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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中文化] ‘水災’와 ‘전염병’에 대응하는 최고의 방법

편집부  |  20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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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SOH] 속설에 ‘위관일임조복일방(爲官一任造福一方; 지방의 관리가 되면 그 지방 백성을 위해 복리를 도모하고 좋은 일을 해야 한다)’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벼슬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부패한 관리를 몹시 미워하며, 그들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이 부패관리를 미워하지만, 그들은 결코 ‘부패’만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패’해볼 기회가 없음을 한스러워 한다.


북송(北宋) 대문학가 소식(蘇軾),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양쯔강 물은 동으로 물결 따라 사라져 갔네”. 이 시에서 물결이 한없이 흐르면서 오랜 세월 출렁인다고 했으며, “당신이 떠난 지 어언 십 년, 하늘과 땅 멀고도 아득한데”라는 깊고도 지극한 정을 표현하여 오랜 세월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런 풍취 있고 호방한 문사(文思; 문장 속에 담긴 사상)는 끊어지지 않고 샘솟듯 하여 서예, 산문, 문인화 등에서 긴 역사를 가진 중화 문화 속에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시구에서 우리는 소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의 소식은 오히려 개성 넘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즉 ‘위관일임조복일방(爲官一任造福一方)’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제세구민(濟世救民)하는 책임 있는 부모 같은 관리(父母官)였다.


작가 청동(青桐)이 소식의 사적을 정리한다.


■ 홍수를 다스리며 성벽 위에 거주하다


소식이 서주(徐州) 태수로 부임했을 당시, 황하 조촌(曹村)에서 홍수가 발생해 서주성 아래로 물길이 휩쓸려 와서 상황이 매우 위급했다.


수위는 점점 더 높아졌고, 물결이 성벽에 세차게 부딪치면서 붕괴될 위험까지 보였다. 부유한 사람들은 홍수를 피하기 위해 서로 다투어 도시를 빠져 나갔다。


그러나 소식은 “부유한 백성이 성을 나가면 다른 백성이 모두 동요한다. 나는 여기 있을 것이고, 홍수가 결코 성벽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태수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부유한 백성들도 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소식는 단호하게 군대를 동원하고, 그들이 군부대에 도착하자 병사 지휘관에게 “홍수가 이 성벽을 무너뜨리려 한다”며, “사정이 급하니 비록 당신들은 금위군(궁궐과 수도 방어군)이지만, 최선을 다해 끝까지 협력하시오.”라고 당부했다.


병사 지휘관은 “홍수가 터졌으나 태수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저희가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라며, 군졸을 이끌고 삼태기와 삽을 들고나와 제방을 보수하고 둑을 쌓았다.


비는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내려, 성벽이 수면까지 노출됐다. 성의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이어서 보기에도 정황이 위급했다.


소식은 성벽 위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홍수 방지 업무를 지휘했다. 이에 군민은 한마음으로 협력해 마침내 홍수를 막아 서주성을 지켜냈다.


홍수가 물러난 뒤 소식은 서주에서 물이 새는 곳이 있으면 모두 보수하고, 목조 호안(护岸)을 건조하여 홍수가 다시 오지 않도록 대비했다.


■ 전염병과 가뭄 다스리다


소식은 고생을 낙으로 삼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었다. 비록 평생을 계속해서 곳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불평하지 않았고 어디서나 처리할 일들을 훌륭히 해냈다. 소식이 항주에 갔을 때, 마침 항저우에 큰 가뭄이 들어 기근과 역병이 발생했다.


소식은 우선 역병과 기근을 다스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는 여분의 공금 2천관(缗)과 자신의 황금 50냥을 가지고 자선병원을 짓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백성들을 치료했다.


그는 이듬해 봄, 비축미를 싸게 팔고, 죽과 탕약을 많이 만들었다. 백성을 치료하기 위해 이웃으로 의사를 대동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많은 사람을 구했다. 항주는 소식의 다스림으로 역병을 이겨냈다.


남송(南宋) 이후 항주는 대도시가 되었지만 전에는 아주 황량한 지역이었다. 항주는 바다가 가까워 지하의 샘물은 모두 짠맛과 쓴맛이 났다. 당나라 자사 이필(李泌)은 서호의 물을 끌어오고, 6개 우물을 파서 백성이 담수(淡水)를 마실 수 있게 했었다.


백거이(白居易)는 백제(白沙堤)을 수리하고 서호를 준설하여, 호수를 수로(즉 대운하)로 끌어들이고, 다시 운하에서 물을 끌어들이면서 밭 천경(顷)에 물을 댔다. 이로부터 이곳 백성들은 점차 부유해졌다. 차후에 관청은 늘 서호와 이곳 수로를 준설했으며, 이 일대는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게 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개국 이후, 이곳의 수리 공사는 점차 부실해졌고, 침적된 진흙으로 인해 수로가 막혀 수심이 얕아졌다. 3년에 한 번 파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가 다닐 수 없어 백성들에게 장기적 부담이 되고 있었다.


