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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공산당문화]- (29) 제3장 당黨 문학을 이용한 중공 주입의 몇 가지 특징
2008-01-18 11:51:57 | 조회 6008
당문화는 중국 문화 위에 달라붙은 일종의 부체(附體) 문화입니다.
전통문화, 민간문화의 형식과 요소를 이용하는데 능숙한 중공은
이를 통해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는 목적에 도달했습니다.
(가) 민족문화형식을 전면적으로 도용
인류문화에 대한 중공의 태도는 지금까지
자신의 통치에 유리한 부분을 모두 가져다가 주저 없이 쓰는 것입니다.
문학 방면에서, 고체시(舊體詩詞), 현대시, 각종 민요, 중단편소설, 장편소설, 장회(章回)소설, 산문, 화극(話劇), 전통 희극 등은 모두 당문화의 내용을 싣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중공은 그것을 ‘낡은 병에 새 술 담기’, ‘민족 형식에 사회주의 내용을 가미한 것’으로 미화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습니다.
미(美)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 판단은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는 것으로,
장기간 형성된 습관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시작하여 ‘새 병에 새 술을 담는 것’보다
사람들이 가진 미에 대한 고유의 가치 판단 습관을 이용해
당문화를 슬쩍 끼워 넣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민족적인 형식에 당문화의 내용을 담은 결과,
사람들에게 신선하고 신기한 느낌을 주면서도
중공을 선전하는 최대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시, 민요, 소설, 화극(話劇) 등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당문화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나)문학적 기교 활용
비록 ‘당’은 문화(文化)의 반대어에 가깝고
‘무력화’, ‘저속과 야만화’, ‘반(反) 문화’와 동의어나 마찬가지지만,
‘당’은 또 문화를 활용하는데 아주 능숙해 문화를 이용해 문화에 반대했습니다.
중공의 어용 문인들은 당문학의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야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백묘(白描), 대조(襯托), 반전, 긴장감 조성, 공감대 형성, 기복, 심리묘사, 전형적인 성격, 개성적인 언어 등 동서양 고전문학 중의 성공적인 테크닉을 거의 전부 가져다 썼습니다.
중공은 문예에서 ‘보급’을 중시했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온 문학작품은 수준이 높지는 않았지만
주로 문화수준이 높지 않은 노동자, 농민 대중들을 상대했기 때문에
당문화를 주입하는 목적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다)금서(禁書)를 이용해 문화에 대한 갈증 강폭
배고픈 사람은 무엇을 줘도 모두 맛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중공은 어용 문인들의 손에서 나온 이른바 문학작품이라는 것들이
수준 높은 세계 문학작품들과는 전혀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질투심이 강한 여자가 백설 공주를 죽이려 했던 것처럼
중공도 정권을 탈취한 뒤,
계획적으로 좋은 서적들을 불태워 없애거나 읽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문화혁명 시기에는 무릇 미(美)와 관련된 것이기만 하면
모두 ‘자산계급’의 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갈증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독주(毒酒)라도 마시려 했으며
당문화는 바로 이 틈을 타고 들어갔습니다.
(라) 반복을 통한 중독
술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술맛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술을 그토록 좋아해 술이 없으면 살지 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중독 때문입니다.
장기간 한 가지 문화 속에 잠겨있다 보면,
사람들은 일종 기대심리를 갖게 됩니다.
어느 한 문예작품이 이런 기대를 만족시켜 주면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처럼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중독에 대한 만족감입니다.
이 점을 안다면 미적 감각(美感)이란 것이
어떤 때는 비이성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사람들의 미에 관한 가치판단 역시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공은 역시 이 점을 이용했습니다.
‘당’의 교조(敎條)는 자신들이 만든 구호나 노래, 그림, 비유, 이미지를 잘 포장한 후, 각종 방식을 이용해 끊임없이 반복하고 강화하여,
중국인들에게 일종 변이된 ‘미적 감각’을 억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산적 두목의 시’라고 하는 ‘마오쩌둥의 시’,
거칠고 천박한 ‘마오쩌둥 문체’,
제멋대로 갈겨 쓴 ‘마오쩌둥 서법(書法)’을 반복적으로 모방하고 숭배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이 20세기 중국 예술의 최고봉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소위 ‘홍색 경전(紅色經典)’은 아직도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공이 장기간 고심하여 육성한 사악한 당 문예에 대한,
민중들의 심리적 의존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4) ‘보이는 흑수黑手’에서 ‘보이지 않는 흑수’에 이르기까지
중공 당문학(黨文學)을 투시해 보면
또 한 가지 해결할 문제가 있습니다.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의 당문학은
문화혁명을 경계로 해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단계는 1949년부터 문화혁명까지이며,
2단계는 문화혁명이 끝난 후부터 현재까지입니다.
1단계는 ‘당’이 태엽을 조이고 문화의 명줄을 끊어놓았고,
문예를 전횡하는 정치를 했으며
올가미를 단단히 조여 갈수록 범위가 좁아지는 일종 ‘수렴’의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끝난 후에는
“문학은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라는 구호를 방치했고,
‘금지구역을 돌파’하고 ‘사상을 해방’시켰으며,
작가들의 창작조건에 대한 속박도 갈수록 느슨해졌습니다.
현재 중국 문단은 미녀작가, ‘깡패문학(痞子文學)’, ‘하반신 작가’ 등 정말이지 ‘해방’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중공이 문학을 조종하고 이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인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25년을 한 세대로 봅니다.
중공이 정권을 잡았던 1949년부터
중공 제11차 2중 전회가 열렸던 1978년까지는 29년입니다.
1920년대 이전에 출생한 사람은 1949년 이전에
이미 30이 넘어 세계관이 이미 형성된 상태였고
1978년에는 이미 60이 넘어 퇴직 연령이 지났습니다.
그때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중공의 독즙(毒汁)을 먹고 자랐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당문화는 이미 기본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에 중공은 책략을 바꿔 일부 영역에서 제한적이나마 뒤로 물러났습니다.
종전의 ‘보이는 흑수’에서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흑수’로 변해
전체적으로 민중들에 대한 당문화를 ‘거시적으로 조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필요할 경우에는 ‘흑수’는 언제든 손을 뻗칩니다.
당문화가 확립됐다는 증거는 ‘당’의 직접적인 지도를 기다리지 않고도,
‘사상 해방’을 겪은 후 ‘풀려난’ 문학이
여전히 중공의 정치적인 필요에 완전히 부합한다는 점입니다.
문화혁명 이후의 유명한 상처문학과 반성문학도
문화혁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중공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합니다.
잘못을 범한 것은 린뱌오(林彪)와 사인방, ‘극좌사조’이고,
‘당’은 여전히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하고 용감하게 잘못을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을 개선했다는 것입니다.
對중국 한국어 단파방송 - SOH 희망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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