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朋友 (하오펑요우)
폭풍이 몰아치듯 밀려드는 미해결된 일들을 그럭저럭 처리하고 나니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
시간이 남는다는 것은 긴장을 풀어주며 나태한 하루를 즐길수 있는도 해주지만 게으름도 같이
찾아온다. 그렇지만 달콤한 게으름.
1999년 2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년전 상해에서 약 두시간 거리의 우시(無錫)시 신개발구
한국의 S건설에서 스웨덴 제약공장 건설공사를 수주하여 막 시공을 할 때였다.
공조설비부분의 현장소장직으로 부임하여 채 몇 달이 되지않을때 최선생을 만나게 된다.
한국업체가 중국내에서 일을 도모하고자 하면 가장먼저 찾는것이 커뮤니케이션에 꼭 필요한 통역이다.
이미 97년 부터 99년 1월까지 상하이에서 근무하였기에 통역의 중요성이 머리속에 꽉 차 있을때다.
당시 잘못된 통역에 의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기에 이번엔 통역을 찾는 일에 온정신을 쏟을 정도로
기합이 들어 있었다.
일반 생활의 통역이야 교포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전문어통역은 정말 쉽지가 않다.
특히 한국인들의 일상언어에도 수많은 외래어가 썪여있어 한국어 자체를 교포가 이해 못하는것도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몇차례 면접을 보며 차츰 실망감을 쌓여가고 있을때 최선생이란 사람을 소개받았다.
때마침 중국업체와 미팅이 있어 최선생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다.조건은 있는 그대로 통역해 달란 것이였다.
말이란 것이 한마디만 더 들어가도 그 내용이 바뀌어 지는 것이니 이러한 문제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중국경험 2년이 되어가기에 말을 뿜어내지는 못하지만 듣는것은 어느정도 귀가 터여 있을때다.
회의가 진행될 수록 통역이 참 통쾌하고 시원시원하였다.두말할 것도 없이 더 이상 다른 통역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이렇게 최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최선생은 다리가 불편하다.길림에서 대학시절 알아주던 축구선수였으며 교사출신이지만 팔에는 忍이라는
문신이 있다.한창 축구로 줏가를 높이며 희망찬 미래만 있을때 허리를 다쳤던것이다.
한국의 의료기술이라면 아무 일없이 치료가 가능한 부분이었는데 낙후된 의사의 실력으로 신경을
잘못잘라 그만 한쪽다리가 일부 마비된것이다.그러면서 생긴 염증으로 관절부의 연골을 잘라내었던것이다.
이후는 방황의 시작이며 내부의 분노를 밖으로 뿜으며 싸움질..음주등으로 젊은시절을 한동안 소모했다.
적지않은 시간이 흐른후 내조의 힘으로 다시 마음을 잡고 참으며 살자는 뜻으로 문신을 새겨넣은것이다.
스웨덴 클라이언트 (業主)일본 감리등 까다롭기 짝이없는 프로젝트를 무사히 잘 마치고 귀국을 하며 우리는
한번의 이별을 하게된다.
그후 상하이에 주재한 국가기관의 신축공사를 시작하며 또다시 예전의 멤버로 모였다.그때가 2002년이었다.
그리고 지금 베이징의 국가기관 신축공사에 같이 근무를 하고있다.
그는 이제는 통역이 아니며 고급 관리자다.업체를 관리하고 시공을 관리하는 하나의 독립된 관리자가
된것이다.
7년의 세월동안 그는 우리와 같이 움직였으며 지금도 같이 하고있다.
통역과 상사의 만남에서 이제는 관리자와 관리자의 관계로 변했다.
가끔은 이런생각을 해본다.여러 통로를 통해 한국으로 가서 7년동안 일을하고 돌아온 다른 교포와 비교가
된다.한쪽은 작지않은 재산을 만들어 금의환향을 하고 한쪽은 인간관계를 돈독히한 세월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최선생은 기회비용의 손실이 얼마나 될까? 억울하지 않으냐고 우문하며 미소로 현답한다.
같은 한국인을 상대로 오랜세월을 보내왔는데 한쪽은 나머지 생을 만족시킬 결과를 얻었고 한쪽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30대 초의 새파란 모습으로 나타나 이제는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있는 그를 볼때마다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최선생으로 불렀으며 지금도 그대로 최선생인 그…
게으른 일상을 즐기며 또하나의 계획을 그려본다.그에게 독립된 하나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것..이것이
귀국전에 7년의 세월을 같이 보내고 몇 년을 더 같이 지낼 친구에게 줄 수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것이다.
규모를 떠나서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그런회사…
술과 친구는 오래될 수록 좋다.마음에 각인되는 좋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