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북녀들을 처음 만난건 몇 년전의 7월의 도문의 해관(세관)안이었다.
잠이 안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베란다에 서서 큰 길가에서 그 새벽에 빗자루로 넓은 길을 쓸고 있는 한족 여자 청소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난 이 분들을 보면서 많이 느끼곤 한다. 특히 혹독한 겨울에 이분들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말 없는 스승처럼 보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버스을 타고 종점을 가서 하루종일 둘러 보거나 아니면 기차을 타고 주변을 가곤했다.특히 두만강 강가을 가는 걸 좋아했다.전에 화룡에서 갔던
얘기을 먼저 시작 할까 한다.
화룡에서 버스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남아 시장 안으로 가서음식점에서 조선족 할머니가 파는 소탕을 먹고 있는데 음식파는 할머니가 나에게로 와서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조선에서 왔제" 하신다. 나는 밥 먹다가 "아니에요"
하니 할머니와 옆에서 음식을 파는 아줌마들까지 고개을 흔든다. 할머니에게 한국사람 같지 않냐고 물으니 한국사람들은 옷 입는거 부터 다르다고 하시면서 아무리 조선족이 옷을 잘 입어도 한국사람과 표가 난다고 하신다.
음식값을 치르고 버스을 타고 두만강가에 내가 내리자 버스을 기다리고 있던 한족과 조선족등 10 여명이 내 주위을 빙 둘러서서 나를 원숭이 보듯이 쳐다보는게 아닌가...뭐 눈에 뭐 밖에 안 보인다고 30 미터 건너가 위대한 조국 북조선이라 맨 북조선 사람들만 봐 왔는지... 별 희안한 꼴을 다 봤다.
그 중 한 조선족 할머니가 나에게로 와서 자기네 집에 가서 묵자고 한다.난 집 구경이나 할려고 따라 가서 보니 소학교에 다니는 손녀 아이와 할머니만 사는 집이였는데 현재 집 값이 5000원 정도고 소득이 별 없어서 고기가 싼 중국에서도 고기 먹기도 쉽지 않다고 하신다.
한참 얘기하다가 아니다 싶으셨는지 북조선 사람을 재워 주었다 잘못되면 벌금이 몇 천원이라고 하신다.난 할머니에게 자러 온 사람이 아니에요 하고 안심시키고 처음 본 꾀죄죄한 나그네을 하루 밤 재워 줄려는 마음씨가 고마워 할머니와 손녀에게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권했다. 그들은 구질구질한 사람에게 얻어 먹기가 미안해서인지 사양하면서 대신 자기 친척이 하는 음식점을 소개해 줬다.
그 집에서 저녁을 하고 근처에 10원짜리 한족 구둘 싱구루방 인숙이네 가니 아궁이에 장작 몇 개을 더 넣어준다.아침엔 두만강가에서 잡은 물고기탕을 숙소 가족과 같이 먹었는데 일품이었다.아침 일찍 강가로 나가면 자욱한 안개며 바로 지척에 위대한 조국 북조선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과 빨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폭의 수채화였다.
언제 기회가 다시 오면 이 곳에 다시 가서 한 달 정도 푹 쉬고 싶다.
전에 화룡에서 강가 갔었던 얘기는 대충 그렇고 오늘은 도문을 가는 날이다.
기차을 타고 도문으로 가는 길은 길도 좋고 또 다른 이유는 그 곳에 가면 위대한 조국에서 매일 버스가 도문 해관으로 왕복하는데 운전사와 안내양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고 그 곳에서 검은 썬글라스에 인상 험악하게 생긴 동상이 장사을 하고 있어서 이 친구도 볼 겸 해서 갔었는데 한 20차례는 갔던 것 같다.
한참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어제 늦어 못 쓴 수첩정리하고 테레비 좀 보다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겨울이면 입을 것고 많지만 여름이라 참 간단했다.
남대문 길가에서 산 어두운색의 5000원짜리 반바지와 2000원짜리 쓰레빠 그리고
이 곳 시장 밖에서 산 12원짜리 윗도리. 다 합쳐봐야 만원이 안된다.
지금도 그 반바지와 윗도리는 사용하는데 주위에서 제발 그 윗도리는 입지말란다.
전에 장춘에서 인천으로 오는 뱅기표을 잃어버려서 대련에서 배을 탈려고 했는데
이 차림으로 배을 못 탈뻔 한 적이 있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나보고 구석으로 가서 찌그러져 있으라 한다. 남들 다 수속 끝내고 짐들 다 싣고 자기들 끼리 의논을 한다. 절반이 보내야 한다고 다른 절반은 보내면 안된다 한다.구석에서 2시간 서있었다.
결국 보내자로 결정이 났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족말 한 마디만 했어도 배는 못 탔을거라 한다. 대련으로 올때 호텔 1층 카운터 여자가 대련까지 기차표만 사면 마중해 주겠다고 한다. 10시간 거리는 마중해 준적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한족여자는 24시간 거리을 마중해 보내겠다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기차 시간만 왕복 2일에
최소 왕복 3일을 보내야 하는데....이때도 왠 떡이냐 싶었다.
