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백거이(白居易, 772-846), 자(子)는 낙천(樂天)으로, 성당(盛唐) 이후의 유명한 대시인이다. 그의 대중적이며 쉽고 유려한 시풍은 원진(元稹, 779-831)과 함께 원백체(元白體)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적극적으로 신악부(新樂府) 운동을 창도 하고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시경<詩經> '풍아비흥(風雅比興)'의 전통 계승을 강조했다. ‘여원구서(與元九書)’는 그의 시론 강령으로 중국문학비평사상의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장문의 시를 많이 지었으며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은 그 대표작이다. 장한가는 천고의 절창으로 시 비평가들에 의해 칭송된다.
한유(韓愈), 두보(杜甫)와 같은 대시인들이 사후에 특별 추종을 받은 것과 달리 백거이는 살아있을 당시 시로 이름을 날려 중국은 물론 외국의 숭배를 받았으며 역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이름을 날린 20년간 각지 사찰, 도관, 정자 등의 외벽에서 모두 그의 시를 볼 수 있었다. 위로는 천자와 제후, 대신, 아래로는 목동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의 시가를 칭송하고 전파했다. 당시 그의 시를 베껴 돈과 술, 차 등으로 교환했으며 장한가를 통창할 수 있는 가기(歌妓)는 가치가 높았다. 심지어 외국의 재상 역시 상인에게 부탁해 그의 시작(詩作)을 구매했다.
백거이는 다른 시인에 비해 풍자시를 많이 지었으며 ‘매탄옹(賣炭翁, 숯을 파는 노인)’、’관예맥(觀刈麥, 보리 베기를 보다)’ 및 ‘요릉(繚綾, 비단을 감다)’ 등의 시가에서 백성의 고통과 빈곤을 동정하는 선량한 본성을 충분히 표현했다. 지금도 독자들에게 작자의 선심과 거대한 감화력을 느끼게 할 수 있다. 특별히 귀하다고 할 수 없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보내는 동시에 또한 스스로 자문하며 자신의 풍족한 생활을 부끄럽게 돌아봤다. 예를 들면, ‘관예맥’에서 백거이는 굶주린 부녀자가 아이를 안은 채 땅에 떨어진 보리알을 주워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은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봉록으로 삼백 석을 받아 여유가 있으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읊었다.
그의 선념은 점차 그가 수불(修佛)의 길을 가게 했다. 만년에 그는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칭하며, 사원에 들어가지 않은 수련자가 되었다. 수불은 그로 하여금 세상 일체가 모두 인과관계가 있음을 알게 했으며, 이로 인해 그가 생활에서 번거로움을 당했을 때(그는 강주(江州) 사마(司馬)로 좌천됐다), 그는 보통 사람처럼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번뇌하지 않았다. 또한 명리를 점점 담담하게 봤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추구하면 스스로 화를 불러오니 경계하라고 알리고, 수많은 사람의 고통은 자신의 언행으로 초래된 것이라고 의미심장하게 세인들에게 고했다. 명예와 이익을 담담하게 내려놓으면 인생의 진상을 꿰뚫어 볼 수 있어 그는 수련 중 매우 빠른 진보가 있었고 아울러 비교적 강한 숙명통(宿命通) 공능이 나타났다.
성당 전후 많은 조정의 명관과 문인은 수불을 했으며 그 중 일부는 자신의 전생을 알았다. 백거이는 시에서 "태위(太尉) 방관(房琯)의 전생은 수불하는 승(僧)이었고, 시인 왕유(王維)는 화가였으며, 나 역시 입정하여 숙명통으로 내 전생을 보니 본래 수많은 전생에 시가와 갈라놓을 수 없는 인연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썼다.
시인으로서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여러 전생에서 끊임없이 누적되어 온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알린 것이다. 여기에서 천재(天才)의 가장 자연스런 해석을 찾을 수 있다.
백거이는 비교적 강한 숙명통을 수련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수련 체오도 일반인보다 높았다. 그는 독선경(讀禪經)중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수지제상개비상(須知諸相皆非相) 모름지기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알고
약주무여각유여(若住無餘卻有餘) 만약 남음이 없이 살면 오히려 남음이 있네
언하망언일시료(言下忘言一時了) 말 아래 말을 잊으면 일시에 깨달으니
몽중설몽양중허(夢中說夢兩重虛) 꿈속에서 꿈을 말하니 두 가지 모두 빈것이네
공화기득겸구과(空花豈得兼求果) 공중의 꽃에서 어찌 겸해서 열매를 구하고
양염여하갱멱어(陽焰如何更覓魚) 밝은 불꽃에서 어떻게 고기를 다시 찾겠는가
섭동시선선시동(攝動是禪禪是動) 행동을 가다듬어 다스림이 禪이고 禪은 動이라
불선부동즉여여(不禪不動即如如) 禪도 아니고 動도 아닌즉 변함이 없다
시는 주석이 없고 선(禪)은 정설이 없다. 이 선시의 경지 역시 어진 자는 어짐을 보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움을 보듯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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