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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한신(韓信) ‘종실(鍾室)에서 억울하게 죽다’

편집부  |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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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SOH 자료실]


[SOH] 황제에 즉위한 후 유방에게는 과거 항우와 쟁패하던 기간에 분봉했던 팽월, 영포, 한신 등의 이성왕(異姓王)들이 뱃속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하루 속히 이들을 제거해야만 유방의 속이 편해질 터였다. 이들 이성왕 중에서도 특히 한신은 재능과 성망이 가장 커서 유방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더욱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한신은 연금된 후 유방이 자신이 세운 공로를 어렵게 여기고 꺼리는 것을 알아 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조용히 지냈다. 병법을 정리할 때 유방이 불시에 그를 만나러왔다.


한 번은 유방이 한신에게 물었다. “나는 얼마나 되는 군대를 이끌 수 있는가?” 이에 한신은 “많아야 10만 명입니다.”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유방이 또 물었다. “그럼 그대는 어떠한가?” 한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고사성어 다다익선의 유래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서 어째서 나의 신하가 되었는가?” 한신은 평온하게 “폐하께서는 비록 군대를 잘 이끌진 못하시지만 장수를 잘 거느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의 신하가 된 이유입니다. 폐하의 지위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신의 이 대답은 비록 자신의 재능이 유방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반역할 뜻을 품고 황위를 노릴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누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가는 하늘에서 정하는 것으로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한신의 공이 세상을 덮고 행실이 반듯한데도 경솔하게 처리하면 여러 신하들이 실망하고 천하의 불만을 사는 것이었다. 하물며 애초 한신의 전공이 탁월했기 때문에 유방 스스로 “삼불살(三不殺)”을 약속한 적이 있다. 여기서 삼불살이란 “하늘을 보고 죽이지 않고 땅을 보고 죽이지 않으며 쇠를 보고 죽이지 않는다(見天不殺,見地不殺,見鐵不殺)”는 뜻이다.


유방은 이미 한신을 죽일 생각이 있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신의를 저버렸다”는 악명을 듣고 싶진 않았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여후(呂后)가 남편인 유방의 속내를 간파하고 주제넘은 참견에 나섰다.


여후는 본명이 여치(呂雉)로 사람됨이 강퍅하고 음험하면서도 악랄했다. 젊을 때 온가족이 원수의 보복을 피해 패현으로 숨어 들어왔다. 부친인 여공(呂公)이 유방의 관상이 비범한 것을 보고는 여치를 아내로 주었다. 유방이 팽성에서 항우에게 크게 패했을 때는 난리 통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당시 여치와 유방의 부친 태공은 항우의 포로가 되어 인질로 잡혀 있었다. 나중에 한신이 제나라 땅을 점령하고 초나라 군의 식량을 공격한 후에야 항우는 어쩔 수 없이 강화에 나서 유방의 가족들을 석방해주었다. 이 때문에 여후는 2년이 넘는 인질생활에서 비로소 벗어나 유방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신은 여후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얼마 후 개국공신 진희(陳豨)가 대왕(代王)을 자칭하고 한왕(韓王) 신(信 한신과 동명이인), 연왕(燕王) 관(綰)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여후와 소하는 장안에 남아 수도를 지키게 했다. 여후는 시기가 무르익은 것을 보고 한신의 시종 난열(欒說 악열이라고도 한다)을 매수해 한신을 ‘모반’죄로 무고하면 나중에 신양후(慎陽侯)로 삼기로 했다.


그 후 소하를 위협해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승전했으며 여러 제후와 신하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열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시켰다. 평소 잘 나오지 않던 한신을 속여 궁으로 불러들이려는 속셈이었다. 총명한 소하였기에 여후가 내민 증거가 그리 믿을만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수단이 악랄한 것을 두려워해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했다.


사실 소하는 과거 전력을 다해 한신을 대장군으로 추천해 삼군을 통솔하게 했으니 한신에게는 지음(知音)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한신은 줄곧 소하를 존경해왔고 그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속으로는 이번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소하의 청을 고려해 장락궁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신이 궁에 들어서자 미리 매복해있던 무사들이 둘러싸고 포위했다.


