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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되돌아본 1989년 천안문사건’

편집부  |  200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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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1989년 6월 4일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이날은 50여 일 동안 지속됐던 학생 민주화운동이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막을 내린 날이었다.

 

20년이 지났지만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이 사건은 중국에서 여전히 금지 구역이 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었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그들의 일생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망명 생활은 정신적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여행을 할 때에도 휴식을 할 때에도 잠시라도 그 사건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죄책감, 분노, 미래에 대한 초조함, 이 세 가지는 항상 저를 따라다녔지요.”

 

이는 학생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우얼카이시(吾爾開希)가 한 말이다. 천안문사건 이후 당국의 수배 대상이 된 그는 현재 대만에 정착해 있다.

 

20년 전, 베이징 사범대학 학생이었던 그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동년배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단순한 기대에 들떠 있는 활기찬 청년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이 전면에 나서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중국의 분위기는 희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대학생들은 책임감을 느끼고 1979년부터 해마다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같은 학생운동은 1986년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안후이(安徽)성 대학생들이 민주선거와 부패 척결을 요구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는 상하이, 베이징 등 도시의 대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두려워진 중공 당국은 학생운동을 ‘자산계급자유화운동’으로 몰아가면서 대학생들이 사회주의를 부인하려 한다고 선전했다.

 

결국 학생운동을 방임한 책임으로 개혁파 지도자인 후야오방(胡耀邦)이 당에서 축출되었고 보수파의 대표 인물인 리펑(李鵬)이 국무원 총리 자리에 올랐다.

 



▲ 후양오방 장례식이 치러진 날, 3명의 학생 대표가
인민대회당 계단에 꿇어 앉아 리펑에게 탄원서를
올렸지만 리펑은 나타나지 않았다(64메모)
학생운동은 일단락 지은 듯 했지만 1989년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2년 후 후야오방이 서거하자 정치개혁을 강렬하게 희망했던 대학생들은 또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1989년 4월 15일,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이 갑자기 사망했다. 4월 21일, 수십 만 대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한 채 천안문 광장에 모여 이튿날 거행될 장례식을 기다렸다. 이는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연구원으로 있는 양젠리(楊建利) 박사는 그해 학생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인민대회당 앞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지요. 그들은 질서 정연했는데, 당국에 여러 가지 요구를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학생 3명이 인민대회당 계단에 꿇어 앉아 청원한 장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민주화운동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지요.”

 

학생들은 청원서에서 후야오방의 민주, 자유 등 주장을 긍정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언론자유를 보장할 것 등을 요구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 리더 왕단은 당시 베이징대 학생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당시 베이징 대학생 자치연합회장이었다.

 

“8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개혁은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부패 때문이었죠. 우리의 요구는 매우 간단했는데, 정치개혁을 통해 부패 현상이 더 이상 만연되는 것을 막자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학생들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무시해 버렸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무기한 수업 거부로 당국에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저녁 천안문 광장에 모인 학생은 20만 명이 넘었다.

 

후야오방 사망 후 총서기직에 오른 개혁파 인물 자오쯔양은 학생들과 대화할 것을 주장했지만 학생들의 청원 사건이 있은 이튿날 북한 방문을 떠났다.

 

콜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왕쥔타오(王軍濤)는 학생운동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체포되었으며, 학생운동 배후의 검은 세력이라는 모함을 받았다.

 

“자오쯔양은 북한 방문을 떠나기 직전 정치국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가 현상태를 유지하자고 말하자 리펑도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자오쯔양이 떠나자 리펑은 즉시 덩샤오핑에게 달려갔고, 덩샤오핑은 학생운동을 동란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4월 26일자 인민일보에는 덩샤오핑의 주장이 발표되었습니다.”

 



▲ 천안문 광장의 학생들(64메모)
인민일보 4.26사설은 학생운동을 ‘소수 사람들이 발동한 반혁명 동란’으로 규정했다. 우얼카이시는 당시 회의 중이었던 학생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했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는 당국에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십개 대학의 학생 대표들이 4월 27일 베이징시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했지요.”

