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화장실에서 8시간보냈다.이유는 단하나 추위를 피하기위해. 다리가 절리고 꽁초를 펴서 그런지 머리는 지끈지끈하며 냄새도 장난이 아니었다. 오만가지 생각과 잡념,암울의 극치다.
10분 자고 추워서 깨구, 20분 자구 추위서 깨구. 옆에 칸엔 사람 수십명이 교체된다. 인분의 내음이 모두가 틀렸다. 도저히 안돼 예전 몇번갔던 게임방에 가서 이글을 올린다. 좋은 알바 만난 덕에 그에게 부탁,무임으로 올릴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5일간의 설연휴는 악몽의 시간들이었습니다.너무너무 춥고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를 모르겠습니다.추위에 중독되어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떨리네요.그래도 삶의 소중함을 알기에 꾿꾿이 꿈틀거리고 있답니다.
올 나이 32세.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따라다닌 악운은 한시도 나를 놓지 않고 매년 제 옆을 지킵니다. 올해는 그놈(악운)이 절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돈없는 노숙자에게 세상의 표정은 요즘의 날씨만큼 무서웠고 비상구를 찾기가 어렵군요.
이 글을 다 적고 어디로 가야하죠? 확신할 순 없지만 그 화장실로 가야할거 같군요
그게 제가 원하진 않았지만 어쩔수 없이 저에게 주어진 팔자,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놈의 환경, 악운 뭐 그런 겁니다.
2003년의 벽두가 열렸다. 계획잡을 틈도 없이 위기의 연속이 1월에 홍수처럼 밀려온다.
수백만원씩 외상을 놓고 올 1월에 모두 잠적한 다섯놈의 사장님들.
맞보증의 짐을 나에게 떠밀고 조용히 잠수한 동료 웨이터. 이놈의 내 팔자는 왜 이런가.
그러나 난 절망하지 않았다. 외환위기때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열심히 노력해 당당히 극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게 착각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서로 어려워서 도와주는 분위기라고 있었지. 지금은 어찌된건지 모두 제가 살기위해 남은 안중에도 없다. 이게 바로 오늘 내가 노숙자의 길을 걷게된 이유다.
저는 술집 웨이터 출신입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못배우고 혹은 타락돼서 그런 직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가정환경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웨이터생활을 하면서도 생각을 올바르게 하도록 노력했고 손님들을 위해 최고의 서비스를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업소생활에서 도박,여자,사치,술은 가족처럼, 아니면 친구처럼 격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그러나 저는 이 넷중 하나라도 중독되면 젊은 내 인생이 끝이라 생각하고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사실 모르쇠보다 원천적으로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술의 경우 (업소생활 최고의 아킬레스건인데) 소주 2잔을 넘기지 못합니다.어쩔땐 소주병만 봐두 취할 때가 있지요.
여자문제는 여자들이 싫어하는 외형이라 오히려 제가 다가가면 멀어진다고나 할까요.
도박은 전혀 관심이 없어 모든 도박에 족보를 기억 못해 도박판에 끼어들지를 못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동료들이 끼워주질 않죠. 사치, 이건 현실적으로 저에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하 하나 있긴 있습니다. 서러움을 잊으려 게임하고 새벽에 택시타고 귀가하는데 이것이 사치라면 사치죠.
다시 저의 업소생활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8년간의 업소생활을 했으니 저도 이 분야에선 어지간한 프로에 못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년 사장님 다섯분이 외상값을 안 갚고 깊히 잠수해 버렸고 빚보증을 선 업소 친구들이 배신해 저에겐 무거운 빚만 남았습니다. 그 짐이 너무 무거워 낑낑거리며 축처진 어깨와 함께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던 3월의 어느날, 7년을 살았던 원룸 주인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해왔습니다.
“자네는 신용이 없어 당장 나가줘야 겠어”
“저.아주머니 부탁이 있는데요 한달만 살게 해주시면 안되나요”
“막상 지금나가면 잘곳이 없어요 부탁합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당장 나가”
“잘 곳 없는건 당신 사정이지”
“아주머니 7년간 월세 밀린적이 요즘 몇개월 뿐이 잖아요 너무 냉정하신거 아닙니까”
냉정하고 무심한 아주머니의 얼굴에 나 자신도 언성이 높아갔고 아니 당장 잠을 자야하기에 그런 것 같았습니다.
