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선생
중국에 다닐 때는 조선족여자나 한족여자들과 알고 지냈다.
한창 때라 선물을 왕창 사다주었다.
호텔근처에서 꼬치집하는 조선족식당은 조그마하고 자매가
하기에 자주 갔다.
밤에 일행과 나와서 한잔하고 왔다.
당시에는 가볍게 한잔해도 40-50원 나올 때였다.
우린 무조건 100원내고 거스름돈은 일절 받지 않았다.
갈때마다 화장품이며 잡지 그리고 담배도 한보루씩 선물로
주었다.
자매는 한족과 결혼했는데 자칭 연변가무단 출신이란다.
매일 밤마다 한잔씩 하는게 일과였다.
어느날은 한잔하고 주인이 안보이길래 그냥 호텔방에
돌아왔다.
그런데 30분쯤 지나니 전화가 왔다.
왜 술값 안내고 갔냐고 뭐라하는 것이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50원이란다.
바로 내려가서 100원주고는 그날로 발길 끊었다.
왜 주인은 50원을 받기 위해 전화를 걸고 난리를 쳤을까?
그동안 100원씩 준게 몇천원은 될텐데, 그날 이후로
발길 끊으니 며칠있다 호텔로 찾아왔다.
그날은 일행들하고 다른 식당에 가는 길이라서 시간을
많이 낼 수는 없었는데 왜 안오시냐고 오라고 하는 것이
었다.
모두들 마음이 떠났기 때문에 다시 그집에 갈 생각이
안났다.
내가 알던 한족아가씨가 있었다.
중국에 잠시 갔을땐데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안보이길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먹던 여자분에게 부탁을 해서
핸드폰을 빌려쓰고 한국기념품을 몇개 주었다.
그리고 얘기도 좀하고 전화번호를 알았다.
다음에 갈때는 내가 밥사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중국에 갈때마다 만나고 속옷도 선물하고 한국과자에서
악세사리까지 많이 갔다 주었다.
조용하던 보기드문 참한 그녀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느날 중국에 가서 전화를 하니 그녀 부친이 시집갔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갑자기 시집갔지만 난 그녀가 애인이 있는줄도 몰랐다.
그녀친구한테 대신 부주금과 선물을 전해주고 행복하길
빈다고 말했다.
한족이지만 착한여성을 만난 것이었다.
나한테 뭐사달란 말도 한번도 한적이 없었다.
그냥 한국에서 이것저것 사다주는 것이 낙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소식을 모른다.
어쩔 때는 보고 싶기도 하다.
문득 중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녀가 생각이
난다.
2001년에 대만에 나가 있을 때였다.
대만사람들은 대부분이 영어이름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한자이름 하나로 버틴다.
대만여성들은 남방계고 아열대기후기 때문에 종자자체는
매우 작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인데 대만에선 어깨에 힘주고 다녔다.
업무적으로 매일보는 대만분하고 좀 친하게 지내다
사장귀에 들어갔다.
가뜩이나 옹졸한 사장인데 참 치사하게 지랄을 한다.
뭘 어쩌라고 내가 멀 잘못했냐고?
황당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장도 외로운 것이었다.
충효동로에 있는 라이라이호텔 나이트가 우리의
아지트였다.
매일밤 사장하고 직원들은 그곳에서 대만흉만 보면서
시바스리갈을 마셨는데 입구에 SES사진이 크게
붙어 있었다.
정말 한국여성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한국의 선진문물인 부킹은 아직 대만에 보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어태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영어로 대화가 잘통하는 편이라서 멋진 여성들이
양주를 마시길래 달라 붙었다.
일단 자기소개를하고 옆에 앉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달라 붙었다.
그런놈 처음 보았을 것이다.
영어를 나보가 훨씬 잘하길래 뭐하는 분인가 궁금했는데
중화항공 스튜디어스였다.
우리의 봄날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로마갔다 왔다고 스튜디어스 5-6명씩 데리고 오면 우리가
봉도 아닌데 그것들 먹이고 춤추러 다니는데 정말 고비용
저효율이었다.
나이도 30대였는데 대만에서 사업은 안하고 밤만되면
이것들하고 양명산에 가고 어디가고 다니면서 사장은 말도
안통하지만 좋아서 정신을 못차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공중소조들은 성질도 더럽고 지랄같아서 한국에
돌아오면 새벽 4시에 한국으로 전화를 해서 지랄을 한다.
무조건 사과하고 다음부턴 안그렇게다고 사과하고 대만에
갈때는 안만나고 매장영업준비하는데 어떻게 알고는
찾아와서 왜 왔으면서 연락을 안하느냐고 또 야단을 친다.
지들 플라이트스케쥴에 맞추어서 사라고 한다.
봉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던 추억이다.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살지만 이젠 흰머리를 숨길 수도
없기에 가는 세월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