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혼자 포도주를 찌끄리는데 직발 아바이 한테 전화가 와서 1층으로 내려갔다.
밤 늦게까지 근무하는 직발 아바이와 얘기 좀 하다가 숙소에서 50m 떨어진 그 포장마차로 다시 향했다.
숙소 근처 포장마차 만두집은 젊은 한족 부부가 저녁 6시경에 나와서 새벽 2시경에까지 했는데
주로 밤 늦게 다니는 사람들과 운전하는 택시 기사들이 주로 이용했다.
만두이외에 순두부, 찐계란 그리고 과자 비슷한 중국빵을 팔았는데 한국의 포장마차처럼 소박한 중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석탄 화로가 있어 훈훈해서 늦은 시간에 자주 가곤 했었다.
다시 가서 보니 위대한 조국에서 온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보통 위대한 조국 북조선에서 온 탈북자들은 아이들 젊은이들 그리고 중년들이 대부분인데
이 엄동설한에 할어버지도 아닌 할머니를 본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다수 탈북자들은 중국에 돈벌이로 오는게 아니고 단지 먹는 문제 때문에 오는 사람들이다.
나는 사람은 하루에 한끼든 두끼든 먹는 문제만 해결하면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로 보는데
먹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도강을 하고 일부 조선족들이 젊은 여자
장년층 안가리고 중국인에게 3000~5000원씩 받고 팔아 넘기는건 비극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보통 미모가 아닌 27살의 언니와 겁에 질린 20초반의 동생도 역시 팔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그들 자매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위대한 조국에서 온 할머니가 무사하기를 바랄뿐이다.
지난 밤은 위대한 조국에서 온 할머니 생각에 무척이나 잠을 설쳤다.
젊은 여자도 아닌 할머니 때문에 잠을 설치기는 이도백하에서 잠을 설친 이후 2번째였다.
여름에 100여명 정도가 180원에 백두산을 단체로 1박 2일로 등산을 했는데 백두산 아래 마을인
이도백하에서 하룻밤 자고 올라간 적이 있었다.
한 방에 8개의 구질구질한 싱구루 침대가 있었는데 할머니 3명도 같은방에 배정이 되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왜 나를 수 많은 방 중에 할머니들 방에 밀어 넣었는지 생각하기도 싫다.
오랜만에 바깥 구경을 나왔는지 들뜬 3명의 할머니들은 잠도 안 자고 새벽 3시까지 얘기하고 있었다.
무슨 할머니들이 기억력도 좋지 첫 날밤 얘기들을 그렇게 생생하게 하는지 고정하고 노실하게 독야청청
홀로 살고 첫 날밤이 어떤 밤인지 모르는 이 나그네에겐 첫 날밤 얘기는 잠 안 재우는 것 보다 더 큰
고문이었다. 이 때의 경험으로 요즘 순회공연을 다닐때는 성능 좋은 귀마개를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닌다.
정정도 하지 3시간을 잔 3명의 할머니는 같은 버스에 올라 백두산을 향해 향했는데 양쪽 길가의 쭉쭉 뻗은
미인송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 미인송을 보면서 지난 8년간 구멍가게도 없었던 강원도 깊은 산촌의 재료비
20만원 인건비 10만원등 30만원이 든 오두막집 생활이 불현듯 떠 올랐다.
이 미인송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서 나무 사이를 진흙으로 막고 온돌과 부엌에 아궁이 만들고 더불어
분위기 있게 방 안에 벽난로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은 살아본 경험으로 사방 8자도 나에게는
넓어서 7자면 적당할 것 같은데 만약 벽난로가 들어가게 되면 8자 정도는 되어야 혼자 지낼만 하다.
50만원으로 한 해를 지냈고 24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었던 이 시절이 나에게는 인생 최고의 삶이었는데
가지고 있는 벽난로 설계도를 사용할 수 있는 이런 아름다운 삶이 다시 찾아 올런지 창 밖을 보면서
상념에 잠겼다.