서호의 얕은 물목은 온통 ‘봉(葑; 줄뿌리)’으로 뒤덮였다. 일종의 교백(茭白; 깜부깃병에 걸려 비대해진 줄의 연한 줄기)과 유사한 수초로 죽은 후에는 진흙이 되어 ‘봉전(葑田; 줄뿌리가 여러 해 얽히고 쌓여서 된 밭)’이라고 하는데, 호수의 면적을 점점 작게 만들었다.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이런 ‘봉전’은 25만여 장(丈)'으로, 호수는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그 해 만든 6개 우물도 대부분 막혀서 폐기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식은 두 개의 수로를 뚫고 항운할 수 있는 충분한 물을 확보했다. 조수가 더 이상 도시로 유입되지 않도록 큰 제방을 수리하고 6개의 우물을 더 팠다.


가장 큰 공사는 호수의 봉전에서 흙을 채취하여, 30리 길이의 제방을 쌓는 것으로, 첫째는 호수를 깊게 하고 호수 면적을 확장하는 일이었다. 또 제방에 큰길을 조성하여 행인들을 편리하게 했다.


이것이 현재의 소제(蘇堤)로서 당시에는 ‘소공제(蘇公堤)’라고 불렀다. 수로가 침적된 수초로 막히지 않게 하려고, 이곳에 마름(한해살이풀)을 심는 농민은 매년 수확 후 남은 뿌리를 등을 완전히 제거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호수에 마름을 심는 것인데, 마름이 있으면 "줄뿌리"와 같은 잡초가 더 이상 자랄 곳 없다.


20년 후 소식이 항주로 재차 돌아갔을 때 그는 그곳의 모든 집에 자신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사람들이 식사할 때마다 초상화에 몇 마디 축송하는 것을 보았다. 또 그를 위해 사당을 지었는데, 살아 있는 동안 사당을 지어 준 것이다. 이렇게 공적을 기려주는 것에 대해 소식은 모두 담담하게 대처했고, 그는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 군기를 바로 잡다


송 철종이 집권한 후, 소식은 지방관으로 가겠다고 청하여 거란에 인접한 정주(定州)로 파견됐다.


정주는 당시 군대와 관청이 부패하고 느슨하며, 법도가 없었다. 군사학교 관리들은 병사의 식량과 하사품을 빼돌렸다. 또 병사들은 제멋대로 게으름을 피우고 지시에 불복했다. 전임 지방관들 역시 그들을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소식은 정주로 부임한 뒤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횡령한 군관을 먼 곳으로 유배시키고, 병영을 보수하고, 음주 도박을 금지했다. 또한 군영 내 퇴폐적인 풍조를 몰아내고, 군사들의 의복과 식량을 가로채지 못하게 했다. 또한 전법(战法) 부서를 이용해 사병을 단속하니 사병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며 복종했다.


그러자 군사학교 교관들은 두렵고 불안해했으며, 어떤 사병은 장물을 들고 상관에게 고소했다.


이에 대해 소식은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도 된다. 너희들에게 고소하도록 맡긴다면 군 내부가 혼란해질 것이다.”


소식이 즉시 그들을 유배시키자 여러 사람이 비로소 안정됐다.


마침 대대적인 봄철 검열을 했는데, 오랫동안 군사학교 관리들은 상하 계급적 구분을 폐지했었다. 소식은 예전의 규정에 따라 완비하라고 명령했다. 지휘관은 평상복을 입고 막사에 들어가고, 군사학교 관리는 본인의 계급에 따라 군복을 입게 했다.


부책임자인 왕광조(王光祖)는 스스로 노장이라 여기며, 이렇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병으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출근하지 않았다.


이에 소식이 서기를 불러 그에게 상주문을 작성하게 하자, 왕광조는 이 소식을 듣고 엄중한 처벌이 두려워 군대에 참가했다. 검열이 끝난 후에는 태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정주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이런 사열식을 본 적이 없다. 참으로 엄격하고 공정한 군기다!”라고 말했다.


소식은 안민치국의 도에 대해 일찍이 내심을 털어놓고 말했다.


“국가의 생존과 멸망의 원인은 도덕의 고하에 있지, 국력의 강약에 달려 있지 않다. 즉 새로운 왕조가 서면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으니, 풍속의 경박과 인정의 두텁고 후함에 달려 있지 국가의 부와 빈곤에 달려 있지 않다.”
 

그는 평생을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진(真)’과 ‘선(善)’이라는 최고의 도리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지켰다.


그는 이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입증하고, 세상에 내놓은 시문으로 천명함으로써 후대에 한 몫의 고귀한 정신적 재부(财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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