 

4.26사설의 발표로 학생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그 이튿날, 약 5만 명에 이르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왕쥔타오는 그 때부터 학생들의 요구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후야오방 추모에서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애국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4월 30일 베이징으로 돌아온 자오쯔양은 4.26사설에 항의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열린 ‘5.4운동 70주년’ 회의에서 연설을 발표, 민주와 법치의 틀 안에서 학생운동 문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오쯔양의 발언은 학생들에게 큰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우얼카이시는 이렇게 회고했다.

 

“5월 4일 자오쯔양은 대화를 통해 정치적 혼란국면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학생운동에 큰 희망을 가져다주었지요.”

 

왕쥔타오는 당시 중공 중앙정치국도 자오쯔양의 주장에 동의했지만 교육부의 반대에 부딪쳤다고 말했다.

 

“그런데 교육부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부장은 앞서 동란이라고 규정한 것에 따라 당위원회와 교수들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는데 지금 와서 다른 말을 하면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반발했습니다.”

 

양젠리는 학생들이 단식에 돌입한 것은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과도 큰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하게 되자 외신들이 베이징에 몰려들었습니다. 중국과 소련이 관계를 회복한 후 소련 지도자의 첫 중국 방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최대한 그 기회를 이용해 세계의 이목을 끌려 했지요.”

 

5월 13일, 차이링(柴玲) 등 학생 지도자들이 단식 운동을 선포함에 따라 학생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수백 명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와의 대화를 요구했고, 정부가 4.26사설이 잘못됐다는 것을 시인하고 학생운동을 애국운동으로 재평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학생들이 단식에 돌입한 모습이 TV에 방송되자 베이징 의사들은 자발적으로 응급치료팀을 조직했고 시민들도 단식에 동참하거나 여러가지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학생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목숨까지 내걸고 단식하고 있었지만 당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5월 17일, 또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 때부터 지식인들이 학생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덩샤오핑을 ‘황관을 쓰지 않은 황제’라고 비판했다.

 



▲ 천안문 광장의 학생들을 찾은 자오쯔양(64메모)
또한 그 때부터 중공 고위층 내부의 모순도 갈수록 격화됐다. 시위 이틀 후, 자오쯔양이 갑자기 천안문 광장의 학생들을 찾아왔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학생들에게 사과하면서 천안문광장에서 철수할 것을 권했다. 우얼카이시는 자오쯔양이 당시 당국의 진압 계획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자오쯔양은 당시 많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천안문광장을 찾은 것은 그가 자신을 위해 해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처럼 때가 이미 늦었습니다.”

 

그것은 자오쯔양이 당에서 축출되기 전 마지막 외출이었다. 5시간 후 베이징에는 계엄령이 내려졌다.

 

5월 20일 저녁, 리펑이 TV화면을 통해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날 저녁 전국 각지의 군부대가 베이징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왕쥔타오는 이렇게 회고했다.

 

“10여 만 대군이 베이징 외곽에 진입하려 했지만 2시간 만에 베이징 시민들에 의해 밀려났습니다. 매우 대단했죠. 시민들은 길을 가로 막고 그들에게 학생들을 진압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줬습니다. 그리하여 군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자발적으로 물과 음식을 가져다 줬다. 그 시각 천안문 광장에는 이미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있었고 학생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왕쥔타오는 이렇게 말했다.

 

“급해진 덩샤오핑, 양상쿤은 계엄 부대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시민들과 차단시킨 뒤 거짓말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군인들이 피 비린내 나는 진압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도록 말이죠.”

 



▲ 지휘관의 설명을 듣고 있는 계엄군(64메모)
6월 3일 저녁, 계엄군은 “저항에 부딪혔을 경우 어떠한 조치도 불사한다”는 지시를 받고 베이징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밤 10시가 지나자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천안문 광장의 학생들은 군인들의 진압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공포탄이나 최루탄 같은 것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군인들이 발사한 것은 실탄이었다.

 

6월 4일 새벽, 천안문 광장에서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목격자인 양젠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앞에 있는 탱크가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던지면 그 뒤를 따르던 탱크는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내뿜었습니다. 탱크는 또 천안문광장에 남아 있는 학생들을 깔아뭉갰지요. 탱크 네 대가 지나간 뒤 우리는 시체 11구를 찾아냈습니다.”

 

진압이 끝난 후, 중공 지도자들은 ‘반혁명 폭도들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 對중국 단파라디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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