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청현
[SOH] 나무를 기르던 원정(園丁·정원이나 과수원 따위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으며, 물을 언제 주어야 하고 거름을 언제 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무와 다정히 대화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 번은 학생들이 그를 초청해서 나무를 잘 기를 수 있는 비결을 듣기로 했다.
그는 학생들 앞에 나가 분필을 들고 칠판 앞에 섰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분필을 던져 버리면서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무가 와서 말해야 한다. 그러나 나무가 온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나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이다"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때 학생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 학생들은 기대한 비법을 듣지 못했는데도 왜 그렇게 찬사를 보냈을까? 아마도 학생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실(其實) 나무를 기르는 오묘한 기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원정의 깊은 뜻이 학생들에게 공감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무엇보다도 진리 그 자체는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표현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는 정보와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나타낼 수 없다.
비록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모든 감정의 흐름, 사물의 진상과 그 의미를 만족할 만큼 드러냈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언어란 대상을 대강대강 표상(表象)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사고할 수 있고, 무엇이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 이상의 것을 사고하지 못하며, 또 사고하지 못한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사고의 범위 내의 것이라 하더라도 언어로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비록 언어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일 따름일 뿐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지 다 생각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착각(錯覺)이며 무지(無知)에 속한다 할 것이다. 더구나 언어로 표현된 것을 사실과 동일시한다면 이것보다 더 큰 착오는 없다.
물론 언어의 기능과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 제일주의’로 나간다든지 심지어 언어의 상(相)을 맹신하게 된다면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며,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할 것이다.
편집부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