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H] 중국은 오천년의 유구한 문명과 역사를 가진 나라다. 비록 현재는 공산국가로 전락해 적지 않은 문명과 역사가 왜곡되고 파괴됐지만 1949년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의 과거에는 최초의 통사인 ‘사기’(史記) 이래 각 왕조가 교체할 때마다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써서 후세에 남기는 작업을 2천년 간 계속해왔다.
사마천(司馬遷)인 쓴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서이자 사서의 대명사로 불린다. 중국인들은 최초의 역사서가 나오기 전부터 역사기록을 남겨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했다.
춘추시대 열국의 흥망과 패권,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사마천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나라 대부 최저라는 사람이 군주를 살해하고 그 아우를 임금으로 세웠다. 제나라 태사가 이를 기록하자, 격분한 최저는 그를 살해했다. 죽은 태사의 뒤를 이은 그 아우가 역시 똑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최저는 다시 그를 죽였다. 그러나 또 하나 남은 동생이 태사가 되어 다시 이를 기록했다. 이에 이르러서는 최저도 어쩔 수 없어 기록의 말살을 단념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지방에 있던 다른 사관이 태사가 차례로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록판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기록이 지켜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지방으로 돌아갔다.
‘사기’는 사마천 필생의 업적이다. 사마천은 이 책을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삼국시대 이후 ‘사기’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그 책에 기록된 1천년 전의 은대 계보가 갑골문자의 발굴을 통해 정확히 확인된 바와 같다.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면서 객관적 자료와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역사가로서의 엄정함을 갖추고 있었다.
이 책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며 각국어로 번역돼 널리 애독되고 있는데, 그것은 유려하고 생돔감 있는 문장 속에 무수한 인간 군상의 인생역정이 깊이 있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 없이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이 책에 빠져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를 통해 역사란 어떻게 창조되는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사기’는 본기, 서, 세가, 열전의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3권 중 열전이 7권을 차지,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마천에 의해서 새로이 창안된 이 새로운 역사 서술 체제, 즉 기전체는 이후 중국 정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본기’는 황제 이후의 역대 제왕, 세가는 제후, ‘열전’은 그 외의 인간 군상에 대한 전기다. 표는 유동하는 역사적 사실을 상호 연관시켜 일람하기 위한 바둑판식의 연표이며, ‘서’는 사회문화의 기초가 되는 역법, 천문, 법, 예법, 경제, 치수 등에 대한 제도사이다.
사마천은 대대로 주의 사관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을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류를 관리하는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흥미가 많았으며, 그의 부친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직접 답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 등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 후 낭주의 직에 올라 무제를 수행,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원전 110년, 부친이 죽고, 사마천이 태사령의 직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시, 서, 춘추, 전국책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 상소문, 국가의 포고문 등을 섭렵,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사마천에게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명장 이릉을 단죄하는 무제 앞에서 모든 중신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사마천이 홀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릉은 5천의 병사로 10만의 흉노 기병과 대적, 흉노1만명을 살상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됐다. 화가 난 무제는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이 옥에 갇혀 옥리만 보면 공포감에 죄어드는 비참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 경험은 그에게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게 했고,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했다.
당시에는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50만 전의 막대한 벌금을 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살림이 넉넉지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스스로 궁형을 선택했다.
그는 죽음보다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궁형을 택한 이유를 훗날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극형을 받으면서도 태연스럽게 부끄러운 빛조차 띠지 않았던 것은 이 저술을 미완성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책을 완성하여 명산에 소장하고 각지의 지식인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저의 수치도 충분히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설령 이 몸이 산산조각난다 한들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사마천이 2년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다. 그가 무제의 측근에 봉직, 중서령의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그것은 그가 환관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이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연결시켜나갔다. 기원전 97년, 무려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사마천의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관찰력, 가혹한 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사기’가 완성됐다.
곽제연 기자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