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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에서 돈을 긁어 모은 보시라이 일가

편집부  |  20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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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보시라이가 다롄으로 이사한 1988년, 그의 아내 구카이라이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언론은 구카이라이가 뛰어난 변호사로 사건을 많이 맡아 돈을 벌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은 배후에 보시라이가 있었다.


보시라이는 공직자로서 청렴하고, 술 담배를 멀리 하고, 유흥업소도 드나들지 않으며 다롄을 ‘북방의 홍콩’으로 건설하기 위해 성심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다롄의 땅값을 올린 뒤 시세 차익을 통해 이득을 취했으며, 자신의 심복을 부동산 개발의 주임으로 앉혔다. 표면적으로는 개발 사무실의 주임이 결정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보시라이의 동의를 거쳐 토지 매매가 이뤄졌다.


당시 다롄의 모든 변호사 사무실은 경영이 어려웠다.  그러나 유독 구카이라이의 사무실은 계속 번창해 직원이 20~30명에 달했고 매일 바쁘게 돌아갔다. 구카이라이가 접수한 사건은 무조건 모두 승소했으며, 법원은 그녀가 맡은 소송안에 대해서는 30%를 양보했다. 보시라이 시장에게 공적인 일로 사적인 복수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구카이라이가 법정에서 직접 변호하는 일은 거의 없고, 수십 명의 변호사를 고용해 업무를 대행했지만 수임료가 불투명해 논란이 많았다. 유력 기업은 구카이라이에게 종신 법률고문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 등 앞 다퉈 보시라이의 환심을 사려 했다.


구카이라이는 다롄 사무실 외에도 베이징과 홍콩 그리고 뉴욕에 지점을 냈다. 특히 중국계 미국인 청이쥔(程毅君)과 ‘후이라이스 고문 투자회사’를 설립한 후, 부동산 자문 등 여러 분야로 업무 영역을 넓혔다. 보통 다롄에 투자하는 합작 기업은 기본적으로 모두 구카이라이의 자문을 거쳤다. 명목상으로 자문료를 냈지만, 실제로는 보시라이에게 상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시라이가 흡족해 하면 하수인은 적절한 토지를 기업에게 줬다. 구카이라이는 토지 양도, 해외 투자자 유치, 공사 청부 등 다양한 항목을 취급해 매년 1억위안이 넘는 돈을 벌었다.


구카이라이의 영향력 하에, 다롄시 위원회 일가족이 잇따라 사업에 뛰어들면서 부정부패는 갈수록 심해졌다.


관영 언론은 보시라이의 ‘소박한 생활’을 소개하면서 ‘1996년 이전, 구카이라이와 보시라이는 조그만 거실이 있는 보통 주택에 살았으며, 손님들은 거실에 있는 식탁에 앉아야 했다. 문밖에는 항상 사람들이 가득 있었고 자유롭게 시장의 집을 드나들 수 있었다. 시장은 자정 전에 돌아오지 못해 시장의 아내와 형제들은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바빴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다르다. 1988년 구카이라이는 베이징에서 다롄으로 이사했으며, 당시 진현에서 일하던 보시라이는 공금으로 비행기를 타고 진현과 베이징을 왕복했다. 그들은 다롄의 라오후탄 부근 해군 정원에 집을 지었다. 또한 다롄 수면 함정 대학은 보안이 철저해 사병이 매일 24시간 보초를 섰다. 해군 정원은 중국 해군 함정 대대장 이상의 간부 양성소로서 정보가 빠르고 수도로 직통하는 곳으로, 이곳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고위층으로 출세하기에 유리했다. 또 복지시설이 잘 되어있어 개인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칼럼니스트 장웨이핑의 조사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다롄에 여러 개의 부동산을 갖고 있었다. 그는 90년대 후반부터 다롄 해변 관광지에 위치한 약 200평방미터의 2층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다롄 시장이 된 후, 보시라이는 편리한 출근을 이유로 다롄시 시강구 창장로에 아파트 3채를 소유했으며 성장과 상무부장으로 승진한 후에도 계속 보유했다.


