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성이 공(孔)이고 이름이 급(汲)인 자사(子思)는 공자의 손자로서, 후세인들이 “술성(述圣)”으로 높여 불렀으며, 전국 시대 초기의 저명한 사상가였다.
자사가 살았던 시대는 사회적 예악의 붕괴, 제후들의 패권 투쟁, 민생의 도탄이라는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보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전력을 다해 도덕과 어진 정치(仁政) 애민(爱民) 사상을 널리 전파했으며, 위기에 처한 사회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불굴의 의지, 진리 추구 정신과 어떠한 위협에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은 후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자사는 유년 시절에 포부가 컸다. 어느 날 공자가 홀로 탄식을 하자, 자사가 공자에게 물었다. “자손이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지 못하고, 도덕을 널리 떨치지 못할까 봐 걱정되십니까? 아니면 요순의 도를 흠모하지만 그처럼 될 수 없으십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어린 네가 어찌 내 심중을 알겠느냐?” 하니, 자사가 다시 대답했다. “아비가 장작을 팼는데 자식이 그것을 등에 지지 않는다면 곧 불초입니다. 제가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학습에 열중하며, 조금도 느슨하지 않는 것은 장차 도를 깨우쳐 세상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공자가 듣고 기쁘게 말했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구나.”
자사는 성현의 글을 열심히 배웠다. 그가 말하기를: “성실(诚者)은 하늘의 도이며, 천도는 세간의 이치이니, 사람은 인(仁)으로 근본을 삼고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며, 덕행이 일치해야 한다”고 했다.
한 번은 맹자가 자사에게 성(誠)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자 자사가 말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기초는 바로 자신의 품성과 덕성을 수양해야 함인데, 그 수양의 관건이 곧 ‘성(誠)’이다.“ 진성(真诚)은 천상의 법칙이고, 진성을 추구함은 사람 되는 법칙이다. 마음의 성(誠)이 극에 이르면 오히려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으나, 지나침도 없다; 진성하지 않으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군자는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으니, 홀로 있을 때 더욱 근신해야 한다”.
위(衛)나라(BC 209년까지 존속한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국)가 전란에 직면했을 때 자사는 위나라 군주에게 “구변(苟变)은 장군의 재목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추천했다. 위나라 군주가 말하기를 “알고 있소. 하지만 구변이 관리가 되어 세금을 거둘 때 백성의 계란 2개를 먹은 적이 있으므로, 과인은 그를 쓰지 않겠소”라고 했다.
자사가 다시 말했다. “사람마다 장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범할 때마다 바르게 이끌고 가르치고, 그를 믿으면 잘못을 고칠 것입니다. 한번 잘못으로 그의 장점을 무시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버리지 마십시오!” 이에 위국 군주는 자사에게 사의를 표하며 말했다: “과인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나중에 자사는 위나라의 여러 신하가 군주에게 잘못된 계획을 제출함에 이구동성으로 따라 하는 것을 듣고 말했다. “내 보기에는 지금의 위나라는 정말로 군주가 군주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습니다.”
이에 제후국 공구의 의자(懿子)가 그 연유를 묻자 자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군주가 스스로 옳다고 여겨 우쭐거리며, 일의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찬양하게 하는 것을 즐기니, 이는 비할 바 없이 혼미한 것입니다. 일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않고 무턱대고 아부합니다. 이는 극도의 아첨이며, 사악한 기풍을 조장합니다. 이렇게 백성 위에 군림하는데, 백성들이 어찌 만족할 수 있을까요? 남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선현들이 자신의 과오를 지적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자사는 국가의 덕치와 교화를 갈망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그 포부(志向)가 동요되지 않았고, 개인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제후들이 권력과 이익을 다투며 힘을 믿고 약자를 괴롭혀 백성을 해하고 도를 해하는 행위를 질책했다.
한 번은 노나라 호모표(胡母豹가 자사에게 “선생은 현실을 고려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 이에 자사가 말했다. “다만 포부와 도의가 원대하지 못한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나는 세상이 인덕지도(仁德之道)를 받아들여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만약 나의 지조와 절개(志节), 천도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한다면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잘못이므로 나는 추구해 온 도의를 영원히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자사는 열국을 주유하며 도덕을 설파하여 많은 제후들의 존경을 받고 백성에게 존경 받았으며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학생도 갈수록 많아졌다. 노나라 목공은 자사를 재상으로 초빙하였으나 그는 학문을 중히 여겨 완곡히 거절했다.
평생 가난했던 자사는 부귀의 함의를 이렇게 이해했다: 사람들이 부(富)라고 일컫는 것을 취하지 말고 사람들이 귀(贵)라고 일컫는 것에 굴하지 않는다. 취하지도 굴하지도 않는 것만이 부귀(富贵)라 할 수 있다. 아첨하며 영달을 추구하는 부당함을 질책하고 고관들의 높은 봉록도 군자를 유인할 가치가 없다고 논술했다.
증자의 아들 증신은 자사에게 “굴기(屈己:자기를 굽힘)는 도의 신장입니까? 항지(抗志:그 뜻이 고상함)는 빈천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자사는 “굴기하여 부귀를 얻느니 항지하여 빈천하게 되는 것이 낮다. 굴기는 사람들에게 압제당하는 것이고 항지는 도에 부끄럼이 없는 것이다. 만약 자기를 굽혀 부귀를 구할 뿐이면 빈천하여 지향을 견지하는 것만 못하다. 이래야 남에게 억압받지 않으며 도덕적 원칙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자사는 또한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으니, 떨어질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며, ‘도’와 ‘권력’에 대해 당대 성현의 고상한 절개와 호연지기를 드러냈다.
공자에게 물려받은 예법과 도덕규범을 평생 중시하며 철저히 엄수했던 자사는 이를 맹자에게 전승시키며 유가의 경전 <중용>을 저술하여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국가가 성세했던 시기는 모두 사회적 도덕 수준이 높았고, 정치는 청명(清明)하며 인심은 선을 향했다. 그러나 난세, 말세에는 권모술수가 성행하고 사람들은 물욕을 추구하여 도덕을 타락시켰다.
이로 인해 그러한 시기마다 모두 성인이 세상을 구하려 나오고 인간의 심적 선념을 깨우쳐 도덕적 수준을 유지시켰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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