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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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울 곳이 없어서
지게에 머리를 기대고
두 손가락을 낀채
맘대로 손발을
벌리지도 못하고
잠자는 지게꾼이여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지금은 그대 옆에
돈 한푼 놓고 가지만
언젠가 재물이 나에게 오는 날
언젠가 권세가 나에게 오는 날
그대 인민을 위해
모두 바치오리다.
중국 중경은 옛날 서울의 달동네처럼 계단이 많아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지게꾼들이 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중경에서 김구 주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다. 임시정부가 1940년 중경에 정착한 후 요인들과 가족, 광복군, 그리고 교민 수백명이 중경 시내와 남안(南岸), 토교(土橋) 등지에서 생활했다.
임정이 1932년 상해를 떠난 후 오랜 피란과 이동 기간에는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 힘들었지만, 중경에 도착해서는 다시 사람 사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독립운동 속에서도 결혼과 출산, 그리고 죽음의 일상은 계속됐다.
전처와 사별한 김원봉은 김구의 주례 속에 재혼했다. 박찬익의 아들 박영준과 신규식의 조카이자 신건식의 딸인 신순호가 외교부장 조소앙의 주례로 가진 결혼식은 역경 속에 이루어진 경사라 더욱 축복받았다.
중경은 큰 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구름과 안개 때문에 햇빛을 보기 어렵고, 인가와 공장에서 나오는 석탄 연기로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중경에 거주하는 동안 동포 300~400명 가운데 70~80명이 폐병으로 사망한 것은 이런 기후 때문이었다.
김구의 장남 김인도 1945년 3월 29일 그 병으로 사망했다.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고 한 아버지의 심정이나, 남편을 살리기 위해 나섰다가 주저앉은 안미생의 심정을 헤아릴 만하다. 그런 실정이었기 때문에 유진동이 문을 연 병원은 한가한 날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잘 죽었는지도 모른다. 광복 후에 조국은 남북으로 갈리었고, 북으로 간 공산당원들은 모두 김일성에게 항거하다 죽었으니 말이다. 독립운동가와 공산당원들이 꿈꾸고 설계하던 조국의 미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