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모자(趙莫迦, 따지웬 평론가)
베이징의 상징 텐안먼(天安門) 광장 근처에 세워진 공자상이 연일 중국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40년 전 문화혁명을 일으켜 공자 비판 운동을 만들어 낸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당시 비판 대상이었던 공자의 동상이 사이좋게 한 장소에 있다. 이를 두고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당국의 진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억측과 정보가 난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인터넷에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글이 가장 인기를 얻고 있다. 일찍이 마오쩌둥 본인이 공자 비판에 사용한 말이라 한다.
‘우리 공산당원은, 공자를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예전처럼 비판한 후 숭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다시 공자의 사상을 빌어 민중에게 영향을 주려고 한다면, 역사의 순환에 빠지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공산당 스스로 통치할 수 없게 되거나 곤경에 빠져 공자를 귀환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면, 그것은 공산당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오의 초상화는 텐안먼에 수십년 동안 걸려 있다. 그 옛날 마오의 존재와 사상은 ‘붉은 태양’으로 여겨져 중국인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이자 중국을 통치하는 공산당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대약진’ 정책의 실패가 부른 기아나 문화혁명의 혼란 등 수많은 폭정이나 실정으로 수천만 명의 국민을 비정상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마오는 이미 중국인 마음 속의 ‘태양’은 아니게 되었다.
76년 마오는 사망했다. 이후 30년 경제 개혁을 거쳐 형식적인 사회주의가 남은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사상은 더 이상 국가의 구심점이 될 수 없다. 70년대 덩샤오핑의 중국식 사회주의도 결국은 극단적인 빈부 차이만을 만들어 낸 일종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이 절정에 달한 시점에서 정권을 인수했던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조화 사회’이론을 내놓는 동시에 ‘위로 반항하지 않는 사상’을 말했던 공자를 숭배하는 운동을 전국 곳곳에서 추진했다. 그 결과, 마침내 공자상이 천안문 근처에 세워져 마오쩌둥의 초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중국 경제지 ‘재경망(財経網)’의 저명 평론가 쉬스량(許錫良)은 ‘권력과 이익의 결합 끝에, 2,500년이란 시간차가 존재하며 사상이 상반되는 두 역사 인물의 유령이 연결되었다’면서 ‘이 이상한 광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당국의 당황한 모습’이라고 꼬집었다.
쉬씨에 따르면, 활화산 분화구에 앉아있는 위기에 빠진 현 정권은 이미 국민에게 버림받은 마오쩌둥 사상이 아니라 질서 유지에 편리한 공자의 가르침에 국민 통합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한편, 공자상의 설치 장소와 설치 시간을 가지고 역점을 치는 네티즌도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이 점괘는 ‘주모자의 무기력과 비겁’을 나타내는 것이며, 중국 공산당 정권은 이번 방법으로 권력자의 전체 이익을 지키는 것에는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머지않아 좌파 세력과 자유주의자에게 협공당해 향후 정세가 변화될 위기에 놓여 있다.
‘진(秦)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후(胡)다.’ 시황제가 통치한 진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은 시황제의 아들인 후하이(胡亥) 였다.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이 예언처럼, 진의 시황제를 넘는 통치자라고 자칭한 마오쩌둥은 공자의 영혼을 귀환시켜 공산당 통치의 힘을 빌린 후진타오의 시대를 예견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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