당시 한신은 속은 것을 알고 다급히 소하를 찾았지만 소하는 현장에 없었다. 대전에 앉은 여후는 엄한 목소리로 한신이 자신과 태자를 해치려했다고 비난하면서 한신에게 변호할 기회도 전혀 주지 않고 장락궁 종실(鍾室)에 데려가 죽이게 했다. 일대의 명장이 이렇게 여후에게 계획적으로 살해된 것이다.


여후는 한신을 죽인 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명을 내려 한신의 삼족(三族 부가 모가 처가 3가문의 일족)을 멸하게 했다. 마침 정월 한겨울이라 큰 눈이 내려 하늘을 가리는 가운데 수천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장안을 물들였다. 이들의 울음소리가 싸늘한 북풍소리와 함께 장안 상공에 메아리쳤다.


장안 도성 사람들은 한탄하고 비통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들 말하길, 회음후는 천금으로 밥을 먹여준 표모의 은혜에 보답했는데 전에 자신이 입던 옷과 음식을 나눠주던 황제는 어찌 된 일인가? 만약 정말로 모반할 마음을 품었다면 어찌 소하의 몇 마디 말에 경솔하게 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만약 한신이 황제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모진 마음으로 한신의 충성심을 저버린 것이라면 그럼 한신의 죽음은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한 후 돌아와 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여후에게 왜 한신을 죽였는지 묻지 않았다. 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처치했는지 추궁하지도 않았다. 단지 한신이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남겼는 지만 물었다. 사서에 기록된 그의 반응은 “기뻐하면서도 가엾게 여겼다”고 한다. 즉 한편으로는 마음속의 우환이 사라져서 기쁘기도 하고 다른 한편 한신이 너무 가련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신을 살해한 후 이들은 같은 수법으로 팽월을 상대했다. 팽월은 창읍(昌邑) 사람으로 원래 초야의 강도출신이었다. 유방이 초회왕의 명령을 받들어 관중에 진입할 때 팽월이 이끌던 부대가 도움을 주었다. 초한전쟁 중에도 팽월은 줄곧 초나라의 후방에서 항우를 견제하며 유방에 대한 압력을 상당히 완화시켜 주었다. 유방이 아주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는 한나라 군에 많은 식량을 보내준 적이 있다.


항우와의 결전에 앞서 유방은 한신, 팽월에게 초나라를 이긴 후 셋이 천하를 나누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팽월에게 양(梁)나라 땅만을 주어 양왕으로 삼았지만 팽월도 이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팽월은 나이가 유방과 비슷한데다 성격이나 개성도 서로 비슷해서 개국공신들 중에는 유방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일처리가 신중했는데 특히 한신이 회음후로 폐위된 후에는 마치 살얼음을 밟듯이 더욱 조심스러워 했다.


진희가 반란을 했을 때 유방은 각 제후들에게 병력을 이끌고 함께 토벌하자고 했다. 당시 팽월은 나이가 이미 많았고 또 마침 병에 걸려 부하장수에게 병력을 주어 대신 파견했다. 유방은 이에 큰 불만을 품었다. 낙양에 돌아온 후 그에게 반역죄를 씌워 왕위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고는 촉나라 청의현(青衣縣)으로 유배를 보냈다.


유배지로 떠나는 길에 우연히 여후를 만난 팽월은 그녀를 구세주로 여기고 울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단지 고향인 창읍에서 여생을 보내게만 해달라고 간청했다. 여후는 팽월을 부축하고 위로하면서 “양왕은 상심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 나를 따라 낙양으로 돌아갑시다. 가서 황상을 뵈면 내가 대신 말해보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낙양에 돌아간 여후는 호랑이를 산으로 되돌려 보내면 안된다며 유방을 책망하고 마땅히 뿌리를 잘라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팽월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그의 몇몇 수하들을 매수해 팽월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하게 했다. 이런 수단은 한신을 대할 때와 똑같았다. 결국 운이 없던 팽월은 목숨을 잃고 삼족이 멸한 것뿐만 아니었다. 여후는 그의 시신으로 젓갈로 만들어 각지의 제후들에게 보내 맛을 보게 했다.


