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펙에 참가하는 후진타오를 따라 줄줄이 굴비 엮은 듯 300여명 가까운 기업인들이 왔었습니다만 그 중 공상국과 능예부에 아는 친구들과 예닐곱의 안면있는 왕서방들 데불고 몇군데 참관 시키고 관광하는데 도우미 역할 하고 우리 공장 견학후 지난 일요일을 마지막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먼저 얼마전 써놓은 글에 대한 해명을 하자면 일본어를 퍼온 곳은 일,중 사이트 인데 내 노트북에 즐겨찾기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다음번에 사이트 주소를 올려 놓도록하고 퍼온 글 내용은 상해-북경간 고속열차와 10월에 준공한 대만의 타이베이-가오슝칸 신간센과 관련된 토론중에 나온 내용입니다. 대만의 일본에 대한 경제 예속에 대해 설명을 한다는게 우스운 글이 되버렸군요^^; 아울러 길똥이란 분이 어느분인지 나는 모릅니다. 오해 없기!
언젠가 중국 친구를 데리고 경복궁을 갔는데 근정전을 보고 하는 말이 자기네 황궁 화장실 싸이즈라 말하더군요. 한족들에 대해 대륙적 기질기질 하는데 지피지기면 이런 멘트에 대해서 눈하나 깜짝 안합니다.그렇게 말한 산동성 간부녀석 손목을 끌고 근정전 내부를 보여 줬습니다.그리고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우아한 단청의 아름다움에 일장 설명을 했습니다. 그들에겐 단청이나 목조건축중 쓸만한게 남아 있는게 드물기 때문에 한족들 기 죽이는데는 그만이지요. 텐안먼이나 이화원이 아무리웅장하고 넓다 할지라도 우리 고궁의 아름다움에 비할 순 없습니다.
어느분이 날더러 친중파라 명명하셨는데 120%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한족들을 혐오합니다. 그러나 저들 앞에서 절대 그런 모습 보이지 않습니다.
산동의 무식한 음주문화를 섭렵하면서 싫다는 표정 하지 않았습니다.
둥베이의 독한 백알이 목젖을 태워버릴듯 했지만 인상 찌푸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물건을 팔아 먹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며 그들로부터 원자재를 한푼이라도 더 싸게 사들여와서 부가가치를 더 많이 창출 해내야 하는 계산에 의한 행동일 뿐이였고 어린시절 외가에 갔을때 화장실을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을 중국 화장실을 보고 기업을 해야 했던 기억들은 어차피 동시대를 살아왔고 살아가는 내게는 이 사이트에 손가락질하는 중국의 시골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가 낮설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IT가 우리 수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일부 경공업제품의 기술집약도와 숙련도역시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격차는 5년정도 보고 있습니다만 한가지 아쉬움은 정리해고된 기술자들의 중국진출로 인한 기술유출이 생각보다 너무 심각성을 우리는 간과해버린다.
무엇 때문에 중국에서 구차하게 사냐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한국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 낮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살아가고 더 넓은 곳에서의 부여된 기회를 잡기 위해 중국땅에서 살아간다라 말 할 것입니다. 특정인의 글에 비아냥조로 글을 쓴 이유가 숲에 있는 몇개의 나무에 벌레 먹은걸가지고 숲 전체가 벌레 먹었다라 나발불지 말자라는 취지에서 한 표현입니다.
나역시 광둥에서 중국진츨 기념 수업료를 톡톡히 지불 했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족 동포에 대한 개념정립이 되었던 시기 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조선족 동포를 알고 있지만 철저한 기브엔테이크 방식에 입각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습니다만 가끔씩 내 생각이 틀렸다라고 보여주는 조선족 동포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미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족들이 의심이 많다고 합니다만 나는 한족들은 120%신뢰하지 않고 비즈니즈를 진행 합니다. 발품을 팔아 현물 확인을 하고 말지 서류로써 그들과 거래 하지 않습니다.
달러벌이를 위해 50년대 우리 어머니 세대에서는 양키들에게 몸을 팔았습니다.
한족들에게 무시당하고 일본인들에게 무시 당한다 해서 나의 신념까지 그들에게 얍잡힌다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한국 화교친구들 부모세대의 고향에 푸첸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짱꿰라는 말로 한국에서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러면서 부를 축적해가는 걸 사춘기시절에 너무 많이 봐서 생긴 사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시간관계상..아마 내일 오후 출국하기 때문에 담달 초에나 이어 쓰기 해야겠네요. 그동안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