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빈은 중국 심양시 법원에서 금융 사기죄 등 6가지 죄명으로 18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것은 그가 중국 대륙의 갑부 행렬에 들어선지 2년이 채 안 되었으며 , 북한 신의주 특구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지 1년이 안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양빈은 지난 시절 권력과 금융 시장을 장악했고, 그의 실패와 성공담은 전기적인 색채를 띨 정도였다. 그러나 어제의 갑부는 오늘은 옥중 죄인으로 전락했고, 그의 이러한 인생 비극은 오늘날 중국 대륙의 특수한 경제 환경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을 짓고 손님 초대연을 열었으나 그 건물이 무너져 버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양빈이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역정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성공한 인사들이 그러하듯 양빈에게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5살에 고아가 된 양빈은 외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렸을 때 양빈은 "고기반찬을 먹어 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일 정도로 아주 빈곤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난한 아이는 가난을 이겨내려 몸부림쳤다. 그는 공부에 열중했고,음식점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 소포 배달부 등 힘든 일들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그는 유학을 가기 위해 영어를 열심히 배웠고 네들란드어, 벨기에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양빈은 25세가 되던 해, 네덜란드로 이민 갔으며, 그곳에서 방직업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는 것과 손놀림이 재빠른 양빈은 네덜란드에서 많은 돈을 벌었으며 사업경험도 쌓게 되었다. 그가 다시 고향에 돌아 왔을 때, 그는 두 개 큰 기업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중국에 돌아 온 후, 양빈은 동북지역에 있는 심양시를 창업의 기지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돈'의 관계를 무엇보다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정부 관원들과의 친밀한 관계 수립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권력의 힘을 빌어 양빈은 사업을 점점 더 크게 벌였고, 정부 임원과의 관계도 감추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부 임원들의 자제들과 사회 명사들을 모집해 자신의 회사에 취직시키는 등 양빈과 권력은 점점 더 유착되어 갔다.
이러한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양빈의 재물은 모두 중국 정부에서 왔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양빈의 '어우야 그룹'은 정부의 힘을 빌어 부단히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홍콩의 '중자은행'에서 1억6천만 위안까지 대출받은 적도 있었다.
2001년, 양빈은 중국에서 두 번째 갑부로 되었다. 이러한 '영예'로 그는 사람들의 화제거리로 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재정 적자가 갈수록 커지게 되자, 전 국무원 총리 주룽지는 기업들의 탈세 여부를 조사할 때, 양빈과 같이 짧은 기간 동안 재물을 모은 사업가들을 집중 조사하게 하였다.그리하여 그가 탈세, 금융사기 등 불법행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양빈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 북한 정부는 양빈을 '신의주 경제특구'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이것은 북한의 김정일이 직접 임명한 것이기에 외부의 많은 추측과 의혹을 자아냈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양빈이 '정치적인 보호'를 받아 중국 정부의 추적에서 벗어 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경은 평양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양빈은 직위를 수행하러 가는 도중에 체포되었고, 수 개월 동안의 조사와 재판을 거쳐 심양시 중급인민 법원에서 18년 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죄명은, 농업용지 불법전용, 계약사기, 뇌물 공여, 금융증권 위조, 금융사기, 허위출자 등이다.
양빈의 사례는 오늘의 중국에서 개별적인 사건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은 지금까지 10년동안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한편으로 정치제도는 이에 따르지 못했다. 때문에 많은 관리들이 사업가들과 결탁하여 국가 재산을 사기하고 탈세하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있었던 양빈도 결국 법망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글 / 주혜영 (대기원 해외통신원)
기사전재 - 2005년 3월
對중국 단파방송 - SOH 희망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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