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선생
바로 전 직장에 근무할 때 얘기다.
외식기업이라서 해외영업주팀장인 내가 해외매장오픈을
맡게 되었다.
결국 북해도의 삿뽀로시하고 오사까 그리고 타이베이를
추진했는데 먼저 타이베이에 먼저 진출하게 되었다.
사장님하고 나하고 같이 대만을 방문해서 높은 양반께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대만라이라이호텔 동사장 장수정(회장)과 첫만남이었다.
그리고 자주 만날기회가 있었다.
장수정회장은 청나라의 마지막 대만총독의 5대손으로
대만에서 홍희그룹을 운영하는 대기업회장이시다.
대만의 상류층답게 부인은 일본인이었다.
대만은 우리와 달리 해방되고서도 일본인의 잔류가 인정이
되었서 많은 일본인들이 정주하게 되었다.
물론 일본인들은 대만사회에서도 상류층을 형성하고 산다.
홍희미술관을 방문했는데 당나라와 송나라의 나한상들이
무척 많았다.
정말 중국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우린 라이라이호텔에서 매일 공짜로 먹고 자고 생활을
했다.
합작선이 대기업이니 대우는 빈틈이 없었다.
주말에는 따씨의 홍희리조트에서 지냈다.
BMW배 골프대회를 주최하는데 타이거우즈도
왔다갈 정도였다.
대만사회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대만에 있으면서 알
수 있었다.
지난번에 대만공중소조들하고 어울리는 글을 썼지만 그건
여담이고 대만은 낡은 건물과 빈건물들이 너무 많았다.
이유는 대륙으로 떠가갔기 때문에 공장은 점점 비고
일자리는 부족하고 부동산은 하락하고 전형적인 하향세를
밟고 있었다.
난 20년전에 제대하고 공부하러 대만에 간적이 있었다.
그 때하고 지금하고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 지인은 20년전에 살던 집에 지금도 살고 있었다.
단지 자가용이 생겼다는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한국은 어떤가?
지난 20년간 천지개벽했다
20년전에 타이베이시내에 양복입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얼마나 더운지 정말 환장할 뻔했다.
모기장치고 자는데 땀이 뻘뻘난다.
대만에 그사이에도 몇번 갔지만 회사일로 투자건으로 가지
전혀 상황이 다르고 일이 많았다.
대만도 해외투자는 경제국에 신고하면 간단히 허가서가
나온다.
상하이홍콩은행으로 투자자금 송금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단 호텔보다는 시내에 매장을 먼저 열기고 하고
계약하고 오픈을 했다(문제는 현지스텝인 최대리가
월세를 남보다 50%를 더주는 우를 범했다)
다 좋은데 더운건 못참는다는 것이다.
정말 덥다.
그리고 지겨운 비
겨울에는 선선하지만 습기가 너무 많고 타이베이의 공해도
장난이 아니다.
분지기 때문에 더욱 심하다.
그리고 3월부터는 덥기 시작해서 10월까지는 무지 덥다.
더운데 비는 매일 내린다.
거기다 태풍한번오면 폭우가 내리고 지진으로 땅도
흔들리고 치안은 나빠서 밤에는 여자들은 외출도 못했다.
맥주한잔 할려면 술먹으러 택시타고 나가야지 걸어갈
거리에는 맥주파는 곳이 없었다.
민생동로에 가서 맥주먹고 택시타고 돌아오고
하야트호텔빠에서 혼자 술마시고 지겨웠다.
사람이 환경이 중요한데 한국사람은 더운건 질색한다.
북방계다보니 그런 것같은데 엄동설한은 한국사람은 잘
참고 추우면 술맛이 절로 나고 바야흐로 술의 계절이지만
삼복더위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난 대만친구도 있고 몇명의 사업가들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대만사람들은 소박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다.
단지 쫀쫀하게 생겼을뿐이지만 그래도 엘리트들은 제대로
생겼다.
난 대만에 건너가서 냉면가게나 할생각도 있다.
한국음식이라면 환장을 한다.
재미없는 나라지만 한국사람들은 상류층으로 떵떵거리고
살고 있고 한국학교 등교길엔 벤츠,BMW가 줄을 선다.
한국엄마들이 통학시키는 광경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국적을 받은 조선족들이 진출해서
한국이미지를 깍아 먹는 노릇이다.
한국국적의 동북조선족들을 조심하라는 소문이 벌써
돌았다.
대만에 사는 한국인들 지금 쪽팔려서 죽겠다고 한다.
조선족들이 대만까지 건너와서 깽판치는 모양인데
대만경찰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다.
언제든지 일망타진할 수있게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