일부 부패 계층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하여 1998년 실시된 시장 선거에서는 이들의 방해로 재선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 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정치력 있는 유연한 정치인으로 거듭났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2000년 3월에 실시된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당의 이등휘[李登輝] 현직 총통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한국의 경남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러시아 경제학원에서 경제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