보시라이는 아내와 측근을 이용해 재판에 개입해 돈을 벌었다. 또한 구카이라이는 지식인과 왕래하면서 직접 다롄 문학예술연합회 인사에 개입해 친분이 있는 사람을 부가 수입이 좋은 관직에 추천했다. 구카이라이는 각종 공공홍보 활동에 참석하고, ‘중국 민속 문화 연구소’를 설립해, 매년 수만 위안의 후원금을 받았다. 이 돈으로 문인들을 포섭해 보시라이와 자신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홍보하도록 했다. 구카이라이는 유명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고, 자녀들이 도예가에게 도예를 배우도록 했다. 다롄 언론계에서는 구카이라이를 여성 정치가이자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인 ‘장칭(江靑)’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하지만 구카이라이는 장칭을 능가하는 식견이 있었다. 그녀는 중공 정계의 어두운 면과 내분의 잔혹함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중공 정계가 전장과 같아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구카이라이는 90년대 초 베이징 아시안게임선수촌에 상가를 샀고, 변호사 사무실을 홍콩과 뉴욕으로 옮겼으며, 1997년 싱가포르 영주권을 손에 넣었고 2000년 12세의 아들과 함께 거액의 재산을 국외로 옮겼다. 보시라이는 중국 최초의 뤄관(裸官)이라 할 수 있다. 뤄관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가족을 해외로 이주시킨 뒤 언제든 도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무원이나 공산당 간부를 말한다. 보시라이 일가는 뉴욕, 홍콩, 싱가포르, 밴쿠버에 무수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구카이라이는 중국 육상계의 대부 마쥔런(馬俊仁)의 변호를 맡으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이를 계기로 막대한 부를 누렸다. 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그녀는 마쥔런 소송에서 실제로 법정에 나선 적은 없다.


1998년 구카이라이는 대필 작가를 통해 ‘나는 마쥔런을 위해서 변호사가 됐다’를 출판했고, 나중에는 ‘나는 마쥔런을 위해 소송했다’로 개정판을 냈다. 하지만 13년 이후 이 소송은 ‘100가지 터무니없는 소송’에 선정돼 구카이라이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책 내용에서 구카이라이가 주장한 것과 달리 마쥔런은 선수들에게 금지 약물을 복용하게 했고, 마쥔런이 광고한 ‘중화 자라정’은 중국에서도 부끄러운 약품으로 꼽힌다.


소송을 맡을 당시 구카이라이가 했던 말의 진위가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구카이라이의 연기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99년 홍콩의 한 잡지는 ‘구카이라이와 마쥔런의 코메디’라는 제목하에 구카이라이가 단지 책만 내고 법정에 나가지 않은 블랙 코미디의 실상을 폭로했다. 다롄 정계는 발칵 뒤집혔고, 분노한 보시라이는 다롄시 위원회에 ‘홍콩 및 해외의 적대 세력과 첩보조직의 침투와 공격을 처단’하라고 요구해 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보시라이의 욱하는 성격은 익히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변덕이 심해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아닌 척하거나, 무소불위로 권력을 휘두른 사례는 다롄 시장 시절에도 많았다.


90년대 후반 보시라이는 경추 질환으로 고생했다. 다롄 중의원은 가장 실력이 뛰어난 중의사 톈 선생을 파견해 보시라이를 치료하게 했다. 톈 선생은 수십 회에 걸쳐 보시라이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보시라이의 집을 찾았다. 한번은 톈 선생이 보시라이의 집무실에서 보시라이의 목을 지압하고 있었다. 이 때 비서가 문서를 들고 오자 보시라이가 갑자기 머리를 돌리면서 톈 선생의 손이 보시라이의 목을 강하게 누르게 됐다. 보시라이는 정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 그를 해치려한다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당황한 톈 선생은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났고, 보시라이는 톈 선생을 조사하도록 했다. 하지만 배우 ‘서기’의 주치의로 평생 인술을 펼친 톈 선생의 배후는 깨끗했다. 그에게서 어떤 흠집도 발견하지 못하자, 보시라이는 병원을 압박해 톈 선생을 조기 퇴직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시 정부 고위공무원에게 자동차를 배분하면서 서열에 따라 번호판을 부착한다. 예를 들어 다롄시 서열 1위는 시장이 아니라 공산당 서기다. 그러므로 시장인 보시라이는 그보다 낮은 번호를 달아야 했다.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보시라이는 공안국에 자신이 윗 번호를 가져야 한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이 같은 트집에 공안국은 두 손을 들었고 보시라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행정부 공무원이 공산당 서기보다 높은 순위의 번호판을 달게 됐다.


보시라이의 시찰도 볼거리였다. 보시라이는 다롄의 왕으로서 시찰시 사전에 방문지를 정리하도록 했으며, 선두에는 수입 지프 자동차가 서고 뒤로는 무장경찰이 운전하는 아우디 승용차를 타고 갔다. 사방은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호위했으며, 사복 경찰도 다수 대동했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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