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그 소중한 이름(2) |
결혼식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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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이별을 한 후 남자는 싱윈에게 계속 연락을 하며 하루라도 빨리 중국으로 나올수 있도록 |
해달라며 애원 반 공갈반식으로 독촉을 한다. |
2003년 말 싱윈은 싱윈나름대로 참 어려운 시기였다.가족과 떨어진 시간도 길었으며 |
계속 이대로 가족과 헤어져 있다가는 큰일이 날 것같은 두려움에 하루하루가 살얼음 걷는 |
심정의 나날이었었다.특히 커가는 아이들 교육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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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변종 한국인에게 어처구니 없는 사기를 당하고 상해를 뜰 수도 북경으로 |
옮김도 어려운 사정이었다.(이 사기사건은 가족 연재후 올릴예정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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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하면 통한다고…남자에게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왔다.싱윈의 일을 기다리다 지친 남자에게 |
엘쥐가 남경에 대단위의 단지를 건설하면서 많은 한국인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정보가 |
나오고 그 몇날이 지나지않아 엘쥐의 협력업체의 일원으로 남자는 다시 중국에 나올수있었다. |
(남자의 직업은 CAD,공무 및 관리업무…싱윈이 점수주면 A..삼송에서 몇번이나 군침흘릴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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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쥐가 남경에 투자한 액수는 천문학적이며 그 규모가 너무커서 싱윈이 보았을땐 입이 떡 |
벌어질 정도였다.엄청난 투자에 기분 좋아진 남경시에서는 이곳 진입도로 이름을 엘쥐로 라고 |
불렀다.이곳에 입주한 엘쥐화학,엘쥐필립스,엘쥐LCD등은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줄것이다. |
지역경제 발전 및 고용증대등..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있다. |
하지만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들이 부메랑효과로 한국제품에 누를 끼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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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중국에 나온 때가 2004년 2월이었으니 그들의 헤어짐이 있고난 후 약4개월이 지난 시기였다. |
그동안 그들이 통화한 내용의 명세표를 빼보면 그 길이가 지구에서 달나라 갈 정도였다고 |
뻥들을 친다.닭살 스럽다.ㅡ.ㅡ; |
그렇지만 만남의 기쁨을 나누기엔 서로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여자는 중국으로 오는즉시 북경에 |
자리잡은 한국 모벨트회사에 취직을 한 것이다.여자는 북경에 있고 남자는 남경에 있는 꼴이다. |
여자의 유창한 한국말 구사와 세무관련 전문업무는 모벨트회사 법인장을 홀딱 반하게 하였다. |
적지않은 급여에 주5일근무등 좋은조건으로 취직을 한 것을 보니 똑똑하긴 똑똑했던 모양이다. |
하루 빨리 같이 있고 싶기만 한 이들이지만 남자의 사정상 한달에 한번 만나는 것도 감지덕지하며 |
감사했던 시간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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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싱윈도 북경 모지역에 2008년까지 근무하게 될 자리를 잡았다.2004년 5월 싱윈은 |
북경에 부임하자마자 남자를 싱윈의 테두리로 불렀다.그렇게 다시 예전의 팀들을 만들고 나니 |
이제 남은것은 그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일 뿐이었다. |
(싱윈도 이때 전가족을 북경의 왕징으로 불러 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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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아버지는 노발대발 반대가 극심했다.금지옥엽으로 키운 단 하나뿐이 딸이 한국에 유학 |
간다고 해서 불안해도 보내주었더니만…공부는 않고 왠 한국남자에게 빠져 결혼하겠다고 하니 |
아버지 입장에서는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후에 말했다. |
개방이 되고 상호 왕래가 많다고 해도 자신은 아직도 엄연한 공산당원이고 나라와 이념이 틀린 |
한국의 한 사내에게 딸을 빼앗겼다가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과 관계가 멀어지면 어찌될지 |
안봐도 뻔한 사태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일수 밖에 없었다고한다. |
하지만 어느 어머니라서 딸에게 이기려고 하겠는가? 어머니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딸이 원하는 |
대로 해주기만 바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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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남자의 집에서는 약간의 근심은 있었지만 반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 |
1남2녀중 막내이며 독자인 아들이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것에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이였다고했다. |
남자의 매형(큰누나의 남편)은 쓸데없이 중국을 다니며 사업한다고 집안 거들내고 바람피다 |
걸려서 이혼당한 중국에 관련된 아픈 사연이 있는 집안이었지만 그래도 아들결혼은 대견하기만 |
하고 다큰 아들이 고맙게 생각될뿐이었다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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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여자의 집을 찾았을때 남자앞에는 수많은 그녀의 친척들이 그를 보려고 전날부터 |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한다.반대를 한다해도 집안에 손님이 찾으면 성심성의 대접을 하는것이 |
이들에게는 최고의 덕목이였다.(이 부분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별 차이가 없다.) |
이러한 여러 문제등 우여곡절끝에 남자와 여자는 2004년 4월 혼인신고를 하게된다. |
중국에서의 혼인신고를 마친후 2004년 5월 한국에서의 혼인신고마저 끝내고 결혼식날짜를 |
2004년 9월로 잡고 한국의 한 예식장에 예약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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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의 영사관에 여자와 여자 부모의 초청비자를 신청하였는데…이곳 심양영사관은 참으로 |
말썽이 많은 곳이다.비자남발 및 비리로 인해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을 지경인 이곳에 |
비자신청을 하고나니 11월 인터뷰 예정이 된다.(하도 말이많아 인터넷으로 접수를 한다.) |
결혼식은 9월인데 비자인터뷰가 11월이라니…문제가 심각했다.이미 예식장과 친지들에게 |
청첩장을 다 돌린상태인데 신랑신부없는 결혼식을 하게 생긴것이다. |
어쩔수없이 싱윈의 모든 채널을 동원하여 외교부쪽 연줄이 있는 분께 연락을 드렸다. |
이분은 싱윈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라 민감한 청탁 문제임에도 노력을 해 보겠노라고 하였다. |
(이부분은 지금도 싱윈은 감사를 드린다.) |
얼마의 시간이 흐른후 비자업무는 대사도 손될수없는 문제이니 누구도 청탁이 불가능하다란 |
허탈한 답변의 메일이 도착하였다.그래도 고마워서 의력신 두박스 보내드렸다 ㅡ.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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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엔 상부에 상책이 있으면 하부엔 대책이 있다한다.한국인이라고 못할소냐 하고 |
편법을 썼다.남자는 여자가 다니는 직장에 가서 사정얘기를 하고 결국 여자의 초청장을 발급 |
받았다.부모는 관광비자로 가게 되었는데 일인당 공탁금이 10만 위안이었다.엄청난 공탁금을 |
걸어야 관광을 갈수있다니…아직 중국은 중국인 모양이다. |
이러한 여러 고난 끝에 2005년 9월 그들은 그렇게도 원하는 하나가 되었다. |
그리고 북경 왕징근처 태양궁공원앞 새로지은 자그만 아파트에 새보금자리를 꾸민다. |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문제도 모르는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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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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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지요^^ 실화는 원래 재미없어요.다음편이 마지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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