뜻 밖에도 집주인은 동화속의 이야기 처럼 “그래 총각 한달만 기회줄테니 힘내구 재기하기를 바라네. 밥은 먹었나.”라고 화답 했습니다.
업소에 출근했으나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업주의 잠수한 사장님 외상값에 대한 채근뿐이었습니다. 보증 세워 놓고 도망간 동료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3월의 어느날 무작정 업소를 그만뒀다.수중에는 단돈 5만원 뿐. 앞길이 막막했습니다...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업소를 나온뒤 1개월쯤 지났을까. 거리를 떠돌며 지하차도에서 잠을 청했다. 먹는 것은 남은 돈과 노숙자들을 따라다니며 해결했다.
4월 어느 날 같다. 자정을 지난 시간, 지하도를 빠져나와 하늘을 봤다.지금쯤 시골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손주놈, 자식놈 잘되라고 저 하늘을 보며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순간 가래와 침, 꽁초들이 가득한 석수통이 나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불과 몇달전 이유도 없이 단골 손님이 나에게 쏟아부었던 기억이 갑자기 이 순간에 떠오른 건 뭐람. 또 다른 기억이 아픈 내 가슴을 건드렸다. 1백40만원 계산서를 테이블위에 남긴채 소리도 없이 사라진 손님방에서 과일안주 접시에 남은 바나나를 씹으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갑자기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계산서를 들이밀자 갑자지 만원짜리 돈뭉치를 내 얼굴에 던지며 'xx새끼'하던 건달 손님.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한번은 손님이 계산서 지불조건으로 나더러 테이블위에서 발가벗으라는 것이었다. 힘이 없어선가, 아니면 계산 안하고 외상하면 나에게 돌아올 사장님의 불호령이 무서워선가, 아마 둘다였을 것이다. 난 쪽팔림을 무릅쓰고 테이블위에 올라가 옷을 벗었다.
아... 그때 내 발가벗은 꼬락서니를 보고 킥킥거리는 아가씨들의 표정이란... 지금도 잊을수 없다. 그때의 쪽팔림, 서러움,자신에 대한 한없는 실망.
자책과 서러움, 쪽팔림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날 아침 난 갈곳도 없고 전화할 곳도 없는 내 초라한 모습이 두눈에 투영됐다. 물론 친구도 있고 시골집도 있고 또 서울생활에서 사귄 지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 몰골로 그들에게 전화할 수 있단 말인다.
그래서 난 갈 곳이 없었다. 어디쯤일까. 무조건 길을 걷다 보니 공원이 나왔다. 고단한 몸을 쉬어갈겸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피곤함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몇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추웠다. 순간 눈앞이 깜깜했다. 내가 업소를 나올때 몸에 지녔던 손님 외상장부와 사인지,속옷 등 옷가지, 고객 수첩,핸드폰이 없었다. 'xx새끼들'욕이 나왔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런 때를 두고 한말이 아닌가. 바로옆 벤치에 노숙자 한명이 두다리를 꼬불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저놈은 알텐데, 아니면 저놈이 훔쳐간것 아닐까.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훔쳐간 놈을 잡나. 자포자기. 그래 난 항상 이것에 익숙해 있었다.
누군가 그런다. 노력해서 안되는게 있냐구. 그런데 그게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수십번 수백번 당하기만 해봐라. 이제 악 보다는 자포자기 상태가 된다. 안되면 난 공자나 예수라고 단언한다.
아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세상에 대한 도전이나 성취욕보다는 그래 생긴대로 살자, 팔자대로 살자라고 외치고 되뇌이게 된다.
모든 걸 포기하고 거리에 굴러다니는 신문 조가리를 짚어들었다. 갑자기 눈에 띈 기사 하나. 내가 일하던 업소 빌딩과 그 주위가 철거중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