100여명이 매표소에서 부터 천지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는데 힘도 좋은 할머니 3총사는 나보다도 일찍
천지에 도달해 쉬고 있었다. 나는 100여명중 꼴찌로 올라 갔는데 다행인 건 10번 가면 2번만 볼 수 있다는
천지를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위대한 조국 북조선쪽엔 케이블카도 보였다.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오면서 장백폭포에서 좀 쉬었는데 여름철인데도 물이 무지 차가워서 사람들이
음료수와 맥주를 물 속에 담갔다가 마셨던 기억이 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호텔 베란다에 서서 밖을 보는게 큰 즐거움이었는데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
자전거 그리고 넓은 길을 빗자루로 쓰는 한족 여자 청소부들....
겨울철 새벽 4시경에 베란다에서 밖을 보면 그 이른 시간에 한족 여자들이 거리를 빗자루로 청소하고
있는걸 볼 수 있는데 1월 중순에는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 가는데 보면서 참으로 많은 걸 느끼곤한다.
직발을 보는 아바이에게 물어보니 청소를 하는 사람중엔 조선족은 없다고 한다. 그런 일은 골이 좋은
조선족들은 굶으면 굶었지 안한다고 한다.
주류인 한족들도 하는데 하물며 소수민족인 조선족들이 안 한다는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국에서는 한국인들도 궂은 일들을 많이 하는데 소수민족인 조선족은 정말 골들이 좋아서
그런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보통 시내를 나갈 때 걸어가거나 1원짜리 버스를 이용했는데 하루라도 밖에 나가서 "한국수속" 이라는
말을 안 듣고 집으로 돌아 온 날은 거의 없었다.
몸은 비록 중국에 있어도 마음은 한국이나 외국으로 다들 나가 있었다.
단지 여건이 안 되어서 중국에 있을 뿐이었다.
현재 30% 정도만 나갔고 70%는 나갈려고 대기 상태라고 어느 대학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들려줬다.
한국이 위대한 조국 북조선보다 돈벌이가 괜찮아서 한국으로 오는 것이지 북한이 돈벌이가 된다면
오래 전에처럼 위대한 조국 북조선으로 다들 갈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소수지만 북조선으로 돈 벌이가 되는 사람들은 현재도 두만강 다리를 열심히 넘나들고 있었다.
한국은 이들에게 단지 말이 통하고 돈벌이가 괜찮은 수 많은 나라중에 한 나라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기들은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니라는 어느 조선족 택시기사의 말이 생각이 난다.
한국에 많은 노인들이 일본 명치대학을 나왔다고 하듯 위대한 조국 북조선에서 온 북한사람들은 중국에
도강했음에도 다들 무역일꾼으로 나왔다고 하듯이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친척중에 한국에 장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듯이 골이 좋은 조선족들은 왕년에 대부분 선생질했고 아이들은 대부분 중점대학에
다닌다고 한다. 복단 대학에 다닌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하루는 아는 조선족 할아버지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도 역시나 전에 선생질했다고 하고 은퇴해서 지금은
상점에서 한 달에 300원을 받고 밤에 직발을 서는데 나의 꾀쬐쬐한 모습과 구질구질한 옷과 모자 그리고
오래된 신발을 보고 내가 위대한 조국 북조선에서 온 오리지날 탈북자로 스스로 답을 내린뒤 이 짝퉁
탈북자에게 진지하게 중국의 발전된 현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렇 땐 할아버지 전 탈북자가 아니에요 하면 믿지도 않거니와 크나 큰 실례다.
너무나 진지하게 중국의 발전상에 얘기를 해서 국민학생처럼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야만했다.
현재 중국은 옷이 너무 흔해서 버려진 옷만 줏어서 입어도 될 정도고 먹는것도 너무 흔하고 널렸다고 하는데
이 짝퉁 탈북자가 별로 놀라는 표정이 아니라서 섭섭했던지 결정적인 다음 말이 이어졌다.
중국은 현재 집집마다 자전거가 다 들어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