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 속에 후야오방이 집권했던 80년대는 중국 근대에서 정치 분위기가 가장 좋았고 국민들도 가장 즐거웠던 시기로 남아있다. 당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도 가장 좋았고 일반인들의 문화생활도 가장 풍부했으며 국민들 사이에서는 활기찬 이상주의가 만연하고 있었다.
한 시대의 모습은 흔히 그 시대를 이끈 지도자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폭력적인 마오쩌둥이 있었기에 중국에는 ‘문화혁명’이라는 황당한 시대가 있었고, 어리석은 브레즈네프가 있었기에 소련에는 침체된 70년대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상주의 인격을 가진 후야오방이 있었기에 이상주의로 생기발랄했던 80년대가 있었다.
우리가 평소 볼 수 있는 중공 지도자들은 모두 똑같은 복장을 입고 좀처럼 웃을 줄 모르며 걸핏하면 이마를 찌푸리고 적의에 가득 찬 눈빛을 내보낸다. 그러나 후야오방만은 예외다. 그는 활기가 넘쳤고 고지식하지 않았다. 그의 즉흥적인 발언은 늘 기타 중공 관리들로부터 ‘신중하지 않다’는 평을 듣게 했지만 바로 이런 정치적 ‘순진함’이 그를 국민이 가까이 하기 좋아하는 지도자로 만들었다. 이는 또한 그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전국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 했던 이유였으며 6.4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후야오방의 이러한 인격은 시대와 국민들의 요구에 부합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민주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에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1989년 4월 23일, 10만 대학생들이 후야오방의 추도회가 열리는 인민대회당 밖에 몰려와 주동적으로 후야오방을 기념했다. 이는 학생들의 당내 민주파 지도자에 대한 존경이었으며 후야오방의 이상주의가 현실로 될 것을 바라는 외침이었다.
훌륭한 정치 인물은 죽은 후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1987년 중공 내부 정치투쟁에서 후야오방을 고립시키고 온갖 수단을 다해 그를 끌어내리려 했던 사람들도 나중에 하나 둘씩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의 죽음도 후야오방의 죽음처럼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1987년 ‘궁정정변’에서는 후야오방에세 승리했지만 2년 뒤인 1989년에는 후야오방에게 철저하게 패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특별했던 우리를 ‘89세대’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후야오방과 갈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후야오방의 죽음이 ‘89세대’의 학생운동과 민주운동을 유발했고 우리 세대로 하여금 중공 당국에 대한 심리적인 의뢰에서 벗어나 민주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했기 때문이다.
현재, 모두들 후야오방을 기념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가장 기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후야오방의 이상주의 인격이다. 지금 중국에는 현실주의자와 ‘총명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이상주의자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적다.
후야오방의 이름이 우리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는 양심을 불러 일으켜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6.4 천안문 학생운동 지도자 왕단(王丹)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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