복장 얘기는 그렇고 아침 7시 반경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카운터 한족여자을 보니 미소로 답한다. 아침부터 가슴이 뛴다.
근처에 있는 시장에 가서 3원짜리 토장국으로 아침을 때운다. 5원짜리는 안에 돼지고기가 들어있다.난 단골로 가니 3원 짜리 시켜도 고기 두어개는 넣어준다.이것도 보름씩 대 놓고 먹으면 2원 50전씩이다. 이 아줌마와도 사연이 있다.
오래전에 이집에 가서 토장국을 먹고 돈을 냈는데 돈을 안 받는것이였다.여러번 줘도 안 받는 것이다. 이 아줌마가 위대한 조국에서 온 사람 밥 한끼 그냥 주는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중에 이 아줌마가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알고 배신당한 표정을 짓는것이 아닌가.
또 하나는 그 도시에 나의 영원한 스승이 2명이 있었는데 1년내내 같은 복장인데 보통 사람들이 거지라 불렀다.한국 일본 미국 거지들의 옷차림과 이 두명 스승의 복장을 비교하는 자체가 실례이다. 세나라의 거지들은 2명의 스승에 대해 미안함을 느껴야 하며 한마디로 짝퉁이다.
머리가 좀 벗겨지고 작은 한명의 스승이 내가 시장에서 밥을 거의 먹었을때 시장 안을 돌고 있어서 불러 옆에 앉히고 아줌마에게 이 스승의 토장국값을 주고서 밥 한끼 주라고 하고 나온적이 있다. 다음날 가니 이 아줌마가 날 반갑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스승 때문에 다른 손님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한다. 그 아줌마까지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아침을 하고 1원짜리 버스을 타고 역으로 갔다 . 아침 8시 40분 차을 타기 위해서다.
3원 50전 짜리 표을 사기위해 주머니에 있던 50원짜리을 냈는데 표파는 여자가
한자로 위폐라고 써서 돌려주는게 아닌가. 다른 돈을 내서 일단 표을 사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돈이 어디에서 받았는지 머리를 굴리니 답이 곧 나왔다.
어제 저녁에 호텔 카운터 한족여자와 그 여자친구와 근처에 양뀀집에 가서 48원치
양뀀과 맥주을 마시고 내가 미리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조선족 아줌마에게 100원을내고 52원을 받았는데 50원짜리가 위폐였던 것이었다.
내방에 전화가 있는데 이 전화는 받기만 하고 걸지는 못하는 것이었는데
이 카운터 여자가 무료로 중국 전역에 마음대로 하라고 그걸 연결시켜줘서 그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갔는데 처음으로 위폐을 받은 것이었다. 그 일 뒤로는 지폐 양쪽끝을 양손으로 쥐고 두번도 아니고 한번만 흔들어도 위폐는 구별할 수 있었다.
수업료을 얼마나 더 내야 하는지 가는 곳마다 공부시켜주고 있었다.
뚜껑 열린상태로 8시 40분 기차 창가에 앉아서 도문으로 향했다.
위폐는 저녁에 가서 해결하기로 하고 밖의 경치을 구경하면서 갔다.
창가로 보이는 허름한 집들.. 경치가 좋은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날 땐 갑자기 내리고 싶은충동도 느켰다.
도문이 기차역의 종점이라서 그런지 도착하기 전에 청소을 하는데
기차 한 칸을 빗자루을 쓸면서 오는데 해바라기 껍질등 쓰레기가 엄청 많다.
그걸 쓰레바끼에 담아서 그대로 창문 밖으로 버리는게 아닌가....
한편으론 지혜로운 삶이라고 까지 느껴졌다. 잠시 머물다 가는 한 세상인데....
나는 가끔 농담으로 중국이 참 좋다고 한다. 침도 마음대로 밷고 오줌도 아무데다
누어서 좋다고 한다. 침은 아무대나 밷는데 오줌은 꼭 구석에 가서 누는데 얼마 전에 위대한 스승의 행위을 보았다.
오후 5시경이었는데 술을 좀 마신 그 스승은 차가 많이 다니는 대로에 가서 짧은 다리을 보란듯이 꺼내서 볼 일을 보는게 아닌가.
어지간한 건 따라 하겠는데 이건 좀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무아의 경지를 말이 아닌 온 몸으로 보여 주신 그 스승에게 늦게나마 감사을 드린다.
창밖의 경치와 정판룡님이 쓰신 "고향 떠나 50년" 이라는 책을 보면서 가니 어느덧 도문에 도착했다. 이 책은 조선족을 이해하는데 최고의 책중에 하나라 생각한다.
역을 나와서 100 미터 정도 걸어나와 1원짜리 자전거을 잡았다.택시는 3원인데 값도 싸고 주변을 천천히 보면서 갈 수 있어서 자전거을 주로 이용했다.
15분 정도 가서 도문대교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