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 1989년 6월 4일, 중국 민주화운동과 공산 정권 개혁에 대한 희망은 천안문 광장 학살로 산산이 부서졌다. 오늘날까지 중국공산당(중공)은 중국 민중들에게 학살 진상을 은폐하고 있다.
천안문(톈안먼) 사건 20주년이 수주 앞으로 다가오자, 이 비극에 직접 영향을 받은 미국과 중국의 생존자들이 진상 규명을 요청하고 나섰다. 그들은 학살 10주기가 다가오면서 새 미국 행정부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천안문사건 당시 다리를 잃은 팡정(方政)씨는 5월 18일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인권단체인 ‘중국 이니셔티브(Initiatives for China)’의 후원으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1989년 6월 그날 아침에 제 다리와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공산 독재 정권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을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팡씨는 천안문 광장을 빠져나가려다 계엄군 탱크에 다리가 깔린 인물로, 현 중공 정권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발표하도록 초청받은 두 명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이다.
현재도 중국에서는 천안문 사건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중국 언론은 이 사건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통제가 심한 중국 인터넷에서 검열되는 것은 물론이다.
중국의 ‘양심수’였던 양젠리(楊建利) 박사는 1989년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에서 수학을 전공하다가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민주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의 공식 전기(傳記)에 따르면 그는 베이징에 제때에 도착해 계엄군의 총과 탱크에 의해 수천 명이 학살 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계엄군에게 잡혔다가 겨우 빠져나와 미국으로 돌아왔다. 2002년 그가 중국을 다시 방문하자 중공 정권은 그를 5년동안 투옥시켰다. 2007년 그는 ‘중국 이니셔티브’를 창립했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두 주역이 크리스 스미스 하원의원과 만났다. 스미스 위원은 천안문 광장의 비극에 대한 기억을 특별 보도자료로 만들었다.
6월 4일, 학살 명령
스미스 하원의원은 1989년 5월, 수십만 명의 시위자들이 천안문 광장 및 기타 장소에 모여 평화적인 민주화 개혁에 대한 희망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일부 공산당원들도 공산주의 통치가 대기근, 문화혁명 그리고 전체주의적인 사회 통제에 의해 수천 만의 삶이 파괴되는 비극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동조했다고 스미스 의원은 증언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장쩌민은 자오쯔양 등 개혁가들을 제치고 천안문 광장을 탱크로 밀어버렸고 수천만 명의 평화 시위자들을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스미스 의원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츠하오톈(遲浩田) 장군을 언급했다. 츠 장군은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 시위자들을 살해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츠 장군은 “천안문 광장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계엄군은 사람들을 밀어내는 이외에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은 이와 전혀 다르다. 팡정씨는 6월 3일 밤 10시에 천안문 광장에 있었다. 군인들은 4면에서 광장으로 총을 쏘았다. 그의 여학생 후배도 주변에 있었는데 특히 가스탄이 그들 바로 옆에서 폭발하자 그녀는 매우 두려워했다. 그 여학생의 선배로서 그는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감을 느꼈다.
군인들은 그 지역에 담을 쌓았고, 빠져나갈 통로를 한 곳만 만들었다. 그들이 그곳을 떠나려 할 때 그는 탱크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학생을 담 위로 들어올릴 수 없자 재빨리 탱크에서 떨어지도록 그녀를 밀쳐냈다. 하지만 그는 땅에 넘어졌고 탱크가 곧 그의 다리를 덮쳤다. 탱크의 금속벨트 속으로 압착돼 들어간 다리는 즉시 절단됐다.
“이 일은 천안문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팡씨는 말했다. 탱크는 사람들이 천안문 광장을 떠나려고 할 때 밀고 들어왔다.
팡씨가 병원으로 이송됐을 때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거의 사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른쪽 다리는 허벅지까지 왼쪽 다리는 무릎까지 절단됐다. 팡씨는 베이징 체육대학을 곧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이 사고 이후 대학에서는 그에게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일어섰다. 국내 장애인 대회에서 여러 개의 금메달을 딴 그는 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해 원반과 창던지기 종목에서 우승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가 장애인이 된 이유를 알게 된 국가지도자들은 그에게 국제경기 출전권을 주지 않았다.
그는 직업과 기타 보상들을 받는 대가로 침묵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당국에게 주기적으로 시달렸고, 취직도 하지 못했다. 수 년 후 팡씨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다.
천안문 광장의 비극
스미스 의원을 격노하게 한 것은 천안문 광장에서 한 사람도 살해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만든 츠 장군이 1996년 12월 백악관에 초청받아 19발의 예포를 쏘는 예우를 받았다는 것이다.
20년이 지난 후 중공 정권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츠 장군의 발언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스미스 의원에 따르면 천안문 사건 당시 수천 명이 사망했고 약 7천명이 부상당했다.
“이 거짓말에 대항하기 위해 저는 서둘러 전 인민일보 편집장을 포함한 천안문 학살의 목격자들을 모아 청문회를 개최했습니다.”
스미스 의원은 또 츠 장군과 증언대에 세우고 싶은 다른 누군가를 초청했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양젠리 박사도 목격자로 참여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저는 여러 대의 트럭에서 군인들이 나와 시민들에게 자동 소총을 발포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이 발포할 때마다 3-4명씩 맞았고 군중들이 땅으로 쓰러졌습니다. 제거 본 것만13명이 살해됐어요. 4대의 탱크가 광장에 매우 빠른 속도로 왔습니다. 앞의 두 대는 학생들을 쫓았고 그들을 덮쳤습니다. 모두가 비명을 질렀어요. 세어보니 11명이었습니다.”
‘타임지’의 베이징 지국장 데이비드 에이크먼은 스미스 의원에게 말했다.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아이들도 살해됐습니다. 9살 짜리 남자 아이는 등에 7-8발의 총을 맞았어요.”
1990년대 초, 스미스 의원은 프랭크 울프 의원과 함께 천안문 사건과 관련돼 40여명이 수감되어 있는 베이징 감옥을 방문했다. 그들은 ‘정부에게 자유를 평화적으로 청원했다’는 이유로 엄중한 죄값을 치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의 걸어다니는 해골처럼 보였습니다.”라고 스미스씨는 말했다.
중국 방문 예정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기자 회견 참석자들은 미국이 정치적 개혁을 원하는 중국인들의 최근 요청들을 강력하게 지지해줄 것을 기대했다. 양젠리 박사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천안문 사건 기념일 전야에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젠리 박사는 “펠로시 대변인은 중국의 평화적인 정치 개혁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천안문 어머니회’를 만날 것을 요청했다. ‘천안문 어머니회’는 1989년 6월 4일의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는 희생자 가족 및 친척들의 모임이다.
허드슨 연구소 상위 연구원이자 전 레이건 행정부 관리였던 마이클 호로위츠와 포모산 공공정책 협의회 책임자인 아이리스 호는 중국 정권의 인권정책이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로위츠는 중공 정권이 구 소련식 인권정책으로 급선회했다고 강조하면서, 중국인들을 정권이 금지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공 정권이 아직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자유국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50여 명의 파룬궁수련자 인터넷 전문가들이 5만 명이 지키는 중국의 보안 검열을 뚫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고 말했다.
21세기의 벽은 지난 날의 ‘죽의 장막’이 아닌 전자 방화벽이지만 그는 비로소 이 방화벽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며 기뻐하고 있다.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이인숙, 김경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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