유방과 여후가 근심으로 한신을 살해한 이 일은 후인들의 비난을 받았다. 즉 없는 죄를 만들고 증거를 조작해 한신에게 ‘모반’죄를 덮어씌웠을 뿐만 아니라 역이기와 종리매의 죽음 역시 그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 한신의 명성과 지조를 더럽혔다. 아울러 이런 내용을 관방의 문서와 사서에 기록함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은폐시켰다. 


《사기》에도 한신과 진희가 모반을 의론한 것처럼 일이 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만약 한신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확실히 있었다면 왜 제왕으로 임명되어 유방, 항우와 더불어 천하를 삼분할 실력이 있을 때 하지 않고 도리어 아무런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반란을 꾀했겠는가? 《사기》 등 여러 사서에서 한신의 ‘모반’과 관련된 기록을 분석해보면 많은 모순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유방의 승부가 나지 않았을 때에도 한신은 괴철의 유세를 거절했다. 그런데 유방이 공명을 이룬 때에 도리어 다른 뜻을 품었다는 것은 병법에 통달한 장수인 그가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을 했을 리가 없다.


둘째, 한신은 두 차례나 유방에게 병권을 박탈당한 적이 있고 게다가 괴철의 분석을 통해 자신에 대한 유방의 시기와 두려움을 몰랐을 까닭이 없다. 하지만 유방이 고릉에서 항우에게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모반하지 않았고 초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도 모반하지 않았으며 진 땅으로 유방을 마중 나갔을 때에도 모반하지 않았는데 왜 아무런 권한과 병력도 없이 장안에 칩거했을 때 모반을 꾀했겠는가?


셋째, 한신의 뛰어난 지혜로 감시받는 상황에서 진희와 “좌우를 물리치고 밀실에 들어가” 모반을 꾀하는 실책을 저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정말 이런 일이 있었다면 한신과 진희는 제3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모의했을 텐데 외부 사람이 어찌 대화내용을 알 수 있겠는가? 또 사마천의 기록이 어찌 그리 상세할 수 있겠는가?


넷째, 진희는 유방의 심복으로 한신과는 특별한 사이가 아니다. 모반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사가 달린 중대한 일인데 한신이 경솔하게 황제의 심복에게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진희는 거록에 부임한 후 수년간 한신과 서신왕래조차 없었는데 그가 한신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반대로 여후와 유방의 행동을 보면 소위 한신 ‘모반’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여후가 유도해 살해한 것이다. 조정에서 제일가는 공신이 피살되었음에도 유방이 여후를 책망하지 않고 심지어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미리 음모를 꾸몄음을 설명할 뿐이다.


한신이 해를 입은 일에 대해 후인들은 다양한 견해를 발표했다. 어떤 이는 한신이 이미 단에 올라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유방 등의 시기를 받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한신의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오만한 것이 재앙을 불러왔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한신이 비록 뛰어난 장수로 천하를 도모함에는 뛰어났지만 처세의 지혜가 부족해 자신을 도모하기에는 서툴렀다고 말한다. 사실 유방의 개성과 심리에서 보자면 한신, 팽월, 영포 등의 이성왕은 반란을 했건 하지 않았건 액운을 면하기 어려웠다.


한신과 팽월이 피살된 후 초한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던 여러 이성 왕들은 모두 각종 구실로 살해되었고 오직 장사왕 오예(吳芮)만이 일찍 사망해 무사히 생을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유방은 또 여러 대신들과 백마(白馬)를 죽여 맹세하기를 “유씨가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공격한다”(《사기‧여태후본기》)고 한 것을 보면 이성 왕을 제거하는 것은 유방의 확고한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한신이 피살된 진정한 원인이다.


한편 회남왕 영포가 두려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늙어 병든 몸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 숱한 고생 끝에 겨우 영포의 난을 평정했지만 전투 중에 날아온 화살에 부상을 당했다.


또 유방이 가장 신임했던 벗인 연왕(燕王) 노관(盧綰)도 살아남기 위해 흉노와 연락한 사실이 발각되자 흉노로 도망갔다.


오래지 않아 병이 심해진 일대효웅(一代梟雄) 유방은 여러 사람들이 배신하거나 떠나는 가운데 사망했다. / (계속) 大紀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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